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운전을 하지 않는다. 면허가 없으니 해서도 안 된다. 운전을 하지 않으니 남이 운전하는 차를 얻어 탄다. 내 자리는 자동적으로 조수석이다. 나는 20년 이상의 경력을 가진 조수다. 대한민국 ‘조수 베스트 파이브’ 안에 들어갈 자신이 있다고 자신한다. 그 동안 조수가 가져야 할 철학과 몇 가지 자질에 대해서 나름대로 터득한 바가 있다. 봄이 되어 그런지 오늘은 내 사랑하는 동료, 선후배들과 조수로서의 철학에 대해 얘기를 나눠보고 싶다.


조수가 가져야 할 철학과 자질

조수의 미션을 잘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첫 번째 자질은 다들 짐작하듯이 길 안내다. ‘나비부인(네비게이션)’이 나온 이후로 이 부분은 빛이 바랜 감이 없지 않지만, 훌륭한 조수라면 나비부인은 할 수 없는 고도의 입체적이고 다원적인 길 안내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먼저 목적지까지 가는 여러 가지 루트 중 어느 길을 타고 갈 것인가를 판단해야 한다. 기왕이면 가는 중간에 경치 좋거나 유서 깊은 곳을 들러볼 수 있도록 코스를 짠다. 여행 도중에 식사를 하게 된다면 어디쯤에서 하게 될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그 부근의 맛집에 대한 정보도 알아 놓는다. 요즘이야 나비부인이 다 해주지만, 예전에는 ‘교통’의 주요 잠복 지점도 파악해서 미리미리 대비할 수 있게 일러주는 것도 매우 중요한 조수의 임무였다. 두 번째는 ‘졸지 않는다’ 이다. 운전하는 사람은 옆에서 누가 졸면 더 졸린다고 하지 않는가. 조수가 졸면 절대 안 된다는 건 당연한 얘기다. 나아가 운전수가 졸게 해서도 안 된다. 수시로 운전수의 상태를 확인하여 적절하게 휴식을 취하도록 해야 한다(특히 이 경우 때로는 일정한 ‘강제’도 필요하다). 조수라면 마땅히 여행 떠나기 전날은 잠을 푹 자서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한다.

세 번째는 그야말로 운전수를 돕는 일이다. 통행료 준비, 통행권과 영수증 및 잔돈 보관, 선글라스 준비 등등. 계기판을 확인하여 연료를 채울 것을 일러 준다든가, 에어컨이나 히터 사용에 관한 조언, 창문을 열어 환기하는 일, 실내 전면 창이나 사이드 미러를 닦는 일 등등. 휴지통과 재떨이를 비우는 일도 당연히 조수의 몫이다. 차 밖에서도 해야 할 일이 있다. 주차하거나 뺄 때 전후좌우를 봐주고 조언하는 일, 이거 매우 중요하다. 네 번째 필요한 자질은 ‘입담’이다.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를 충분히 준비하여 필요할 때 풀어 놓을 수 있어야 한다. 이는 두 번째 자질의 연장선이기도 하지만 차중의 다른 승객도 즐거워야 전체 여행이 더 즐거워지지 않겠는가. 이야기 거리로는 단연 ‘이디피에스’가 최고다. 하지만 운전수나 승객 중 미성년자나 이성이 있을 경우를 고려하면 다른 화제도 준비해야 한다. 또한 이미 알려진 것들은 오히려 관중의 분위기를 다운시킬 수도 있으므로 항상 최신의 이야기 거리를 탐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다만 입담이 너무 좋으면, 운전수가 전방 주시를 소홀히 하거나, 핸들을 잡은 채 웃느라고 위험한 사태가 생길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다섯 번째는 적절한 주전부리를 제공하는 일이다. 운전수의 컨디션과 도로 사정에 따라 다양한 메뉴가 필요하다. 물(여름에는 미리 냉각시킨 물을, 겨울에는 보온병에 뜨거운 커피도 준비해야 한다) 검, 오징어, 과자 등. 그리고 사탕은 박하사탕, 흑사탕, 목캔디 등 다양한 종류를 갖추어야 한다. 물론 운전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포장을 벗기고 건네야 한다. 때로는 입에 직접 넣어 주는 적극적인 서비스도 필요하다. 여섯 번째는 ‘디제이’(DJ)의 역할이다. 운전수와 승객의 컨디션, 도로 상태, 날씨, 주변 경관 등에 맞춰서 적절한 음악을 제공하려면 상당한 전문성과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요즘 많이 이야기하는 ‘큐레이션’이 아닐 런지. 점심식사 후 졸음이 몰려 올 때, 길 막힐 때, 혹은 신나게 밟을 때, 창 밖에 탁 트인 경치가 나올 때, 반대로 깊은 산중에 들어갔을 때, 맑은 날, 흐린 날, 비오는 날... 이쯤 이야기하면 고개들을 끄덕일 거다. 내가 한창 조수를 뛸 적에는 각각의 상황에 맞는 음악(예들 들면 가요 메들리에서부터 락과 바하에 이르기까지)을 편집한 테잎을 몇 개씩 준비해 가서 틀고는 했다. 마지막으로 사전 준비와 상황대처 능력이다. 담배, 휴지, 물티슈에서부터 지도, 잔돈, 비상약, 플래시, 우산, 장갑, 휴대폰 충전기, 체인 등이 필요할 때 필요한 것이 즉석에서 조달될 수 있도록 준비할 필요가 있다. 차가 고장 났을 때 필요한 간이 정비 능력까지는 무리라 하더라도, 체인 걸기나 스페어타이어 교체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한다.

돕는(助) 사람(手)

조수는 말 그대로 돕는(助) 사람(手)이다. 내가 생각하는 조수의 비전은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이다. 미션은 ‘운전수와 승객을 돕는’ 것이다. 운전을 예로 들어서 얘기를 했지만 이것은 넓게 보면 어느 분야에 적용을 시키더라도 적용 가능한 지침이다. 조수의 첫 번째 자질인 ‘길 안내’는 길을 숙지하고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자신이 어느 업무에서든 목표지점이 어디인지 그 지점에 가장 효과적으로 가 닿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 고민해야 한다. 두 번째 자질인 ‘졸지 않는다’를 보자. 길 안내자가 운행 중 졸고 있다면 자신의 책무를 다하고 있지 않을 뿐더러 그로 인해 운전자는 방향을 상실하게 된다. 사고가 나기 가장 쉬운 순간이 아닐까. 다음으로 운전수가 운전을 잘하도록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며, ‘입담’도 자랑할 수 있어야 하고, 주전부리와 음악을 제공하는 것은 운전자를 최고의 안정 상태에서 운전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물론 이 ‘돕는 사람’으로서의 지침은 예술경영인들이 귀담아 들어두어야 할 내용이다. 분야마다 특수한 업무에 따른 전문성, 예기치 않은 상황에 대한 대처능력 등은 필요하겠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중요시 했을 때 어느 분야의 일이든 목표지점에 가깝게 다다르는 왕도가 아닐까. 나는 이 ‘돕는(助) 사람(手)’으로서의 내 자리를 사랑한다. 누구나 앞서 리더가 되고, 결정을 하는 위치에 서기를 바라지만 한 단체의 모든 인원들이 리더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하나의 단체, 즉 차가 목적지에 잘 다다르기 위한 것. 돕는 일의 중요성은 결국 거기에 있다.

정희섭 필자소개
정희섭은 서울대학교에서 불어교육과를 전공하고, 중앙대학교에서 예술경영에 대한 석사를 마쳤다. 전남 진도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잠시 근무하다가 1995년부터 1998년까지 문예아카데미 기획실장으로 일했으며, 2000년부터 2002년까지 국립중앙극장에서 공연과장을 역임했다. 2003년부터는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본지의 5기 국내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 페이스북 바로가기
  • 트위터 바로가기
  • URL 복사하기
정보공유라이센스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