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0년 ‘예술경영, 지역을 사고思考하다’를 주제로 하여 현재 전방위적으로 예술환경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지역’이라는 화두를 예술경영의 관점에서 점검해보았다. 불과 2년 사이지만 ‘지역’은 더 이상 중앙의 정책 ‘대상’이 아닌 ‘지역문화분권’의 프레임으로 균형감 있게 살펴봐야 할 ‘주체’로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지역과 예술경영’을 주제로, 6대 광역시별로 지역별 문화 인프라 및 네트워킹 현황을 살펴보고, 지역 예술경영인들의 다양한 의견과 제안을 들어보는 ‘예술경영, 지역을 사고思考하다Ⅱ’를 마련한다. 이번호는 인천이다.연재순서 광주(‘12년 9월) - 대구(’12년 11월) - 대전(‘13년 1월) - 부산(’13년 3월) - 제주(‘13년 5월) - 울산(’13년 5월) - 인천(‘13년 7월)

“자기를 솔직히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 극히 드물다. 무시당하지 않는 곳, 합의가 되어서 실천할 수 있는 곳.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생각이다. 공감, 소통. 신뢰가 있어야 하고 투명하게 소통해야 공명의 장이 만들어진다.”
일 시 : 2013년 7월 20일 오후 4시 / 장 소 : 인천 시민문화살롱 바람이 머무는 곳

시민, 문화로 꽃이 되다

고백하건대, 이 조직의 전모를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인천시민문화예술센터라는 이름을 들은 지 어언 10여 년 된 것 같고, 각종 회의와 발표 자리에서 임승관 대표를 만난 것도 줄잡아 십여 차례는 넘는다. 문화바람 사례로 발표하는 것도 서너 번 들었고, 이번에는 아예 인터뷰를 했다. 그런데 여전히 이 조직, 알 수가 없다. 1,200여 명의 회원, 주말마다 동아리 활동을 위해 고정적으로 공간을 찾는 이들만 400여 명. 10여 명의 상근자, 하나의 소극장, 두 개의 놀이터(연습 공간). 이 모든 일들을 시민들의 자발성을 기반으로, 거의 대부분 회비를 바탕으로 일궈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뭔가 비밀이, 극적인 반전이 숨어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하늘에서 떨어진 반전은 없었다. ‘기적’은 일어났으되 일어날 만한 기적, 시민이 중심이 된 자발성이라는 이름의 든든한 배경이 만들어낸 ‘준비된 기적’이었다. 인터뷰를 준비하며 한 번 더 놀란 것은 인천시민문화예술센터나 문화바람에 대해 알고 있는 이들이 의외로 적더라는 것이다. 전국적으로 생활문화예술정책이 붐을 일으키고 있는 상황에서 거의 원조 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문화바람이 이토록 홀대받아도 되는 걸까. 의아함을 간직한 채 인천시 남동구 간석동에 자리 잡은 놀이터 2호를 찾아갔다.

안태호 문화바람은 어디서부터 시작됐나?

▲ 문화바람 외부.▲ 문화바람 1층, 카페 ‘시민문화살롱 바람이 머무는 곳’ 내부. 문화바람의 건물을 세우는데 일조했던 시민들의 이름이 벽면에 새겨져있다.

▲ 문화바람 외부.
▲▲ 문화바람 1층, 카페 ‘시민문화살롱 바람이 머무는 곳’ 내부. 문화바람의 건물을 세우는데 일조했던 시민들의 이름이 벽면에 새겨져있다.

임승관 이야기는 시민문화예술센터에서부터 시작된다. 1996년 가까운 문화예술 활동가들이 모였다. 당시에는 시민단체의 부설기관이었다. 2004년, 우리의 활동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재정 상황의 곤란함을 돌파하려면 회원을 늘리고 그들이 구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민중심으로 문화수용자 운동을 시작했다. 원리는 간단했다 월 1만 원씩 회비를 내면 그걸 모아 공연을 가져와서 무료로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러면 그들이 ‘공연예술이 이런 것이구나’라는 감각이 생기고 감수성이 높아지면서 요구가 생길 것 아닌가. 이 운동이 뜻밖에 인기가 높았다. 6개월 만에 500명을 모았다. 첫 공연(백창우와 굴렁쇠 아이들 콘서트)에 1,600명이 왔다. 예술가들도 큰 감화를 받았다.

안태호 당시 인천의 문화지형이나 상황을 절묘하게 파고들었다는 생각이다.

임승관 2005년 인천에는 볼 만한 연극·공연이 안 내려오는 상황이었다. 인천시에서는 클래식공연 위주의, 시민들의 요구와는 좀 동떨어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문화수용자 운동을 하면서 인천 사람들이 공연을 안 보는 게 아니라 공연에 목말라 있다는 걸 알았다. 인천이 문화의 불모지라고만 했지, 실제로 시민들의 욕구에 기반을 둔 활동들이 없었는데, 우리가 그 부분을 적절하게 자극했던 것이다.

안태호 그 활동이 소극장 설립으로, 다시 동아리 공간으로 이어졌다.

임승관 문화수용자 활동을 계속하자 사람들이 모이고, 사람들이 모이자 동아리가 늘었다. 동아리가 늘었지만, 연습만 하고 공연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을 위해 지하 공간을 극장으로 꾸몄다. ‘소풍’이라는 이름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얼마나 돈이 들지 몰랐다. 막상 시작하고 보니 사업이 너무 크더라. 그래서 또 다른 시민구좌를 만들어서 브리핑을 하고 다녔다. 민간소극장, 생활밀착형 문화공간에 대한 필요성을 설파하면서 280명 시민들의 돈과, 기술자들의 능력이 모이게 되었다. 인천 유일의 민간소극장이 생긴 것이다. 우리는 ‘시민이 만든 기적’이라고 했다. 소풍의 좌석이 90석인데, 500석 이상 되는 중대형 극장에서 발표하기 어려웠던 활동들이 꾸준히 무대에 오르고 있다.

안태호 근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임승관 그랬다. 끝이 아니었다. 소풍이 만들어지니까 다시 동아리가 늘어나고, 연습 공간이 없어졌다. 그래서 아예 사무실을 빼고 동아리 전용 연습 공간을 만들었다. 그게 놀이터 1호점(45평)이었다. 그걸 만들어서 자치적으로 운영을 했다. 동아리 사람들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운영한 것이다. 그런데 또 계속 사람이 늘어나 공간이 더 필요해졌다. 다시 저금통을 만들어서 뿌렸다. 때마침 인천문화재단에서 시민활용 공간지원 프로젝트가 떴다. 그래서 여기(놀이터 2호점, 4층 전관)를 바꾸게 되었다. 재작년 9월에 오픈을 하고, 1층은 카페(저녁엔 술집)로 운영하게 되었다. 동아리 뒤풀이에 드는 비용을 안에서 굴리자는 의도도 있었다(웃음). 소풍(소극장), 놀이터(1, 2호) 회원을 ‘문화바람’으로 통칭한다. 생활예술바람은 동아리 활동을 통해 놀이터 공간을 사용하는 회원, 공연바람은 5장의 프리티켓을 받는 회원, 선물바람은 공동구매한 지역예술가들의 소품을 선물로 받는 회원이다.

안태호 안정적인 공간을 위한 분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임승관 우리가 인천문화재단 사업에 선정된 뒤에 이 제도가 없어졌다. 올 9월에 지원금을 반환해야 한다. 재단도 지금 여러 가지로 고민 중인 것으로 안다. 내부적으로 협동조합을 생각하는데 그렇다 해도 돈이 너무 크다(인천문화재단은 2011년, 문화예술단체 공간지원사업을 통해 인천시민문화예술센터에 2년 기한으로 2억 3천만 원의 보증금을 지원했다). 너무 큰 난관이다. 존폐가 걸렸는데.

안태호 걱정이 크겠다. 복안이 있나?

임승관 구에서 공간을 사서 위탁을 주는 것을 제안받은 적이 있다. 그런데 회원들이 거부했다. 인천문화재단에서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로 이 건물을 만들고 공간은 문화바람이 운영하는 방향으로 제안이 오기도 했다. 그런데 회원들이 또 거부했다. 간판이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문화재단으로 들어간다는 거다. 회원들은 자기들이 돈 모으고 공사하고 작업한 게 있어서 자신감도 있고, 공간 이용을 허락받고 보고해야 하는 것도 싫은 거다. 상근자들은 재정 문제 해결을 위해 그렇게 합의를 했으면 좋겠는데, 회원들은 그렇지가 않았다. 놀이터 1, 2호와 소풍의 경상운영비가 월 2,300만 원쯤 된다. 이 비용을 회비와 일부 수익으로 다 떠받치고 있다. 활동가들이 상근비를 일정 부분 포기하고 희생하게 되는 곤란한 구조가 계속 반복되고 있다.

이제 회원들은 이 건물을 사는 걸 원한다. 위탁은 원하지 않는다. 간섭받고 싶지 않은 거다. 건물 가격이 15억 원이다. 현재는 민간투자를 받고 갚는 게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자발성을 훼손하지 않고 지원받을 수 있는 방법은 갚는 거다. 은행에서 대출받아서 집을 사면 자기 집이라고 생각하지 않나. 우리의 안은 20년 정도의 장기상환 저이율(2.3%)로 빌려달라는 거다. 어떤 기업이든 생활예술지원을 하는 문화마케팅으로 문화바람을 써주면 좋겠다. 가급적이면 우리와 성격이 맞는 곳, 예를 들면 신용협동조합과 이야기하려고 한다. 우리의 추산대로라면 20년 후 10만 명 문화바람 회원들과 함께 그날을 축제처럼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생활문화예술정책이 안착되기 위한 조건

안태호 이야기를 좀 바꿔보자. 문화바람이 모델로 삼았던 단체나 활동이 있나?

임승관 독일의 마더센터는 지역 여성들의 육아, 일자리 창출, 학습 등을 공동체적 방법으로 해결하는 곳이다. 프로그램 운영이 돈으로 매개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간의 배려와 자율, 자원봉사로 이루어진다. 마더센터의 운영 태도, 철학 등이 매우 맘에 들었다.

일본의 우타고에라든가 고도모게키조라는 어린이극장 단체 등에서는 시민문화 활동의 요체를 배웠다. 고도모게키조는 100만 명 정도의 회원이 60년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아이들을 위한 교육활동과 그에 필요한 공부와 연구를 한다. 특이한 점은 극단과 함께 연극을 공동으로 제작하여 회원이 아닌 어린이들과도 함께 관람한다는 것이다. 공동육아 개념의 아이를 위한 노력은 이후 아빠들의 모임 결성으로 이어졌다. 극단 또한 신작이 나오면 ‘어린이극장’ 회원에게 먼저 보여주고 평가를 바탕으로 완성한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4학년생 이상을 대상으로 한 연극캠프도 진행한다. 공동육아와 공동으로 공연을 유치하면서 문화를 매개로 교육관과 삶을 나누는 것이다.


안태호 생활예술 활동은 최근 각광받고 있는 정책이다.

임승관 생활예술 지원사업의 핵심은 말하자면 ‘사회적 안전망’이라고 생각한다. 집이나 가정에서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과정이 다 없어졌다.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곳이 없어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이곳에서 위안을 받는다. 생활예술은 어떤 위로와 공감을 매개한다. 수평적인 구조에서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구성원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공간이 유지되고, 여기서 얻은 행복을 바탕으로 자신감이 생기니 밖에 나가 사회공헌을 하게 된다. 실력이 아니라 행복을 바탕으로 즐거움을 드러내는 것이 사회공헌의 핵심이다. 그래서 생활예술을 지원하는 기준이 수월성은 아니다. 열심히 훈련해서 프로가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전문예술과는 수평적으로 다른 범주다. 이런 담론이 꾸준히 생성되어야 한다. 행정에서는 개인의 취미생활을 지원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동시에 생활예술을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율배반이다. 취미로서의 생활체육은 끝없이 지원하지 않았나. 그 결과가 한국의 엘리트 체육에도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을 거라 본다. 생활예술도 마찬가지다. 전문예술 측면에서 지원하려고 하면 결이 안 맞는다. 오히려 자발성, 자존감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어렵게 만들어진 커뮤니티를 죽일 수도 있다.

안태호 생활예술 활동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성남문화재단의 사랑방클럽과 비교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부분이 비슷하고 어떤 지점에서 차이가 있나

임승관 2005년 문화수용자운동을 하면서 성남문화재단 사업이 같은 시기에 시작됐다. 성남 사랑방 클럽과는 각종 교류를 진행하며 8년을 같이 왔다. 성남은 200여 개 커뮤니티를 묶고 있고, 행정의 지원이 있어 지속은 가능하지만 자생성과 자발성이 난관이다. 이곳은 1,200명의 회원이 있고, 자발성은 있으나 재정 때문에 지속 가능하지 않다. 지금 생활커뮤니티 붐이 일고 있는데, 쟁점은 성남의 행정과 문화바람의 자생성을 합치는 것이다. 그것이 화두가 될 것이다.

안태호 생활예술이 내부경제 활성화까지 미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임승관 회원이 많아지고 일정 규모의 커뮤니티가 형성되면 내부경제가 활성화될 조건이 생긴다. 회원 중에 자장면집을 하는 분이 있는데, 그곳에서만 자장면 먹자고 그러는 거다. 자장면 집은 회원의 야채가게에서 야채를 구입하는 거고. 놀이터 옆에 작은 마트가 하나 있는데,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가져다놓자는 거다. 대형마트를 가는 이유는, 우리 애가 먹는 분유, 우리 애가 쓰는 기저귀가 동네 상점에 없어서다. 그걸 미리 확인해두고 동네 사람들이 원하는 물건을 가져다놓는 식이다. 대신 매출이 오르면 미리 합의한 10%는 공공기금으로 모아서 공동의 목적에 사용하자는 거다. 협동조합이 이런 것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았나. 그런데 협동조합 이야기를 먼저 하면 무거워지고 어려워지는 것 같다. 일단 가능한 실험을 하고 준비가 된 이후에 협동조합이든 사회적기업이든 시작해보려 한다.

안태호 임승관 대표 본인은 어떤 사람인가 궁금해 할 분들이 많을 것 같다.

임승관 그림을 그렸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에 그림을 그렸을 때는 장르가 명확했다. 그림에 전경이 나오든, 사과탄이 나오든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어야 했다.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졸업하고 나서도 계속 고민했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고 함께 활동을 시작했다. 시민들과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이걸 16년째 끌고 오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에서 출발해, 생활예술로 문화운동을 하는 사람이 됐다. 내가 훌륭한 그림을 그려서 사회적 발언을 하고 감동을 주고 바꿀 수도 있지만, 그게 10이라고 했을 때 이 활동을 하면 100을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안태호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말은?

임승관 민주주의와 생활예술동아리 활동의 연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자기를 솔직히 드러낼 수 있는 공간이 극히 드물다. 무시당하지 않는 곳, 합의가 되어서 실천할 수 있는 곳.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생각이다. 공감, 소통. 신뢰가 있어야 하고 투명하게 소통해야 공명의 장이 만들어진다. 최초에 기획하고 준비한 것에 비하면, 놀이터 공간과 소풍까지 생각한 것보다 수십 수백 배의 효과가 났다.

1940년도에 케이크 믹스가 미국에서 출시됐는데 잘 안 팔렸다. 물만 붓고 오븐에 넣기만 하면 되는 편리한 상품이었다. 그런데, 우유와 계란 성분을 빼고 팔았더니 판매량이 확 늘었다. 이케아 가구가 잘 팔리는 이유도 조립 과정이 복잡해서 그렇다고 들었다. 상당 부분 진행되어 합의나 동의만을 하는 경우는 자발성을 이끌 수 없다. 기획 단계부터 같이 노력해야 자발성을 이끌 수 있고 기대할 수 있다. 실패도 매우 소중한 경험으로 남는다. 작가나 프로젝트 지원과는 완전히 다르다. 철학부터, 바탕부터 달라져야 한다. 지원을 위한 문구도 성과평가지표도 모두 달라져야 한다. 기존의 예술지원 틀로 사업을 꾸리기만 하려고 하면 성공하기 어렵다.


인터뷰 내내 임승관 대표의 뒤편 벽면에 걸려 있는 ‘시민, 문화로 꽃이 되다’라는 문구로 시선이 가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 문화로 꽃이 된 시민들은 문화바람의 백서 표제였다고 한다. 참 잘 뽑은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민들의 자발성이 집약되고 화사하게 피어난 과정을 보여주는 말로 꽃보다 더 적절한 게 있었을까. 그 옆에 붙은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포스터에는 ‘피카소가 문화바람을 응원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문화바람 회원임을 증명하면 입장료 수익금의 일부를 문화바람에 기부한다는 거였다. 문화바람이 지역의 긍정적인 문화 권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의 연장선상에 이런 종류의 마케팅이 자리 잡고 있다. 문화바람의 생활예술, 협동, 자발성, 민주주의 실험이 좌초하지 않고 오래도록 지속될 수 있기를 바란다.


임승관/임승관은 인천에서 태어나 회화를 전공했다. 졸업 후 미술패 활동을 하며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는 활동가들과 사회참여적인 예술활동을 하였다. 생활이 나아져야 문화 수준도 높아진다는 말을 싫어한다.. 16년 동안 시민과 함께 문화수용자운동을 하고 생활예술활동을 통해 아름다운 문화공동체를 만들고 있다. 문화가 바뀌면 세상이 바뀌고, 문화는 시민이 만든다는 것을 매일 배우며 살아간다.
안태호 필자소개
[weekly@예술경영] 편집위원. 안태호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정책기획팀 활동가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문화정책과 연을 맺었다. 이후 문화예술전문웹진 [컬처뉴스] 편집장, 예술과도시사회연구소 연구원 등을 거쳐 칼럼니스트, 문화기획자, 정책연구자를 오가며 활동하다 2010년부터 부천문화재단에서 문화사업팀장으로 일하고 있다. 예술가가 못 되면 예술가 근처에서라도 놀아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만화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분주한 일상에 파묻혀 희미해질까 초조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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