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을 보내며
주호 형.
우리 만남 15년 쯤 될까? 참 인연이 깊은데도 형이라고 부른 적이 없었던 것 같네요. 이제 형을 떠나보내면서, 오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형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우리 주호 형, 짧았지만 강렬했던 삶.
이제 이 세상에서 품었던 이런저런 한일랑 훌훌 털어 버리고 천국에서 못 다 이룬 꿈 이루소서!
마냥 평화로운 초여름 휴일 아침, 막 도착한 휴가지에서 형의 갑작스런 비보를 듣고 ‘이게 꿈인가 생신가’ 황망할 따름이었습니다. 우리 센터 신입직원 면접 때 본 것이 바로 이틀 전인데, 그게 형의 마지막 모습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인명은 재천이라 해도 이건 너무한 것 아닌가요?
돌이켜 보면, 형과 참 재밌게 지낸 시절이었죠. 인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피를 나눈 형제보다도 훨씬 가깝게 있었지요. 여태껏 형이라 부르지 못한 것은, 살갑지 못한 제 성격 탓도 있지만, 형은 그 이상의 존재로서 나의 멘토였기 때문입니다.
잘 나가던 신문사를 박차고 나와 LG아트센터로 갈 때도, 다시 공직으로 나설 때도, 그리고 수상한 시절을 만나 사표를 결심했던 그 순간에도, 변함없이 제 곁에 있었습니다.
저는 형이 간 길을 그저 따라가면 그만이었죠. LG극장도 형이 있던 자리였고, 공직에도 바로 형을 이어 입문했었죠. 한동안 야인이었던 시절, 그 보기가 안타까워 신문사를 그만 두겠다고 했을 때, 막지 못한 게 후회된다고 하셨었죠. 서울시향으로 가실 때, 제 몫을 빼앗은 것도 아닌데 “선배로서 미안하다”라며 많이 가슴 아파했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정말 속내를 터놓고 의지하는 사이가 됐죠. 첫 기관장을 별로 기분 좋지 않게 정리해야 할 때, 우리는 다음의 길에 대해 깊은 고민을 했었습니다. 형은 그 때 ‘파이오니어적인 삶’을 이야기 했죠. 편하게 주어진 길보다는 뭔가 의미를 찾길 희망하는 점에는 우리는 명분론자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형의 짧은 생은, 문화예술계에서 파이오니어적인 삶이었습니다. 제 개인과의 인연을 떠나, 이제 형을 한국 문화예술의 역사 속에 의미 있게 아로새겨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낍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기 전에, 형의 삶에 관한 중요한 팩트 몇 가지를 정리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형은 한국 예술경영의 1세대로서, 명실상부한 이 영역의 주역이었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의전당 ‘공채1기’라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형은 그런 체험적인 일의 한계를 절감하며, 이론을 겸비하려고 힘썼고, 급기야 1980년대 말 예술경영학이라는 선진 학문을 체득하고자 영국 씨티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지요.
이건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선견지명이었습니다. 나중 그런 공부를 엮어 『예술경영』책으로 냈습니다. 공저자였던 용호성 국장, 형의 비보를 듣고 제게 전화해 얼마나 울던지. 가슴이 짠했습니다. 형의 그런 선구적인 노력으로 ‘예술경영학’이 한국에 제대로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둘째, 형은 ‘체험적 지식과 이론’을 바탕으로, 궁극적으로 한국의 문화예술계에 긍정적으로 기여하는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기술관료)’가 되고 싶어 했죠. 사실 그 길은 무척 성공적이었습니다. 한 번의 정부 기관장, 한 번의 지자체 기관장을 참 깔끔하게 완수했습니다. 언제가 형은 제게 이런 말을 했지요. “기관장은 아무리 잘 해도 B 정도야. 목표치를 그 이상에 두면 오히려 탈이 나기 마련이지.” 가치 조정자로서 공공기관장의 한계를 말한 것이지만, 형은 늘 그 이상이었습니다.
셋째, 이것은 품성과 관계된 것인데, 형은 소위 문화예술계의 주류에서 성장했으면서도 패권적인 가치를 지향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저것을 두루 살펴 사태를 판단하려 했다는 점에서 냉철한 이성주의자였지요. 형 특유의 강점이었습니다. 제가 형의 짧은 생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바로 이점 때문입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를 위해 보다 큰일을 할 기회를 그 죽음이 앗아간 겁니다.
형, 이제 보내겠습니다.
발인하던 날, 서울에 도착했는데 참 기분이 묘합디다. 마음을 가눌 길 없어 형도 아끼던 어느 분에게 전화를 했어요.
“나 정말 너무 슬프다!”
잘 가요, 형!
2013년 5월 30일
정재왈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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