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전시장이 뜨겁다. 몇 년 전부터 급격히 미술관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반 고흐와 마르크 샤갈 등 세계적인 거장들의 전시뿐만 아니라, 솔깃한 주제로 기획된 중소규모의 전시장도 붐비고 있다. 주 관람객층도 단체 관람하는 학생과 학부모에서 다양한 계층의 전 세대들로 넓어졌다. 지난 주말에 요즘 가장 시선을 끌고 있는 패션인물 사진가 라이언 맥긴리(Ryan McGinley)의《라이언맥긴리 - 청춘, 그 찬란한 기록》전을 보러 대림미술관에 갔다. 영하까지 떨어진 매서운 추위였지만 입구부터 서울 통의동 골목까지 티켓을 사려는 줄이 길게 이어졌다. 마치 아이돌스타의 팬 사인회 현장 같았다. ‘언제부터 우리가 돈을 내고 전시를 봤다고, 미술관으로 사람들이 몰려든 걸까?’. 대답의 시작은 이러하다.

블록버스터 전시의 시대

[보도스틸]대림미술관_라이언맥긴리_Purple_Beacon, 2011_고화질 [보도스틸]대림미술관_라이언맥긴리1차_10_Highway, 2007_고화질

▲《라이언맥긴리 - 청춘,그 찬란한 기록》전의
<퍼플 비컨(Purple Beacon)>(2011),
<하이웨이(Highway)>(2007)

&copy;Ryan McGinley

모든 유행에는 결정적 전환점이 있다. 한국 영화도 대규모 자본을 투자하여 막대한 흥행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산업적 가능성을 확인한 작품은, 강제규 감독의 &lsquo;쉬리&rsquo;였다. 남북한 대치 상황과 비극적인 로맨스를 잘 풀어낸 덕분에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예술이 아닌 대중문화 산업으로 한국 영화는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렇듯 입증된 성공사례는 곧 강력한 자극제이다. 멀티플렉스 시대가 열렸고, 한국은 할리우드 영화가 장악하지 못하는 작지만 센 시장이 되었다. 도저히 열릴 것 같지 않던 시장을 여는 최초의 문화상품을 가리켜 &lsquo;킬러 콘텐츠(Killer Contents)&rsquo;라 한다. &lsquo;쉬리&rsquo;가 한국영화의 킬러 콘텐츠였다면, 2000년 한러수교 10주년 기념으로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러시아 1000년 삶과 예술》전은 한국형 블록버스터 전시의 서막을 열었다.

이전에도 몇 년의 준비기간과 수십억 원을 투자하여 수십만의 관객을 끌어모으려는 대형 기획전이 간혹 있었지만, 안정된 산업적 모델로 자리 잡진 못했다. 비교적 자주 접하지 못하는 러시아 미술작품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었던 이 전시가 예상외로 큰 성공을 거두자, 초대형 전시들이 앞다투어 열렸다. 《오르세미술관》전, 《위대한 회화의 시대 : 렘브란트와 17세기 네덜란드회화》전, 《살바도르 달리》전, 《색채의 마술사-마르크 샤갈》전, 《서양미술 400년》전, 《마티스와 불멸의 색채화가들》전, 《불멸의 화가 반 고흐 II: 반 고흐 in 파리》전, 《낙원을 그린 화가 고갱과 그리고 그 이후》전 등 그 면면이 대단히 화려하다. 전시규모만큼, 내용도 알찼다. 흔히 말하는 &lsquo;낚시용 작품&rsquo;이 몇 개만 있는 허술한 형태가 아니었다. 특히, 2013년 하반기에 열린 고갱의 전시회는 흔히 말하는 3대 걸작을 세계 최초로 한 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고, 현대카드가 주최한 《팀 버튼》전은 거의 해외 순례 전시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한국에 소개되었다. 파리 루브르박물관(Musee du Louvre)이나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Tate Modern), 뉴욕 현대미술관 모마(MoMA)를 가지 않고 서울시립미술관과 예술의전당에서 볼 수 있다는 큰 이점에 미술 애호가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전시장으로 몰려 들였다.

그런데 이런 전시 열풍을 접할 때마다, 나의 오래된 의구심 하나가 떠나지 않는다. 미술가 화집은 거의 팔리지 않는데, 어째서 전시회는 흥행할까? 파리나 런던, 뉴욕 등에서는 일상적으로 화집과 사진집을 많이 팔리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그림에 대한 요구 수준이 유난히 높아서 한국인은 오로지 전시장에서 진품만을 볼 뿐일까?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꿔 물을 수 있다. &lsquo;왜 갑자기 이렇게 많은 한국인은 전시회를 보기 시작했을까? 일제히 미술을 사랑하기로 결심이라도 했을까?&rsquo;

오빠,《반 고흐》전 가자!

IMF구제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한국은 사회경제적으로 크게 변화했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의 일상화로 중산층이 붕괴하면서, 소득과 계층의 양극화가 심화됐다. 이에 따라 소비형태도 아주 비싸거나 아주 싼 것만 팔리는 현상이 뚜렷이 나타났다. 전시 관람은 선진국 문화이다.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영화와 텔레비전이 개발도상국과 후진국에서 주로 소비된다면, 소득수준이 올라갈수록 복제되지 않는 문화를 찾게 된다. 따라서 저소득층에서 대중적인 문화 콘텐츠가 강세라면, 고소득층은 공연과 전시를 선호한다. 2000년도를 즈음해서, 한국의 문화 산업은 변곡점을 찍는다. 1999년의 &lsquo;쉬리&rsquo;, 2000년의 《러시아 1000년 삶과 예술》, 2001년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이 각 분야의 킬러 콘텐츠로서 대중적 유행을 이끌어냈다. IMF구제금융 위기를 겨우 벗어나기 시작했을 무렵이라, 티켓 값이 10만 원이 넘는 대형 라이선스 뮤지컬이 메가 히트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페라의 유령>을 비롯한 대형 뮤지컬은 경제적인 능력을 갖춘 30대 골드미스들에 의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그래서 지금까지도 남자주인공 캐스팅에 흥행 성적이 상당 부분 좌우된다).

그 이전까지, 전시산업은 한국 부모의 교육열에 크게 기대었다. 그들은 미술관을 미술작품 감상보다는 방학숙제용, 창의력 향상과 감성 발달 등의 이유로 주로 찾았다. 그런데 어릴 적부터 문화적 소양 교육을 적극적으로 받으며 자라난 20대들(80년대 이후 출생자)이 스스로 전시장으로 밀려들고, 해외여행을 통해 미술관에서 명작을 접해본 경험이 풍부한 30대가 가세하면서 전시 관람은 새로운 유행으로 퍼져나갔다. 결정적으로, 전시문화의 주 소비자층인 2, 30대 여성들이 주말에 &lsquo;오빠랑 《반 고흐》전&rsquo;을 보기 시작했다. 어떤 문화산업이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가 되는 순간, 대중성은 손쉽게 확보된다. &lsquo;또래 문화&rsquo;에 대한 추종이 강한 한국의 젊은 세대는 친구 따라 어디든 간다. 대학 입시를 끝낸 후에 본격적으로 새로운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해소하는 그들은 &lsquo;남들과 다른 새로운 무엇&rsquo;을 발견하고 즐기려는 욕구도 대단히 강하다. 그렇게 시작된 미술관람 문화는 블로그, 페이스북과 트위터 등 각종 사회관계망 SNS 서비스와 결합되면서 스마트폰 세대들에게 빠르게 퍼져 나갔다. 이런 변화를 재빨리 파악한 몇몇 사립미술관에서 새로운 미술 관람객층이 좋아할 만한 기획전을 선보였다. 친구 따라왔던 청춘들이, 이제 친구를 데리고 다시 미술관으로 왔다. 이외에도 장기불황에 따른 라이프스타일 산업의 확장과 전시 산업에 대기업의 활발한 참여, 예술작품을 통한 인문학 강의 열풍 등이 더해지면서 블록버스터 전시들은 계속된 성공을 거두었다. 이렇듯 지난 10여 년간 폭발적인 양적 성장을 거듭하여 강한 빛만큼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전시는 제2의 창작이다

1019-2 1556_Kyungsub Shin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의
《ECM :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전

(사진제공_글린트, &copy;Kyungsub Shin)

&lsquo;연극열전&rsquo;을 통해서 연극을 관람하는 층이 넓어졌듯이, 블록버스터 전시도 그러했다. 그림과 사진, 조각 등을 직접 보는 즐거움을 접한 이들이 볼 만한 전시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섰다. 관객은 스스로 진화하기 마련이다. 서양 미술사를 빛낸 유명 화가가 없어도 성공하는 전시들이 생겨났다. 특히, 지난해 하반기에 열렸던 《ECM, 침묵 다음으로 가장 아름다운 소리》 전시회의 성공은 주목할 만하다. 독일의 현대음악&middot;재즈레이블 ECM(Edition of Contemporary Music)은 더 이상 CD를 구매하지 않는 스마트폰 세대들에게 낯선 이름이다. 소수의 음악, 영화 관련자들만 아는 이 음반사의 (비대중적인) 음악을 듣고, 커버 아트를 감상할 수 있는 음악과 미술이 복합된 이 전시가 기간을 연장할 만큼 흥행할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것은 전시 자체를 즐기는 층이 확실히 두터워졌음을 반증한다. 관객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고, 서서히 길러지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문화정책 입안자들은 해외 주요 미술관들처럼, 예술을 접할 기회가 제한된 취약층과 사회 배려계층에 대한 무료 관람기회를 더욱 폭넓게 확대해야 할 것이다.

한편, 몇몇 대형 전시회의 쏠림 현상과 대단히 열악한 관람환경 등은 자주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쏠림 현상은 산업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관람 환경의 문제는 다소 심각하다. 예를 들어, 추위에 떨며 몇십 분을 기다렸다가 입장한 라이언 맥긴리 전시회는 전시장의 넓이에 비해 너무 많은 사람을 입장시켜 마치 시장통 같았다. 작품을 도저히 감상하지 못한 더욱 큰 이유는, 온통 사진 찍느라 정신없는 관객들 때문이었다. 작품을 보러 온 자신을 기록하기 바빴고, 미술관 측에서는 그것이 홍보와 마케팅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는지 전혀 제지하지 않고 있었다. 밀물처럼 밀려든 관객은 셀카와 인증샷을 무수히 찍고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곳에 온 주목적이 사진 감상이 아니라, 셀카 배경지를 제공하는 듯 했다(&lsquo;나 거기 가봤다&rsquo;). 만약 내가 맥긴리 사진의 팬이었다면,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을 만큼 실망스러웠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처럼, 인터넷 예약제로 관람객 수를 제한하는 등의 방법으로 보다 쾌적한 관람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전시는 작가의 예술성과 대중의 상업성을 적절히 잘 조화시켜야 하는, 제2의 작품 창작이기 때문이다.

좋은 전시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

블록버스터 전시의 열풍은 계속 이어질 것인가? 《뭉크》전(7월 1일~10월 12일,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오르세미술관》전(5월 3일~8월 31일, 국립중앙박물관) 같은 대형 스타급 전시가 예정되어 있어, 전시 산업의 전망은 올해에도 밝다. 한국 관객들은 지금 수준 높은 전시를 마음껏 소비할 준비가 되어있다. 동시에 전시에 대한 요구 수준이 높아졌고, 까다로워졌다. 예전처럼 하다간 한순간에 지금의 이 호황이 거품으로 돌변할 것이다. 지금까지 제기된 몇몇 문제점들을 개선하고, 다양한 종류의 전시장들이 공존하는 법도 아울러 모색해야 한다. 다양성이 사라지는 시대에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예술이 필요하다. 블록버스터 전시의 공과를 되돌아보고, 올해부터는 무엇이 좋은 전시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블록버스터 전시에 대한 기획자, 홍보담당자, 미술관 측의 입장과 제기된 여러 문제점에 대한 자구책과 대안은 물론, 스마트폰 시대에 맞는 미술관 브랜드화에 대한 전략 등을 다루는 기사가 245호(2014년 2월 6일자)에 이어질 예정입니다.

필자사진_이동섭 필자소개
이동섭은 한양대 광고홍보학과를 졸업한 후 파리8대학(Universit&eacute; Paris VIII)에서 예술과 공연학으로 석사와 박사(수료)를 마쳤다. 2013년 베를린 영화제 단편경쟁 초청작 〈연애놀이〉의 아트디렉터, 뮤지컬 〈그날들〉의 드라마투르기로 활동한 바 있으며 영화진흥위원회와 CJ제작지원 선정작인 〈레이디〉,〈뱅커〉등의 시나리오를 썼다.『뮤지컬의 이해』,『당신에게 러브레터』,『패션코리아 세계를 움직이다』등 문화 다방면에 걸쳐 책을 썼으며, 현재 성신여대, 청강대, 한예종 등에서 &lsquo;뮤지컬과 대중문화&rsquo;, &lsquo;스토리텔링과 콘텐츠기획&rsquo; 등을 가르치고 있다. 얼마 전부터는 SBS 컬처클럽 &lsquo;수다의 품격&rsquo;의 진행을 맡고 있다. 트위터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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