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투] 문화바우처 기획사업 ‘어처구니 숲학교 프로젝트’

“이제는 혼자가 아닙니다”

홍순각 _ 어처구니 숲학교 운영자

문제는 오랜 투병생활로 인해 배움의 기회를 놓친 아이들이 완치 후 학교 복귀와 사회적응이 큰 숙제가 되고 있다. 어처구니 숲학교는 백혈병어린이와 가족들에게 치유와 휴양의 공간이자 숲체험을 통한 정서적 안정과 발달을 도와주기 위한 프로그램들을 준비하고 있다.
 

나를 포함해 우리 가족의 지난 20년은 '백혈병'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1991년 봄, 우리 가족은 도시생활을 접고 경기도 연천 재인폭포마을로 이사했다. 당시 네 살이었던 아들이 백혈병 진단을 받은 지 2년이 되던 해였다. 그리고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의료진들과 함께 백혈병어린이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대로 죽음 앞에 무기력하게 있을 수가 없어 함께 힘을 모으기로 한 것이다.

어처구니 숲학교 정경 어처구니 숲학교에서 내려다 본 교동마을

▲▲어처구니 숲학교 정경
▲어처구니 숲학교에서 내려다 본 교동마을

금메달 못지않은 완치메달

아들의 백혈병은 우리 가족의 모든 삶을 바꿔놓았다. 모든 것의 맨 앞에는 아들의 병이 우선 하였다. 그만큼 백혈병어린이들과 가족들이 진단을 받고 겪는 상황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어려움과 고통의 연속이다. 항암치료를 받는 아이들은 머리카락이 쉽게 끊어져 매일 면도를 해주듯 머리를 자르는데 그러다보니 '빡빡이'가 된다. 그래서 가발이 필수품이 된다. 그러나 시중에는 이 아이들을 위한 가발이 없다.

최소 3년에서 5년을 요하는 긴 치료기간은 한참 성장하고 배워야 하는 아이들의 중요한 시간을 병마와의 싸움으로 소진하게 한다. 유치원도 학교도 제대로 다닐 수 없다. 수업일수 부족으로 유급은 불가피하다.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병원학교'라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야 했다. 기회가 되는대로 남도기행이나 문화나들이를 기획했다. 건강한 아이들이 흔하게 가는 체험학습의 기회를 백혈병어린이들에게도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그러나 아픈 아이들이기에 외부 감염의 염려와 주위의 시선들이 불편하고 때로는 속상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이겨야 했다. 병마를 이겨야 했고, 세상의 편견과 제도와 싸워야 했다. 2002년 온 나라가 월드컵으로 들떠 있을 때 아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대한민국 만세 백혈병어린이 만세'라고 T셔츠에 새기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도보국토순례를 하였다. 아들이 수능시험을 마친 2006년 11월에는 해남 땅끝마을에서 연천 희망나눔동산까지 자전거 국토순례를 하였다. 백혈병은 불치의 병이 아니라 이렇게 나을 수 있고 이렇게 건강하노라고 세상에 외치고 싶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의기소침해 있지 말라고 해마다 가족캠프를 개최하였고 연말에는 그 해 치료를 끝낸 자랑스러운 완치어린이들에게 올림픽 금메달에 못지않은 완치메달을 걸어주며 축해해 주었다. 5월이면 파란 하늘에 '나을 수 있어요! 날 수 있어요!' 하면서 꿈과 소원을 담아 완치기원 연날리기도 한다. 가족캠프를 마치고 어느 어머님이 하신 말씀이다. '이제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싸우고 이기며 왔다.

나규환 작가의 난로 <양순이> 나규환 작가의 난로 <양순이>

나규환 작가의 난로 <양순이>

'어처구니'가 없으면 잔치도 없다

이사 후 시골생활에 적응해가면서 3년 반의 항암치료를 잘 견뎌낸 아이는 차츰 건강을 회복하고 있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훌쩍 커버린 아이를 보고 놀라기도 했다. 그런데 그 대견스런 모습을 마당에 심은 나무에서도 발견했다. 매일 보는 것 같은데 회초리 같았던 묘목이 어느새 굵은 티를 내며 자라고 있었다. 아들과 나무들이 보여주는 놀라움은 생명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하였다. 생명에 대한 관심은 슈바이처 박사의 자서전 『숲과 원시림 사이에서』를 다시 읽게 하였고 '생의 외경심'이라는 벅찬 화두를 안게 하였다. [녹색평론]의 창간 독자가 되었고 자연농법에 관한 책들을 한 권 두 권 찾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숲해설가 과정을 거치며 숲학교를 열게 되었다.

이제는 덜하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비장하게 죽을 때, 그 병명의 대부분은 백혈병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백혈병을 불치의 병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백혈병, 특히 어린이백혈병의 경우 완치율이 높아 이제는 80%를 목표로 하고 있고 불치병이 아닌 난치병으로 불리고 있다. 문제는 오랜 투병생활로 인해 배움의 기회를 놓친 아이들이 완치 후 학교 복귀와 사회적응이 큰 숙제가 되고 있다. 어처구니 숲학교는 백혈병어린이와 가족들에게 치유와 휴양의 공간이자 숲체험을 통한 정서적 안정과 발달을 도와주기 위한 프로그램들을 준비하고 있다. 이 분야를 전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자식의 병을 치료하다 보니 병과 싸우며 깨달으며 자연스럽게 선택하고 결단한 길이 된 것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잔칫날 같이 살고 싶고 또 그렇게 살려고 기를 쓰고 있다. 그러나 잔치의 화려함과 풍족함, 흥을 위해서는 많은 과정과 준비가 필요하다. 잔치음식을 준비하려면 맷돌에 콩을 비롯한 기본 재료들을 갈아야 하고 그 맷돌을 돌리기 위하여 손잡이인 어처구니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굴러다니는 보잘 것 없는 나무토막이지만 어처구니가 없으면 잔치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화려한 무대만 중요하지 그 무대를 만드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을 잊기 시작하였고 무시하였다. 나무와 풀과 돌멩이들을 우리와 상관없는 하찮은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이 '나락 한 알 속의 우주'를 말씀하셨듯이 모든 존재들은 우주를 품고 있다. 그래서 학교 이름을 '어처구니 숲학교'라고 지었다. 모두가 소중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들임을 자각하자는 뜻이다.

예술가들이 선사해준 선물

어처구니 숲학교를 열고나니 해야 할 일들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 더디게 가자 마음은 먹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재정적인 문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의기소침하던 때 '활活생生문文화化공共명鳴' 프로그램을 갖고 경기문화재단의 문화바우처 사업의 일환으로 박이창식 대표와 예술가들이 찾아왔다. '이 골짜기에서 닭백숙집이나 할 것을 괜히 능력도 없는 놈이 일은 벌려놓고 가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는 자괴감에 빠져 있던 때였다.

어처구니 숲학교를 찾은 예술가들과의 만남은 15년 전에 인연이 있었던 하정수 선생과의 해후로 시작되었다. 생계를 떠안은 집사람이 운영하던 작은 카페에서는 인근의 젊고 가난한(?) 작가들이 가끔 식구처럼 들러 숟가락 하나 더 놓고 함께 식사를 하곤 하였다. 그 일원이었던 하정수 선생과 박이창식 대표는 한탄강댐 건설로 없어지는 마을과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담기위해 예술가들과 찾아왔다가(문화살롱 공의 박이창식 대표는 경기북부 수몰지역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사라지는 옛것에 대한 백서를 만들고 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한탄강댐 건설이라는 회오리에 나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무엇이 소중한지 모르고 얄팍한 보상에 삶의 뿌리와 흔적을 아무 생각 없이 내다버린 후였다. 예술가들은 그들의 밝고 맑은 마음의 눈으로 우리가 무심히 버린 소중한 흔적들을 하나하나 주어 우리의 손에 쥐어 주었다.

하정수 설치작가는 숲속 생태화장실을 만들었고, 정기현 조각가는 햇살 그득한 자리에 닭장을 짓고 손수 부화한 닭을 선물했다. 이종균 설치작가는 숲속 오솔길과 통나무다리를 만들어 호젓이 나를 만날 수 있는 길을 안내해 주었다. 나규환 조각가는 세상에서 가장 따듯한 가슴을 가진 양 나무난로를 온 정성을 다해 만들었다. 그리고 2011년 11월 6일, 그동안의 결과물을 선보이며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 황보림 선생의 숲명상으로 호흡을 가다듬고 숲속 오솔길을 걸었다. 숲속 빈터에서 강지수 선생을 따라 마임으로 말을 뛰어넘는 솔직한 몸짓언어를 통하여 자신과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웠다. 우주와 하나가 된 듯 벅찬 가슴을 안고 숲길을 내려오다 그만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숲속에서 갑자기 퍼지는 아코디언과 트럼펫 연주(소니아 허진의 연주)를 들었을 때 문득 병상에 누워있던 아들의 모습과 지금 이 순간에도 끝나지 않을 터널 같은 어둠의 두려움에 소리 없이 울고 있을 많은 가족들이 떠올랐다. 아, 그들이 이 자리에서 이 벅찬 기쁨을 함께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양에서 기타를 들고 달려 온 오랜 동생 연택이의 연주로 흥겨운 이 자리는 끝날 줄 몰랐다.

이종균 작가의 숲속에 놓인 다리

이종균 작가의 숲속에 놓인 다리


하정수 작가의 친환경 화장실 정기현 작가 생태 닭장
하정수 작가의 친환경 화장실 정기현 작가의 생태 닭장

대학교 1학년 때 박목월 선생의 강의를 도강한 적이 있다. 그는 '시인은 시를 통하여 비밀의 화원의 커튼을 살짝 열어 보이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흐른 뒤, 예술가들이 열정과 헌신으로 어처구니 숲을 바꾸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그들이 이 숲에서 보여준 내밀한 아름다움과 깊은 감동의 즐거움은 축복 그 이상이다.

어처구니 숲학교 프로젝트에 참가한 예술가들

어처구니 숲학교 프로젝트에 참가한 예술가들

말 이상의 의미

어처구니 숲학교에서 진행된 경기문화바우처 기획사업 '활생문화공명'(나는 이것을 '더불어 함께 생명을 나누는 일'이라고 해석한다)은 참으로 많은 영감을 주었고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자신감과 활력을 불어 넣어준 것은 무엇이었나. 재정적인 준비도 없이 단지 백혈병을 경험한 무모한 가장의 몸부림을 객기로만 보지 않고 우리사회의 가치 있는 일이라 인정하고 함께 나서준, 역시 가난한 예술가들의 만남은 이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만남에는 자본의 논리를 뛰어넘는 그 이상이 있다. 어처구니 숲학교가 참고한 해외의 사례로 영화배우 폴 뉴먼이 미국 코네티컷주에 만든 '홀인더월캠프'(Hole in the wall Camps)가 있다. 단순히 돈을 많이 번 사람이기 때문에 캠프장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 것인가'라는 분명한 답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하정수 작가가 가평 자라섬국제바깥미술전에서 전시하였던 작품을 가져와 어처구니 숲에 손수 설치하였다. 어처구니 숲학교에서 숲에 대하여 설명하느라 말이 많아질 때가 종종 있는데 작품은 말없이도 말 이상의 의미를 전달한다. 또한 숲과 자연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비추어주고 해석해 준다. 긴 여운의 감동은 귀가 아닌 마음으로 전달된다. 백혈병과 같은 질병으로 인하여, 또는 경제적 이유에서든 사회적, 문화적 이유에서든 고통 받고 힘들어하는 이웃들이 많이 있다. 그들을 위하여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이 있다면 반드시 해야 한다.

※위의 사례는 2011년에 추진된 경기문화재단 문화바우처 기획사업입니다.

 

 

 
홍순각 필자소개
홍순각은 58년 개띠로 한양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럭키화재(현 LIG손해보험)를 다니던 회사원이었다. 아들 승표의 백혈병 발병을 계기로 회사를 그만두고 백혈병어린이 사업에 투신하여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의 창립멤버이며 사무국장을 역임하다 현재 경기도 포천시 관인면 지장산 자락에서 어처구니 숲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hsg198@naver.com
 

 

weekly 예술경영 NO.163_2012.02.16 정보라이선스 정보공유라이선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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