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부 「간송 전형필」 2014. 3.21 ~ 6.15
2부 「보화각」 2014. 7. 2 ~ 9.28

지난 3월 21일, 드디어 개관됐다. 개관 전부터 이미 많은 논란의 중심에 있던 ‘동대문디자인프라자(이하 DDP)’가 그 위용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건축물을 둘러싼 여러 논란만큼이나 닫혀 있던 간송미술관이 문을 열고, 문을 연 것에 그치지 않고 유물들을 DDP로 옮겨 전시한다는 것에도 많은 관심이 주목됐다. 『간송문화(澗松文華)』(부제 :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1)전을 통해 국보급 유물들이 개관과 함께 일반관객에게 공개된 것이다. 건물만큼이나 이물감이 드는 전시다. 그런데 그래서 더욱 호기심이 드는 전시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지면은 많은 논란 중 비슷한 하나를 더 얹자는 것은 아니고, 이 논란의 중심인 공공건축물과 국보급 유물이라는 ‘어색한 만남’ 사이의 커튼 뒤에서 기록 작업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인간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의 문화를 전수시키기 위한 방법들을 고안해 왔다. ‘기록되지 않는 것은 역사가 되지 않는다(레지스 드브레)’는 명제를 믿으며, 이상향인 네버랜드를 찾아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사라져 가는 무형의 것들의 마지막 자취를 쫓는 피터팬이, 여기 있다.

상업적인, 너무나 상업적인

황보유미 음반회사 ‘악당이반’을 설립한 과정이 많이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먼저 시작하신 것은 사진작업이던데?

김영일 이 명함은 음반회사 것이고, 원래 내가 사진사라 <그루비주얼>이라는 영상회사 명함이 하나 더 있다. 이 영상회사 명함을 주면 나는 딴 사람으로 변한다. 완전 변신이다. 상업도 그런 상업성이 없다. 이 두 장이 많이 달라 보이지만 결국은 하나다. 내가 어렸을 때 왜 사진사가 되기로 했을까 생각해보면, 뭔가 남들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인데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기록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게 계속 이어져 사진학교를 가고, 결국 영상을 담는 회사까지 만들었다. 그랬던 사람이 어느 날, &lsquo;들리는 것&rsquo;에 매료됐다. 그렇다고 음악을 안들은 것은 아니지만, 들리는 것의 가치가 소중하다고 생각한 뒤부터 그것을 계속 기록하기 시작했고, 결국은 기록된 소리들을 음반으로 만드는 회사를 또 만들어 버리게 됐다. 사람들은 독특하게 보지만, 나는 보이는 것의 기록이든, 들리는 것의 기록이든 기록적 가치 측면에서의 의미는 전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황보유미 간송미술관에서 유물이 DDP로 옮겨져 전시 되는 과정에서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김영일 기록도 시대가 변하면서 그 기록의 형식들이 변하고 있다. 예전 전문가들이 사용하던 것들은 주로 인쇄를 목적으로 하니까 슬라이드 필름이었다. 그런데 그 형태는 벌써 10년 전 기술로 마감됐다. LP음반이 디지털 CD가 나오면서 사라졌고, CD도 이젠 소멸됐다. 그 전에는 카세트테이프가 한창이지 않았나. 카세트테이프는 이젠 전 세계 어디에서도 생산되는 공장이 한군데도 없다. 완전히 없어졌다. 그러나 이렇게 시대가 변한다고 그 안에 담겨졌던 내용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베토벤 교향곡 5번, 7번, 9번이 없어지지는 않는데 시대가 요구하는 그것들의 저장장치는 변해왔다. 우리나라 진짜 핵심 정수에 해당하는 국보들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곳이 간송미술관이다. 우리는 그 원본을 만나 기록을 하게 된다. 그것을 예전엔 슬라이드로 다 찍었었다. 슬라이드를 쓰다보니까 슬라이드의 고유한 색깔들이 묻어있기도 하고, 슬라이드는 워낙 항온항습을 유지하고, 중성지에 넣어서 보관해도 6년이 지나면 색감이 파괴된다. 지금은 디지털 환경이 되었으니까 디지털 기기로 그것을 찍는 것이다. 신영복, 월하, 추사의 작품들 그리고 「훈민정음」해례본 원본을 말이다.

사진_국보 제135호 신윤복의 단오풍정(혜원전신첩)

▲국보 제135호 신윤복의 단오풍정(혜원전신첩) (사진제공_간송미술문화재단)


오래된 것을 우리 스스로 기록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는가

황보유미 그러면 미술작품들을 가장 현재화된 기술로 기록하는 것인가?

김영일 그렇다. 일종의 기록이다. 우리가 그동안 디지털이라고 믿었던 DSLR 카메라가 한 2천, 3천만 화소 정도다. DSLR로 찍으면 웬만한 것은 다 나온다. 물론 이런 카메라가 핸드폰에도 다 있다. 나도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서 사진을 주고받을 때 핸드폰을 사용한다. 하지만 핸드폰으로 지금 남대문, 동대문 그 밖의 유물들을 다 기록해서 후대에게 물려주면 형태는 볼 수 있지만 그것을 크게 프린트 하면 다 깨진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현재 디지털 환경에서 가장 큰 1억2천만 화소를 쓴다. 그러니까 보통 캐논이나 니콘 등의 카메라들이 2천-3천만 화소 왔다갔다 하는 데 우리가 쓰는 것은 1억2천만 화소니까, 1억만 화소가 더 있는 거다. 그러니 소프트웨어도 일반 컴퓨터에서는 돌아가지도 않는다. 이런 고해상도 컨텐츠를 담을 때, 현재 세상의 모든 기록 방식 중 최상의 기록 방식, 그게 음악으로 가면 DSD라는 파일이다. 그게 CD, 블루레이(Blue-Ray), DVD 오디오 등 원하는 데로 만들 수 있게 해준다. 오래된 것을 우리 스스로 기록하지 않으면 누가 기록하겠는가. 그런데 기왕 그것을 담는 매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기술적 데이터 중에서 가장 최상의 버전이길 바라고, 그렇게 기록해서 좋은 음질과 좋은 화질로 세상에 알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이 작업을 하고 있다.

황보유미 주로 <그루비주얼>에서는 예술작품들 촬영만 하는가?

사진_

김영일 그렇지는 않다. 교과서에 들어갈 이미지 촬영을 하기도 한다. <그루비주얼>에는 나 말고 11명의 실장이 더 있고, 그 실장 밑에 퍼스트 카메라, 세컨 카메라, 어시스트 이렇게 구성된다. 정확한 숫자는 잘 모르겠는데 그룹들이 전체가 모이면 50명 정도 된다. 그들이 한 달 동안 만드는 영상의 컷 수는 수십만 컷에서 백만 컷이 넘을 때도 있다. 사보, 매거진, 그리고 포스터 작업도 한다. 교과서 같은데 들어가는 것들은 과학 교과서의 경우 실험장면, 수학 교과서의 경우 학생들이 나오는 것도 찍는다. 이 모든 것이 그냥 가서 찍는 것이 아니고, 교과서 만드는 필자 선생님들의 쓴 시놉시스를 바탕으로 한 컷, 한 컷을 만든다. 그런 종류의 작업부터 시작해서 건축사진, 건축도 인테리어부터 시작해서 돈 되는 건 다 한다. 그렇게 열심히 벌어가지고 거기서 십일조를 떼서 이 회사(악당이반)를 먹여 살리는거다. 이 회사는 십 원도 못 버니까. 이것은 한 달에 얼마를 버느냐보다, 얼마나 까먹느냐, 그게 문제이다.


사진_간송미술관8/간송미술관3

황보유미 간송미술관 유물의 DDP 전시를 위한 기록 작업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김영일 유물들이 오늘 밤에 이송돼서 3일간 촬영이 진행된다. 그런데 중요한 게 뭐냐면 이 전시에는 유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DDP에서는 몇 개의 유물을 놓고 하루에도 수 천 명 이상씩 올텐데 관객들이 와서 줄을 서서만은 다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스크린에 그 유물을 이미지를 띄우게 될 예정이다. 그 영상의 해상도가 UD(Ultra HD의 약자)이다. 요즘 HD(High Definition), Full-HD까지 만들어졌고, 그 상위가 울트라 하이덴시티(Ultra High-density)인데 그것을 개발한 회사가 우리나라 삼성과 LG다. 그래서 DDP에 유물들이 전시되는 것과 관련된 모든 비용들을 서울시가 예산을 다 댈 수 없으니, 삼성이 영상전시에 대한 후원을 하기로 한 것이다. 이미지를 넘겨주면 이 회사측에서 UD 화면에 쏘는 건데 일반 카메라 가지고는 그 고해상을 감당하기가 택도 없는 거다. 지난번에 어느 회사 하나가 들어가서 촬영을 했다가 그 데이터를 간송에 보내고, 간송이 그것을 삼성으로 보냈는데 삼성측에서 해상도가 낮아서 쓰지 못한다는 결론을 낸 것이다. 그 먼저 회사가 썼던 것이 7천만 화소다. 우리도 오늘밤에 완전히 테스트가 끝나고 장비가 들어간다.

황보유미 그러니까 작업하신 것을 UD에다 쏠 수 있을 만큼 작업 하는건데 그러면 카메라는 어떤 것을 사용하는가?

김영일 지나(Sinar)라는 스위스 기계이다. (카메라 가져옴) 이렇게 생긴 카메라이다. 생김새가 좀 많이 다르다. 여기 뒤에 백이 하나 붙어있다. 이 백이 1억만 화소가 넘는다. 이게 컴퓨터 한 대가 아니고 2대가 병렬로 돌고 있다.

비주얼 디렉터로서의 사명

황보유미 이번 전시 관련 기록 작업에 몇 명의 학예사가 붙는가?

김영일 간송미술관 측에서는 6명 정도이다. 우리 스태프도 그렇고 될 수 있으면 사람을 줄여야 한다. 촬영 공간에 들어가서 한쪽 방향으로만 걸을 수 있는데 왜냐하면 혹시라도 유물을 들고, 서로 방향이 엇갈리다가 부딪치는 상황이 발생하면 안되니까. 그래서 한쪽 방향으로만 걸을 수 있다. 그렇게 설정해야만 한다. 그래서 세팅 후 그런 규칙들을 지키며 내일부터 3일간 촬영하게 된다. 이번 간송의 유물들이 DDP에서 3년간 전시를 할텐데 전시 유물들이 교체될 때, 또 들어가서 찍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1차 때 촬영했던 조리의 어프로치 크기라든지 조명의 세기, 컬러 밸런스, 그레이 스케일, 다 맞춰서 맨 앞에 찍었던 유물이나 맨 뒤에 찍었던 유물이 도록을 만들었을 때 같은 것처럼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황보유미 그렇다면 유물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건 학예사들이고, 촬영기록 과정에서의 여러 환경 조건들은 <그루비주얼> 스태프들이 기록하는 것일텐데 스태프가 몇 명이고, 그들 각각의 역할은 어떻게 되나?

김영일스태프는 4명 들어간다. 구성은 퍼스트카메라, 세컨드 카메라 그리고 그 둘의 어시스트 스태프가 2명이다. 나의 역할은 비주얼 디렉터이다. 유물을 놓고 보면서, 찍었을 때 퍼스트 카메라나 세컨드 카메라가 보지 못하는 것을 디렉팅한다. 가령 여기에 잔이 있는데 조명, 움직임에 따라 다양하게 보일 수 있다. 그 때, 이렇게 찍을지 저렇게 찍을지를 비주얼 디렉터가 정해야 한다. 「훈민정음」을 펼쳤는데 두 페이지가 한 면에 보이는게 옳을지 아니면 한페이지씩 찍어서 나중에 합성하는 게 더 옳을지 비주얼 디렉터가 정해야 한다.

사진_국보 제70호 훈민정음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사진제공_간송미술문화재단)



황보유미 그 부분에서 학예사들과 어느 정도 상의를 하는가?

사진_국보 제66호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 사진_국보 제65호 청자기린유개향로

▲▲국보 제66호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
(사진제공_간송미술문화재단)

▲국보 제65호 청자기린유개향로
(사진제공_간송미술문화재단)

김영일 상의해야 한다. 그런데 나의 원칙은 이렇다. 청자는 빙렬(氷裂)이 생긴다. 깨진 것처럼 수없이 많은 균열이 있는데, 그게 절대 깨진 것이 아니다. 빙렬이 수없이 많고 조밀할수록 더 좋은 고급의 청자라 얘기하듯이, 그 빙렬의 투과도를 어떻게 보이게 하느냐가 중요하다. 보통 청자의 어깨를 보면 광택이 난다. 여기에 빛이 가면 그 부분이 하얗게 나가버려 텍스처(texture)가 안보인다. 그걸 안 보이게 하기 위해서 빛을 퍼트려 쓴다. 직광은 성격이 많이 다르니까. 그러면 퍼트린 빛이 옳은 것이냐. 빛이 퍼진 상태에서는 텍스처가 다르게 보인다. 보다 설명적이고, 보다 균일하다. 그래서 빛을 어떻게 쓸 것이며, 그 투과율을 어떻게, 그것의 각도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를 결정해야 한다. 유물 사진들의 배경을 보면 밑은 하얗고, 위로 올라갈수록 검다. 이것은 30, 40년 전에도 일본 사람들이 이렇게 찍던 방식을 아직도 사용하고 있는 거다. 대영박물관이나 프랑스, 유럽 박물관들 가서 자세히 보면 이런 사진이 없다.

황보유미 처음에 그 배경을 이렇게 처리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김영일 소위 이런 것들을 &lsquo;그레이데이션백(gradation back)&rsquo;이라고도 하고, 일본말로는 &lsquo;보카시빼다&rsquo;라고 한다. 이게 음영이 뒤에 있으니까 입체감과 신비감이 더 살아나면서 작품이 더 빛나 보인다. 그 사람들이 또 어떻게 설명했냐면 위에서 빛이 들어가면 밑에 그림자가 생기고, 그래서 밑이 하얗게 되면 그게 반사돼 밑 부분을 살리면서 윗부분을 균일하게 볼 수 있다고 얘기를 한다. 그럴 경우에는 얘기가 맞을지 모르나 이렇게 네모난 형태는 어떻게 할 것이며, 거꾸로 주병처럼 생긴 것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안 맞는 얘기다. 뭐든지 다 이렇게 해서 학예 연구사와 고고학자들이 이렇게 촬영된 것만 때문에 아무런 이견이 없이 그렇게 이어져 왔던 것이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좌측통행을 하라고 시켰기 때문에 좌측으로 다니는 거지 어느 날 우측으로 하라고 하니까, 그게 더 합리적인 것을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하얀색이든 회색이든 블랙이든 균일하게 배경색을 넣을 것이다. 지난번 궁중채화 채록할 때, 어떤 작품은 올블랙을 쓰기도 했다. 이런 것들이 비주얼 디렉터가 할 수 있는 역할이다. 모든 것을 제자리로 만드는 일, 그리고 우리의 다음 세대들이 그것들을 볼 수 있게끔 하는 것 말이다. 이번에 그런 것을 다 바꿀 것이다. 반드시.

사진_2014년 조선왕실공예특별전 《아름다운 궁중채화》 포스터 (사진출처_국립고궁박물관)

▲2014년 조선왕실공예특별전 《아름다운 궁중채화》 포스터 (사진출처_국립고궁박물관)



디지털과 아날로그 서로의 적이 아닌 친한 이웃이다

황보유미 소리의 기록도 수익의 문제를 제외하고는 같은 방식인가?

김영일 영상회사도 없는데 음악회사는 더더욱 없다. 그래서 나는 이 두 개 회사를 가지고 돈과 상관없이 우리나라의 스펙을 만들고 있다. 그게 뭐냐면 음악에 있어서 우리나라 국가 표준화다. 과학기술처에서 정한 길이는 피트가 아니라 미터법, 무게는 파운드 온스가 아니라 킬로그램인 것처럼 우리나라 기술표준화가 있다. 음악도 16비트에 44KHz CD를 만드는 것이 국가표준으로 정해져 있다. 그런데 지금 컴퓨터로 리핑(ripping)해서 하이 레졸루션(High-resolution)의 PC 파일로 듣는 것이 새로운 트렌드다. 그것을 우리가 떠들 것도 없이 도이치그라모폰이나 베를린필하모닉 사이트에서 DSD(Direct Stream Digital) 서비스를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DSD는 일본 소니사와 네덜란드 필립스가 공동개발 한 하나의 알고리즘이다. 그것이 지금 소리를 녹음하는데 있어 가장 상위의 소스들을 만든다. 그래서 보통 우리 CD 한 장에 800메가 정도 들어간다. 그런데 DSD로 만든 SACD나인버전으로 그걸 만들면 18기가가 들어간다. CD로 듣다가 SACD나인버전을 들으면 이것은 초등학생 학예회 수준의 음질이다. 세상은 그렇게 발전했다 보이는 것이 비주얼이 흑백티비에서 칼라로 바귀었다가 지금 UD를 못 채워서 일을 못 맡아 날아가는 것처럼 서양에서는 이미 하이레졸루션으로 세상이 돌고 있다.

황보유미 녹음 자체를 하이레졸루션으로 하면 기록된 모든 것, 즉 관객들이 듣는 모든 것이 상위 음질 방식이겠다.

김영일 그렇다. 다시 녹음 쪽으로 가보자. 내일부터 황병기 선생 가야금 연구 레코딩을 한다고 치자. 연주자 황병기 선생 자체는 다시 안 생긴다. 그래서 그 순간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기술 표준에서 가장 좋은 걸로 넣어야 한다는 게 내 지론이다. 그게 음악에선 DSD다. 그 다음 CD로 만들려면 다운데이터를 하면 된다. CD로 넣는 걸 DSD로 넣으려면 뻥튀기를 해야 하는데 그걸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하이레졸루션을 넣어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된다는 얘기를 듣고 독학해서 알아보니 DSD라는 게 세상에 존재하더라. 세상에 그걸 만든 사람도 있는데 그걸 사다가 버튼 누르고 쓰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나. 그래서 스위스로부터 대한민국으로 그 기계를 들여왔다. 그런데 그걸 넣을 줄 아는 엔지니어가 3명뿐이더라. 다 유학파였다. 정말 한심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럴 수가 있는지. 그리고 각 대학에 기술 쪽 선생들, 대학원까지 졸업한 학생이 우리 회사에 취직했다. PCM이 아닌 DSD 녹음을 할 거니까 그에 대해 공부를 해오라고 했다. 그랬더니 자기 선생한테 쪼르르 가서 <악당이반>에 갔더니 DSD 녹음을 한다고 물은거다. 대학이 아니라 대학원까지 졸업하고도 DSD가 뭔지 모르는 거다. 책은 뭘 봐야 하냐고 물으니 그 선생이 &ldquo;야, 그거 돈 안 돼.&rdquo; 그랬다더라. 한 나라의 문화가, 기록이, 그게 남고 기록될 때, 내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한 자리로 돌아온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최첨단의 기술로 우리 문화예술을 기록하겠다는데 그걸로 하지 말라는 법이 있나. 그걸 이 세상에 만든 놈도 있는데 레코드 버튼 눌러서 쓰지 못하면 말이 되는가.


황보유미 인간의 나안(裸眼)으로 어떤 사물을 접하는 것보다 기술적인 첨예함 때문에 오히려 왜곡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은가?

사진_유재하음반_출처YES24

▲ 서도호가 그린 故 유재하의 음반 표지
(사진출처_YES24)

김영일 물론 그렇다. 디지털의 늪에 빠진다고 얘기하는데, 어쨌든 디지털은 010에 00이고, 디지털의 레인지가 있다. 순먹에서 순백까지 이루어지는 걸 아날로그한 건 아무것도 안 보이는 순먹의 상태와 순백의 상태를 사람의 나안의 형태에서 했다. 이것이 디지털에선 어느 한 페이지를 펴고, 거기에 아무것도 없으려고 해도 없어야 되는 정보가 있어야 없는 걸로 보인다. 그게 디지털의 늪이다. 그런데 이 디지털도 그런 줄 안다. 자기가. 그래서 디지털의 최고 지향점은 아날로그이다. 굉장히 아이러니하다. 디지털이 아날로그처럼 되고 싶어하다니. 그래서 아마도 사이보그가 사람처럼 되고 싶어 하고, 나중엔 사랑하고 싶고, 그런 감정도 가졌으면 하는 것이다. 지금 청소기 로봇이 바닥만 훑고 다니는데 그렇게 되고 싶어하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상의 유미상쇄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러면 아날로그에서 우리가 듣는 최고는 뭐냐면 LP까지를 볼 수 있다. 그래서 디지털로 다시 LP를 만든다. 기껏 그렇게까지 디지털로 가놓고 다시 LP를 만든다. 가장 최근에 했던 작업이 한 달도 안 됐는데, 서도호가 앨범 쟈켓을 그린 유재하 음반이다. 도호와 재하랑 함께 다 친구였다.


황보유미 서도호 작가가 학생 때 그린 작품이었나. 새로운 사실을 거꾸로 알게 된다. 그러면 이 작업을 <악당이반>에서 한건가?

김영일 재하가 음반이 하나지 않나. 그 음반의 마스터테이프를 형님이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 분이 건강이 좋지 않다. 그래서 형님이 어느 날 갑자기 당신도 가기 전에 재하 음반을 옛날에 서울음반에서 그냥 무조건 복사해서 찍은 거 말고 제대로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고 하셔서 시작됐다. LP판은 180그람 버진 비닐로 독일에서 프레싱하고, 커팅했다.

황보유미 이 음반이 지금 판매중인가?

김영일 찍었다고 발표된 후 다 매진됐다. 처음에 500장, 나중에 1000장 찍었는데 지금은 없다. 앞서 그 디지털이 그런 거 아니냐고 하는 것에 덧붙이면, 웬만한 디지털, 그러니까 MP3로 녹음했거나 CD버전으로 녹음했거나 그랬으면 이렇게 올 수 없다. 그런데 DSD라는 걸로 했으니까 이걸 만들고도 남는다. 그러니까 정말 끝에서 완전 끝으로 가면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서로의 적이 아니고 친한 이웃이자 친구일 뿐이다. 그렇다.

황보유미 기록 관련된 모든 매체를 다 다루는 것 같다.

김영일 맞다. 그냥 하고 싶었다. 그렇게 꾸준히. 책이든. 텍스트로 된 거든 이미지로 된 거든 소리로 된 거든.

사진제공_그루비주얼



김영일/김영일은 1993년 사진전문 출판사 ‘도서출판 일’을 창립해 40여 종의 사진집을 발간했으며, 2003년 영상전문 법인회사 ‘그루비주얼’을 창립해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전통소리 공연, 녹음, 공연장 건립 등 7년간의 준비를 통해 2005년에는 음반/영상 전문회사 ‘악당이반(주)’을 창립했다. 1,400여 개 국악음원 마스터를 제작했으며, 78종의 우리음악음반을 제작해 국내외로 유통하고 있다.
사진_황보유미 필자소개
황보유미_[Weekly@예술경영] 책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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