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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야마 내각의 문화정책은 어디로 갈까
[특집] 이슈로 보는 세계 예술경영③ 일본
예술이 정치의 영향권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지난 8월31일 자민당에서 민주당으로 54년 만에 정권교체를 이룬 일본 역시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예상된다.
민주당은 관료정치 청산과 신자유주의 구조개혁의 부작용 해소, 지역자치 활성화, 부의 합리적인 분배, 대미 대등 외교 및 아시아 중시 정책 등을 천명하며 자민당의 오랜 1당 정치를 불식시켰다. 그리고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내각은 안팎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예상보다 빠르고 과격하게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물론 개혁의 성공 여부는 좀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문화예술 분야의 경우 지난 총선거를 앞두고 민주당이 발표한 ‘매니페스트(정권공약)’에 관련 내용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아직은 구체적인 방향을 꼬집어서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현재 일본 문화예술계의 쟁점을 살펴본다면 전반적인 흐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국립미디어예술종합센터 건설 중지
최근 일본 문화예술계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이 벌어진 것은 민주당의 국립미디어예술종합센터 건설 중지다. 민주당은 9월말 내년도 예선편성과 관련해 아소 다로(麻生太郞) 정권 당시 제출된 예산안을 백지부터 재검토하는 한편 올 회계연도 추경예산 가운데 시급하지 않은 사업을 취소했다. 공약으로 내세운 어린이 수당이나 고교 수업료 실질 무료화 등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이에 따라 약 4조 3000억 엔의 추경예산 가운데 국립미디어예술종합센터 건설 비용 117억 엔이 삭제되었다.
국립미디어종합예술센터는 문화청이 애니메이션, 만화, 게임에 대한 자료 정보를 수집·보존하는 것은 물론 이곳을 방문해 직접 감상하거나 체험할 수 있도록 추진해 온 것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의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을 ‘미디어 예술’로 평가하고, 좀 더 체계적으로 알리기 위한 거점으로서 만들겠다는 뜻이다.
일본은 21세기 외교 전략으로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으로 대표되는 일본 대중문화를 국가 브랜드로서 전 세계에 알리고 이를 경제적 이익으로 연결시킨다는 ‘쿨재팬(Cool Japan)’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왔는데, 막상 일본 내에서는 변변한 지원 전략이 없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이 때문에 2007년 정부의 ‘문화예술의 진흥에 관한 기본적인 방침’에서 미디어 예술에 대한 국제적인 거점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올봄 일본 애니메이션 <작은 벽돌로 쌓은 집>이 아카데미상을 수상하면서 추진에 급물살을 타더니 지난 4월 드디어 정부에서 국립미디어종합예술센터 건설이 의결됐다. 계획대로라면 국립미디어종합예술센터는 도쿄의 인기 지역인 오다이바에 연면적 1만 평방미터의 45층 건물로 내년에 첫 삽을 떠서 2011년 완공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자민당의 ‘하코모노(경제부양을 위해 공공사업으로 댐·도로·다리·청사·학교·회관 등을 건설하는 것)’ 정책을 강력하게 비판해 온 민주당은 정권을 잡자마자 기대효과가 미지수인 토목공사를 앞다퉈 중지시켰다. 국립미디어종합예술센터에 대해서도 총선 전부터 ‘거대한 국영 만화 카페’라고 비판해온 민주당은 예상대로 건설 계획을 백지화했다. “전시성 콘크리트 공사보다는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등을 지탱해온 사람을 육성하는 데 힘을 쏟겠다”는 것이 가와바타 다츠오(川端達夫) 문부성 장관의 설명이다.
이와 관련해 현재 일본 문화예술계는 민주당이 정권공약에 문화예술 관련 내용을 거의 넣지 않은데다 국립미디어예술종합센터 건설까지 중지시키자 우려를 금치 못하고 있다. 특히 일본 신국립극장 등 국립 예술기관은 민주당 집권 이후 국고 지원금이 줄어드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고 있다. 10월31일 시즈오카예술대학에서 일본문화정책학회 및 콘텐츠학회 주최로 열리는 심포지움 ‘국립미디어예술센터를 생각한다’는 일본 문화예술계가 민주당 정권의 향후 방향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첫 번째 공식 모임이 될 것 같다. 이 심포지움의 발제자로 참가하는 고바야시 마리(小林眞理) 도쿄대학대학원 문화자원학과 교수는 “민주당의 문화예술 정책에 대해 지금 당장 판단하기 어렵긴 하지만 현재로선 민주당이 역대 정권 가운데 문화예술에 가장 관심이 없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민주당의 문화예술 정책의 큰 틀 역시 지금까지의 자민당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민주당이 진보정당이라기보다는 중도정당에 가까운데다 일본은 한국처럼 진보-보수의 이념 갈등에 따른 문화예술 진영의 대립이 없기 때문이다.
국립미디어종합예술센터만 하더라도 지난 4월 문화청이 건설을 발표했을 때 일부 문화예술계 관계자는 물론 자민당 내에서조차 불필요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런 시설을 짓는 것이 일본의 미디어 예술 발전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은 물론 국립미술관에 위탁한다는 운영계획 자체가 너무 방만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국립미디어종합예술센터는 일찌감치 ‘만화 카페’ 혹은 ‘아니메(애니메이션) 전당’이라는 비아냥을 들어왔다. 실제로 각 부처의 세금 낭비를 점검하는 자민당의 ‘낭비 박멸 프로젝트팀’조차 문부성 산하기관과 관련 전문가들을 상대로 리서치를 한 뒤 ‘필요 없다’는 판단을 내렸었다.
따라서 일본의 향후 문화예술정책은 조금은 더 지켜봐야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민주당이 기초자치단체에 권한과 재원을 대폭 이양하고 용도가 한정되는 조건부 보조금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일괄 교부금’으로 전환하는 등 지방분권을 한층 강화하겠다는 입장이기 때문에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지자체의 역할이 좀 더 커질 것으로 기대된다.
도쿄도 문화발신 프로젝트
한편 문화예술과 관련 지자체의 활동 중 도쿄도(東京都·都는 우리나라의 특별시와 유사)의 활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쿄도는 2007년 정부의 ‘문화예술의 진흥에 관한 기본적인 방침’에 발맞춰 ‘도쿄 문화발신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다.
도쿄 문화발신 프로젝트는 도쿄만의 문화예술 창조·발신, 문화예술을 통한 청소년 육성을 목적으로 도쿄도와 도쿄도역사문화재단이 문화예술단체 및 시민단체 등과 협력해서 실시하고 있는 것으로 극장이나 미술관에서 열리는 공연과 전시 등의 다양한 문화예술 이벤트나 축제, 시민과 아티스트의 합동 프로그램 등을 지원하고 있다. 특히 청소년들이 다양한 문화예술 체험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는데, 학교나 극장에 여러 분야의 아티스트를 파견해 청소년들과 함께 연극 등을 만들거나 음악 워크숍을 열도록 지원하고 있다.
도쿄도는 2001∼2006년 장기 집권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내각 당시 중앙정부가 지자체에 주는 지방교부세를 줄이는 대신 세원을 중앙에서 지자체로 이양한 정책의 가장 큰 수혜자 이다. 지난해와 올해 잇따라 가난한 지자체에 연간 3000억 원을 내놓을 만큼 부유한 도쿄도는 현재 일본에서 문화예술 관련 사업에 정부보다 더 많은 돈을 쓰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올여름 일본 문화예술계에 화제가 됐던 노다 히데키(野田秀樹)의 도쿄예술극장 초대 예술감독 부임이나 오다이바 시오가제 공원에 세워진 건담 프로젝트, 또 페스티벌 도쿄(도쿄 공연예술 페스티벌)를 올해부터 봄과 가을에 두 차례나 여는 것도 도쿄 문화발신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지자체 가운데 도쿄 다음으로 큰 오사카가 재정 적자를 줄이기 위해 지난해 공공극장 등 문화예술 분야 예산을 대폭 삭감한 것과 크게 비교된다.
연극 <빨간 도깨비> <농업소녀> 등을 통해 한국에도 잘 알려진 노다 히데키는 현대 일본연극의 대표주자로 그의 도쿄예술극장 예술감독 취임은 연극계 관계자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1976년 도쿄대학 법과 재학 시절 극단 꿈의 유면사를 창단한 후 발표하는 작품마다 히트를 친 그는 1992년 갑자기 극단을 해산하고 1년 간 영국 유학을 떠났다. 당시 그가 밝힌 해산 이유는 “극단 활동이 고정되고, 극단을 유지하기 위한 극단이 되어 버린 것, 세련되고 매력 있는 연극을 떨친 ‘꿈의 유면사’라는 이름이 한 역할은 끝났다”는 것. 여기서도 알 수 있듯 체질적으로 ‘공공’과 거리가 먼 그가 도립극장(한국의 시립극장)으로서 그동안 특별한 역할을 못했던 도쿄예술극장에 어떤 바람을 불어올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인기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 탄생 30주년 기념사업으로 제작된 건담은 실물 크기(높이 18m, 무게 35t)로 매우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특히 밤이면 화려한 조명 속에 고개까지 움직여 탄성을 자아냈는데, 약 2달 동안 건담을 보기 위해 오다이바를 찾은 관객이 약 400만여 명으로 관광객 유치에도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도쿄 문화발신 프로젝트는 도쿄가 2016년 하계 올림픽 유치를 위한 기반 작업의 하나로 추진해 온 측면이 강하다. 건담만 하더라도 도쿄가 2016년 올림픽 마스코트로 정한 뒤 홍보용으로 적극 이용해 왔다. 따라서 최근 도쿄가 2016년 하계 올림픽 유치에 실패함에 따라 도쿄 문화발신 프로젝트가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계속 유지될 지는 미지수다.
일부에선 도쿄가 2020년 재도전할 것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지만 도쿄 시민들의 반응이 미지근한데다 그동안 무리하게 올림픽 유치를 추진해온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지사가 2011년 선거에서 또다시 당선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어렵다는 지적이 많다. 그동안 각종 망언과 실정에도 불구하고 높은 인기를 누리며 도지사 3연임에 성공하였지만 다음 선거에선 이미 77살이 될 뿐만 아니라 이번 올림픽 유치에 실패하면 사퇴하겠다고 밝힌 바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2차 대전 당시 일본의 원자폭탄 투하 지역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가 발 빠르게 2020년 올림픽을 공동 유치키로 하고 조만간 올림픽유치검토위원회를 설치하기로 발표하면서 도쿄도의 올림픽 유치는 사실상 끝났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따라서 도쿄 문화발신 프로젝트의 미래는 다음 도쿄 도지사 선거의 결과를 지켜봐야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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