[하우투] 공연예술제작물,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작은 역사의 주인이 되다

김현옥 _ 국립예술자료원 학예사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생산의 주체이다. 그러니 공연 기록이 분산적, 파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럼 이들을 각각 어떻게 누가 기록하고, 보존할 것인가?
 

무엇인가를 기억하고 기록한다는 것은 삶의 본질에 다가가는 것이다. 기록은 창작의 결과물뿐만 아니라 과정과 맥락 그리고 소통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산출물을 주변에서 중심으로 끌어올린다. 그래서 기록은 문득 꺼냈을 때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다시 무엇인가를 시작하게 하는 힘이 있다. 과정과 결과에 대한 기록은 스스로 역사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작은 출발이다. 그러나 무분별한 기록은 오히려 후대에 폐를 끼칠 수 있다.

연간 2만 편의 공연 그리고 어마어마한 딸림 자료들

공연예술 아카이빙은 다른 예술장르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비정형적이라 까다롭고 난해하다. 연간 2만 여 편의 공연이 쏟아진다. 복제품이 아니다. 2만이라는 숫자 안에는 훨씬 엄청난 노력의 시간, 물리적 공간, 예산, 다양한 사람 그리고 이야기가 자리한다. 공연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그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 많은 자료가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질 운명에 처해 있다. 무대 위에서 관객과 호흡하고 사라지는 것이 공연의 숙명이라는 인식도 있고, 제작 여건이 열악해 신경 쓸 겨를이 없기도 하며, 무대, 의상, 소품 등은 마땅히 둘 곳이 없어 눈물을 머금고 폐기하는 사태도 발생한다. 게다가 여타 장르에 비해 '공연의 특성을 잘 살려서' 기록하기가 어려운 것도 요인이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프로그램, 전단, 티켓, 포스터 등은 어느 날 갑자기 쓰레기통으로 버려지고, 영상과 사진은 분명히 찍었는데 누구한테 있는지 알 수 없다. 참여한 역할, 방식에 따라 각기 다른 자료를 가지고 있고, 이 조각조각의 자료들이 과연 가치가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비록 예술자료를 수집, 보존, 활용하기 위해 존재하는 기관이 있긴 하지만 모든 자료를 망라할 수 없는 일, 설령 시스템을 갖췄다 하더라도 급변하는 공연예술의 특성과 다양성을 충분히 반영하기 어렵다.


<홍벨트 페스티벌>(2009) <홍벨트 페스티벌>(2009)
故박용찬 선생의 기증 자료. 서울 종로에서 운영하던
고전음악감상실 '르네상스'에 소장하던 음반, 도서, 기자재 등(촬영: 이승무)

 

故이진순선생의 <인간부결> 연출대본, 1966년 극단 광장 제2회 공연(김의경 선생 기증)
故이진순선생의 <인간부결> 연출대본, 1966년 극단 광장 제2회 공연(김의경 선생 기증)

故이진순 선생의 (인간부결) 연출대본,
1966년 극단 광장 제2회 공연
(김의경 선생 기증)

 

파편적, 분산적으로 존재하는 기록

공연예술자료는 형태, 유형, 기능에 따라 다르게 분류한다. 서지자료, 시청각자료, 현장자료, 실물자료 혹은 실황자료, 과정자료, 관람자료, 학술자료로 구분할 수도 있고, 공연, 예술가, 단체, 공간 등으로 나누고 그 안에서 다시 유형을 세분화하기도 한다. 공연기록이라고 하면 통상 시청각자료(영상, 사진)와 홍보자료(프로그램, 포스터)를 떠올린다. 예술자료 관리기관이 수집해서 제공하는 범위이기도 하다. 공연영상을 통해 연기, 연출, 무대, 음악, 조명, 분장 등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고, 인쇄물을 통해 기획이나 연출의도, 출연진과 스태프의 정보를 알 수 있다. 가장 기본이 되는 자료이지만 이것이 공연기록을 대표할 수는 없다. 무대의 감동을 재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열정을 간과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공연이란 무엇인가? 말, 글, 몸이 중심이 되는 공연과 그렇지 않은 공연이 공존한다. 무엇이든 공연이 될 수 있고,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형식, 표현방법, 수단의 다양화, 장르간의 융합, 통섭, 경계허물기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공연기록도 공연의 본질, 특성을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공연에 따라 다르지만, 다수의 공연은 기획, 연습, 공연, 사후단계의 과정을 거친다. 일부 결핍 혹은 과잉될 수도 있는데 이 과정에서 시놉시스, 대본(무보, 악보), 작가노트, 연출노트, 연습일지, 프로그램, 포스터, 티켓, 기획서, 보도자료, 평가자료 등의 인쇄자료와 사진, 그림, 도면, 녹음, 영상 등의 시청각자료, 무대, 의상, 소품 등 무대미술자료 등이 생산된다. 더불어 학술서적, 예술가 개인의 기록(일기, 소장품 등), 단체 활동 기록, 극장 공간(주변 환경, 건축, 시설 등), 예술가의 거점 공간(창작센터, 연습실, 공원, 술집, 거리 등), 축제나 행사(학술대회, 워크숍, 아트마켓, 예술관련 시상식 등), 행정, 제도 등이 모두 공연기록의 범주에 들어간다.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생산의 주체이다. 그러니 공연 기록이 분산적, 파편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럼 이들을 각각 어떻게 누가 기록하고, 보존할 것인가? 전체적인 틀에서 생각하면 엄두조차 내기 어렵다. 이를 망라해서 공공기관이나 그에 준하는 기관이 수집해서 관리한다? 불가능하고 무모한 일이며 자연의 이치에도 벗어난다. 기관은 법령이나 규정에 따라 제도적으로 기록물을 관리하기 때문에 표준화된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관리와 활용의 측면에서 강점을 가지고 있지만, 제작물의 맥락, 내용, 구조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한계를 지닌다. 또한 등록, 분류의 과정에서 예술의 다양성을 충분히 반영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그러나 개인별, 단체별로 기록물을 관리하면 범위는 좁아지지만 깊이가 달라진다. 자체 컬렉션이 많아질수록 공연예술 기록의 유산은 풍부해진다. 예술가 스스로 역사 기록의 주체가 되어 자신에 대한 기록을 자신의 방식으로, 나름의 질서를 세워가며 남기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다. 이를 위해서는 창작처럼 내적 충동이 먼저이지만 여러 가지 물리적인 여건의 개선도 필요하다. 제작 환경, 보존 공간, 활용의 문제도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기관에서는 이러한 개별 컬렉션이 자생할 수 있도록 연계사업을 개발하고, 시스템을 공유해서 활용할 수 있도록 허브 역할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공공의 기록물보다 사적 기록이 역사적, 예술적 의미와 가치를 갖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공연제작과정, 문자화하고 시각화하자

공연 참가자가 생산한 다양한 자료를 취합해서 묶으면 그 자체로 훌륭한 문화자원이 된다. 2011년 5월 국립극단은 『오이디푸스-연습과 과정의 기록』이라는 첫 번째 리허설북을 발간했다. 손진책 예술감독은 취임 후 연구기능을 강화하고, 주요 작품의 제작 과정을 기록하고 보관하기 위해 예술단체에서는 이례적으로 학술출판팀을 구성했다. 공연 개요, 연습과정, 한태숙 연출가의 인터뷰, 번역/드라마투르그 강태경 인터뷰, 연극평론, 평론가 대담, 평가 브리핑, 합평회, 각색 노트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은 역시 연습과정이다. 서울예술단은 '공연자료집'을 연속해서 발간해 오고 있다. 과정자원을 재구성하기 보다는 원자료의 원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을 택했다. 창작원리, 연구논문, 제작과정(제작일지, 워크숍 내용), 연출노트, 안무컨셉, 음악컨셉, 무대평면도, 스케치, 소품목록, 디자인, 조명배치도, 의상디자인, 공연대본, 악보, 평가자료까지 포함하고 있어 창작은 물론 연구자에게도 훌륭한 정보를 제공한다. 공연을 위해 프로젝트 그룹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경우가 많으므로 기획단계부터 이를 계획에 포함시키는 것이 좋겠다. 연간 발간하는 것이 어렵다면 5년, 10년 단위로 발간해 기록해 두어야 하고, 발간 후 관련 자료를 관리하기 어렵다면 관련 기관에 기증하거나 기탁하는 것도 방법이다.

공연의 영상기록은 이제 일반화되었다. 기록을 통해 '보여주기'와 '본다'는 행위가 이어진다. 우선은 영상전문가에게 의뢰하는 것이 가장 좋다. 이 경우에도 연습과정, 리허설 등을 참관시키고, 연출가와 상의하여 공연이 왜곡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즉흥극, 야외공연, 거리극의 경우는 연출가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않으면 새로운 창작물이 나올 수 있으니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공연 전에 극장 로비, 분장실 풍경 등을 찍고, 공연 후에는 연출가, 배우, 스태프를 대상으로 짤막한 인터뷰를 담는 것도 후학을 위해 필요한 부분이다. 국립예술자료원은 매년 우수공연을 영상기록으로 남기는 제작 사업을 하고 있다. 2006년 145편, 2007년 150편, 2008년 126편, 2009년 137년, 2010년 20편, 2011년 70편을 제작해 예술가와 일반인들이 무료로 볼 수 있도록 제공한다. 대형 뮤지컬이나 제작 규모가 큰 공연보다는 소규모로 진행하는 공연, 창작공연 등을 선정 자문을 거쳐 촬영한다.

2010년 발간한 총서 시리즈 1~3. 왼쪽부터 박용구, 전혁림, 장민호 편

2010년 발간한 총서 시리즈 1~3.
왼쪽부터 박용구, 전혁림, 장민호 편

당대의 부족한 기록, 예술가로부터 직접 듣는다

근현대 예술사 100년의 부실한 기록을 보완하기 위해 당시를 기억하고 있는 예술가를 찾아가 직접 이야기를 듣는 것이 필요하다. 구술대상, 참여인력(채록자, 촬영자 등), 예산 규모, 활용(자료집 제작, 홈페이지 구축 등)에 대한 부분까지 고려해야 하므로 공공기관에서 해야 할 프로젝트다. 국립예술자료원은 2003년부터 '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채록사업'을 실시해 오고 있다. 공연제작물이 온전히, 충실히 남아있다면 어쩌면 다른 방식으로 진행했을지도 모른다. 35년간의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남북분단 등 거칠고 험한 굴곡의 역사 속에서 제대로 남아있는 공연기록이 별로 없다. 고희를 훌쩍 넘긴 원로예술가들은 기록을 남기지는 못했지만 당시의 풍경을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즉, 문자기록이 부실한 시대의 예술사료를 확보하고, 생산된 영상 기록물이 향후 예술사 연구 및 교육의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도록 하고자 하는 의도로 착수한 사업이다. 현재까지 예술가 개인의 삶과 예술활동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생애사 구술채록으로 연극 21인, 무용 18인, 음악 16인, 전통연희 3인 등을 포함해 137인의 구술기록을 확보했고, 4건의 주제사로 88인의 구술채록을 진행했다.

크리에이티브 VaQi와 공동기획 전시 개최(대학로 열린공간 통)

크리에이티브 VaQi와 공동기획 전시 개최
(대학로 열린공간 통)

자료의 가치 확산을 위한 소통 창구 마련

자료의 가치를 알리고, 함께 만들어가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 공유하고 소통해야 한다. 예술자료전도 공연예술의 특성이 드러났으면 한다. 공연에 맞춰 로비에서 하는 것도 괜찮지만, 공간이 협소하고 공연 준비로 예술자료전은 뒷전으로 밀린다. 오히려 합평회까지 모든 과정이 끝나고 전 과정을 되새기는 의미에서 자료전을 개최하는 것이 좋다. 막상 하려고 해도 자료전을 위해 예산을 지원하는 경우도 없고, 공간도 마땅치 않다. 그렇다면 국립예술자료원과 공동기획 자료전을 개최하는 것은 어떨까? 열정적 산물들이 쌓이지 않고 무심히 버려지는 현실이 안타까워 조성한 공간이 대학로 예술가의집 1층에 있는 '열린공간 통'이다. 예술가가 생산한 예술자료가 중심이 되는 공간으로 극단 해인의 경우는 공연이 끝남과 동시에 실제 무대를 옮겨야 소극장 분위기를 재현했다. 봄에는 크리에이티브 바퀴(VaQi)와 함께 했다. 바키는 작업실에 있던 책상, 오디오, 필기도구, 자전거 등을 통째로 들고 와 둥지를 틀었다. 그들은 실제로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관람객은 자연스럽게 들어와 책꽂이의 책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메모, 사진들을 감상했다. 지금껏 공연하면서 모아두었던 소품, 의상, 영수증, 영상, 프로그램, 사진 등의 전시와 함께 음악회, 물물교환 장터 등 이색적인 행사도 열었다. 작은 단체가 자신의 작업에 대한 기록을 계속할 수 있도록 이러한 전시를 기획하는 것도 예술자료를 대상하는 기관의 작은 실천이자 배려이다. 열린공간 통 전시를 통해 그동안 모아왔던 자료 일체를 기증한 단체도 여럿 있다.

버리자 그리고 디지털의 역습에 대비하자

과정에 대한 기록은 완벽하지 않다. 가치가 커질 수도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없어질 수도 있다. 모든 기록을 보존할 수 없으므로 정기적인 평가 과정을 통해 폐기해야 한다. 무엇을 남길 것인가에 대한 고민만큼 무엇을 남기지 말아야 할 것인가도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최대한' '많이' '무조건'이라는 단어에서 자유로워져야 하고, 어떤 사건을 계기로 한꺼번에 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공연은 사람들과 함께 만드는 공동작업이므로 그 기록이 온전히 나의 것이라고 확신하지 말자. 버리고 싶다면, 둘 곳이 없어 고민이라면 예술자료를 취급하는 기관에 일단 문을 두드릴 것은 권한다.

그리고 디지털의 역습에 대비해야 한다. 공든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원본과 복본을 두어야 한다. 디지털은 편리하지만 맹신하다가는 역습을 당할 수 있다. 예술의 디지털화.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기록의 시선은 한 발 앞서거나 혹은 잠시 멈추었다 뒤를 다시 밟고 가면 좋겠다. 예술현장과 동떨어져 시대의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해서 달려가면 괴리감은 더 커질 수 있다. 공연예술기록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먼저 공연을 이해하고 사랑해야 할 것이며, 그렇게 남겨진 기록은 공연의 감동을 재현해 줄 것이다.


 
김현옥 필자소개
김현옥은 국립예술자료원의 학예사로 다양한 공연예술자원을 수집하는 일, 예술가의 삶과 예술 활동을 기록하는 '예술사 구술채록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중앙대학교에서 연극을 공부하며 꿈꾸었던 연출가의 길은 포기하고, 예술과 오래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길을 택했다. 언젠가 나고 자란 미산(美山)으로 돌아가 도란도란 살려고 한다.
 

weekly 예술경영 NO.154_2011.12.01 정보라이선스 정보공유라이선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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