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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지대 위 매개자로서의 공연예술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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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이른 나이에 공연예술을 접했더라면 어땠을까.
고백하자면 30대 중반을 갓 넘긴 지난해 봄,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처음 ‘연극’을 봤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턴으로, 극장운영부에 근무하게 되면서 우연히 공연예술의 세계에 도착하게 된 것이다. 전혀 모르던 이곳과 충돌하듯 만났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동안 다양한 직업과 지역, 공동체를 이동하며 삶의 반경을 꽤 확장해 왔다고 믿었지만, 공연예술은 내게 완전히 낯선 세계였다. 지금까지의 이탈은 어쩌면 이를 위한 여정이었을까. 공연예술은 닫혀있던 나의 감각들을 무엇보다 빠르게 열어주었다. 여전히 나는 이곳의 설익은 일원으로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런데도 지금 나의 현 좌표에서 들려줄 수 있는, 아직은 다듬어지지 않은 날것의 이 이야기들이 어딘가 쓸모 있는 과정의 기록으로써 쓰이기를 바란다. 또 나와 같은 이들이 더 많이 이곳에 도착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시작해 보려 한다.
뒤늦게 바라보게 된 ‘극장’이라는 공간은, 그 영역이 무한해 보였다. 예술의 완전한 바깥세상에 살며 상상하던 연극이란 막연히 무대 위에서만 상연되는 것들이었다. 희곡을 배우의 말과 몸을 통해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드라마적 감흥을 예상했다. 막상 눈앞에 펼쳐진 연극은 예술가와 기획자의 경계도, 창작자와 관객의 관계도 무 자르듯 반듯하게 나뉘지 않고 다양한 경계 속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복잡한 경계 넘나들기는 앞으로 더 확장될 것만 같았다. 낯선 이 세계의 언어가 궁금해졌다.
강량원 극장장님의 강의를 찾아 들었다. 동시대 한국 연극의 흐름과 새로운 시도를 처음 직간접적으로 목격한 순간이었다. 이토록 치열한 고민을, 연극인들이 끊임없이 펼쳐낸 세상을 겨우 만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동안은 관객으로 스며들어 연극을 음미했다. 그러다 같은 시기 ‘2022 봄 작가, 겨울 무대’라는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제작공연 사업의 부담당자로 투입되었다. 연극 협력 프로듀서라는 이름을 달고 본격적으로 공연예술 창작자들과 가까이 만나면서 또 한동안은 창작자들을 협력하고 지원하는 역할에 온 진심을 다해 임했다. 이 세계에 들어와 경이로운 순간들을 자주 맞이하면서 나는 가까운 지인들에게도 이 감각을 공유하고 싶어졌다. ‘이런 기이한 세계가 있어! 그러니까…… 있는데!’ 그러나 쉽지 않았다. 아니, 거의 실패했다. 다른 장르에 더 익숙한, 아직 이 세계를 전혀 모르는 이들을 극장에 데려오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 일인 줄은 몰랐다. 나 역시 경험과 지식이 부족한 관찰자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그래서 할 줄 아는, 할 수 있는 일이 적다는 한계를 느꼈다. 그리고 이런 질문들과 마주하기 시작했다.
“기획자로서 정체성은 무엇인가?”
“나와 같은 이들을 어떤 방식으로 이 세계에 초대할 수 있을까?”
“관객을 만나는 방식은 공연이어야만 하는 것인가?”
예술극장을 무작정 나와 공연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다 올해 6월, 운명처럼 한 프로그램을 만났다.
예술산업아카데미 <공연예술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 양성 과정>은 각자의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면서도 정체성에 대한 각자의 고민을 안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현직 프로듀서를 대상으로 하는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예술산업아카데미의 교육 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이 교육의 주된 목표는 공연예술 프로듀서의 역할과 그 범위를 확장하고 그에 맞는 역량을 쌓는 것에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국제교류를 이끌어가는, 그리고 창작자를 협력하는 역할을 넘어 보다 주체적으로 프로젝트를 만들고 이끌어가는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로 성장할 수 있도록 많은 힌트를 준 프로그램이었다.
이 과정은 약 4개월간 해외 연수와 실무교육, 프로젝트 중심의 학습으로 진행되었고 국내 공연예술 전문가분들과 뛰어난 현장 국제 교류 경험이 있는 현장 전문가들로부터 현실적인 조언과 실용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7월,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 해외 연수를 앞두고 세 차례의 사전 교육을 받았다. ‘공연예술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란 무엇인지, 왜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로 나아가야 하는지’ 그 개념에 대한 생각을 함께 공유하고 <아비뇽 페스티벌>의 역사와 축제의 특징, 현지에서 중점적으로 들여다볼 것들을 미리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8일간의 해외 연수에서는 아비뇽 축제의 ‘in 공연’과 전시를 관람했고 post talk, 네트워킹, 마스터클래스, 워크숍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있었다.
아비뇽 축제 공식 초청작인 ‘in 공연’은 문화유산이나 학교처럼 본래 극장이 아닌 곳이 축제 기간에 극장으로 탈바꿈하는 대표적인 공간에서 주로 일어났고 그 장소의 특성과 어우러져 극대화되거나 새롭게 구현되는 작품의 방식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장장 7시간 동안 숲에서 진행됐던 이머시브 공연도 기억에 남는다. 내용적인 측면뿐 아니라 형식에 있어 많은 상상력을 열어준 아비뇽에 가지 않았더라면 느끼지 못했을 감각들이었다. 그리고 아비뇽이라는 도시 전체에서 일어나는 아비뇽인들의 자부심, 환대, 그리고 관객 스스로가 축제의 주체가 되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은 너무도 특별했다. 한국의 공연예술 관객들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 시간이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공연예술 분과의 ‘장 빌라르관’ 특별 전시는 아비뇽 페스티벌의 아카이브 구실을 하고 있었다. 사실 공연예술을 기록한다는 것에 큰 기대감 없이 방문했는데, 역대 아비뇽 축제의 무대 디자인이나 의상, 연출, 관객 수용에 관한 그동안의 사진과 영상 기록물들을 다채롭게 감각할 수 있는 경험이었다. 또한 이 아카이브는 축제의 기억을 안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과거 지우기가 아니라 과거를 안고 미래로 나아가고자 하는 새로운 축제 예술감독의 포용성을 엿볼 수 있는 전시이기도 했다.
우리는 연수에 동행해 주신 공연전문가들과 매일 축제 사무국에서 만나 전날 관람한 공연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고, 서울국제공연예술제(Seoul Performing Arts Festival, SPAF)와 아비뇽 축제에 관한 리서치 내용을 기반으로 축제와 국제교류, 축제 정체성 만들기에 관해 생각을 나누었다. 축제 현장 스태프들, 가령 잠깐이지만 예술감독과도 인사를 나누고 축제 공동 프로그래머인 Magda Bizarro를 만나 아비뇽 축제 시스템 전반에 대한 이야기, 올해 축제의 기조와 키워드들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아비뇽에서 오랜 기간 민간 극장을 운영해온 Alain Timar 극장장을 만났다. 그는 ‘좋은 기획자 혹은 경영자란 무엇인지’ 지금까지 긴 시간 고민하고 정리해온 생각을 공유해 주었다. 그리고 문화책임자로서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우리가 동참할 수 있을지 그 태도나 역할에 대해 함께 사유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또한 Lie’ge 국립극장이 ‘팬데믹 상황에서 관객과 공연예술이 만나기 위해 시도한 다양한 사례들’을 극장 디렉터에게서 직접 듣는 교류의 시간도 주어졌다.
세계적인 공연예술 축제 현장을 방문하면서 개인적으로는 성숙한 축제 관객들의 태도를 경험했다. 그리고 동시대 축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나 공연예술 프로듀서로서 갖추어야 할 역량에 대해 고민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국제교류나 네트워킹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느꼈고 강한 동기부여가 되었던 감사한 기회였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각 분야 현장 전문가들의 실무교육이 진행되어 국제교류에 관한 현장 사례나 실제 프로세스에 관한 경험을 나누었다. 현재 활발하게 국제교류를 진행하고 있는 프로듀서로부터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권 공연예술 현장 지형을 파악할 수 있는 구체적인 힌트들과 현실적인 조언도 들을 수 있었다. 더불어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국제교류가 시작되던 시점부터 현재까지의 사례들을 통해 그 흐름을 파악해 보고 실제 국제교류를 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알아야 할 실용적인 부분, ‘테크니컬 라이더’에 관한 구체적인 사항이나 검토해야 할 부분과 진행 방식에 대해서도 짚어볼 수 있었다.
강의와 더불어 ‘개별 프로젝트 발표’를 위한 준비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프로듀서로서 가지게 된 각자의 질문의 답을 어렵사리 찾아가는, 각기 마음에 품고 있던 다양한 키워드와 방향성을 풀어내기에 큰 의미가 있는 과정이었으리라 생각한다. 나의 경우, 어쩌면 실현하기에 너무도 터무니없고 허술한 기획안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 과정을 통해 엉성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마음껏 실패해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이제 비로소 무언가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지막 시간, <프로젝트 최종 기획안 발표>에서는 다른 프로듀서들의 신선한 기획들을 현장에서 목격할 수 있어 기뻤다.
기획자라는 정체성에 대해 커다란 질문을 안고 참여한 이 교육으로 더 큰 물음표와 드넓은 선택지가 펼쳐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이를 경험하기 전과 후는 분명 다른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질문할 거리가 확장된 것, 답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공부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전보다 명확해진 귀한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비슷한 분야의 공감대를 가지고 같은 언어를 공유하는 프로듀서로서 그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는 분들과 이 여정을 함께한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프로듀서의 역할과 고단함, 기쁨에 대해 서로 솔직하고 깊은 이야기들을 자주 나누면서 공연예술에 대한 이들의 애정과 노력에 감탄하고 또 스스로 반성하면서 미래를 다짐하게 된 점은 이번 과정의 소중한 성과라고 생각한다.
공연예술 프로듀서란 어떤 존재일까.
지금까지의 짧은 경험으로 떠올린 생각이다.
- 하나의 창작물이 관객과 만나기까지의 과정 전반을 매개하고 이끄는 사람
- 창작자가 작업 그 자체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도록 전방위로 협력하는 자
- 프로듀서 역시 작업의 주요한 주체로서 프로젝트의 소명에 깊게 공감하고 원활히 흐르도록 기획, 기여하는 자
-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을 기반으로 홍보, 행정, 재원 조성 등을 주도적으로 수행하는 자
- 건강한 공연예술 공동체, 생태계를 위해 선순환의 흐름을 함께 만들어가는 자
- 동시대 공연예술의 현재를 날카롭게 감각하려 하고, 나아갈 방향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예술가와 함께 제시해 보는 자
여기서 덧붙여, 해외 연수와 국제교류에 관한 교육 과정을 거치며 확장된 생각은 ‘차세대 공연예술 프로듀서’란, 창작자를 협력하거나 프로덕션 내부의 매끄러운 소통을 위한 업무를 넘어 창작자들과 ‘관객’을 서로 매개할 수 있는 적극적 매개자로서 존재해야 하며, 그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마침내 도착한 이곳 공연예술계에서 나의 세계가 가장 크게 확장됨을 느꼈던 만큼 공연예술을 관객과 어떻게 만나게 할 것인지, 관객에게 무엇을 전달할지 고민하고, 그 이야기들을 잘 정리하고 나누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공연예술의 바깥 사회에 있는 이들의 언어와 이곳의 언어를 잇는 방식들을 적극적으로 발견해 내는 것이 앞으로 나의 숙제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 세계에 들어온 방식으로 또 다른 이들을 초대할 수 있을까?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공연예술 프로듀서로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 여정은 계속되는 과정이며, 스스로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을 못 하는지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적극적으로 새로운 시도를 해나가고 싶다. 단순한 공연 이벤트를 넘어, 사회와 다양한 커뮤니티와의 상호작용을 강조하고 문화 다양성을 존중하는 플랫폼으로서 공연예술의 역할을 확장하는 것에 조금의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공연예술을 만나기 이전 다른 곳들에 머물렀던 여러 경험이 내가 다른 세계들에도 여전히 열려있도록 하고, 공연 역시 한 발짝 뒤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보다 이 세계에 더 깊어지고 익숙해지더라도 창작 이후 관객의 입장에서 공연을 바라볼 수 있는 프로듀서로 계속해서 남고 싶다.
이전의 나와 비슷한, 이곳이 아직 낯선 미래의 관객들을 초대하고 예술을 더욱 폭넓은 사회적 문맥에 녹아들도록 하는 “차세대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로 더 나아갈 수 있을까.
나와 다른 세계의 삶, 사람들, 동경하던 커뮤니티로 직접 들어가 그들처럼 살아보고, 그 세계와 동화되어 마침내 그 세계를 품고 나의 세계를 확장하는 중이다. 기상캐스터, 국제학교 교사, 문화콘텐츠 기획자라는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고, 울산, 부산, 제주, 서울로 공간을 이동하며 다양한 공동체 일원이 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약 2년 전, ‘이탈’의 여정 끝에 공연예술의 세계로 우연히 도착해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로 나아가기 위한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다. 그간의 경력을 토대로 문화예술 프로그램 아나운서, 모더레이터로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