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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예약당 내·외부 모습
(사진출처_국립국악원)

1) 1985년 월간 [객석] 참고

국립국악원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옆’에 있다. 그나마 국립국악원에 한 번쯤 가봤거나 아는 이들이 무심코 쓰는 이 말에는 서울 시민들이 생각하는 국립국악원의 이미지가 뭉뚱그려져 있다. 하지만 국악을 전공하는 이들에겐 가고 싶은 직장 1순위이고, 취미든 전공이든 국악을 하는 이들에겐 한 번쯤 서고 싶은 무대가 있는 곳이다. 국립국악원은 6·25 전쟁의 상황이 엎치락뒤치락하던 1951년 부산에서 개원했다. 그 뒤 네 번의 이사를 거쳐 1987년 지금 있는 곳으로 이사했다. 서초동 현 건물에 오기까지는 말이 국립국악원이었지 초라했다. 1985년엔 다른 국공립 단체와 비교해 지나치게 낮은 대우가 큰 화제였다. (1984년 기준으로 KBS교향악단은 초임 40만 원, 20년 차 93만 원, 서울시립교향악단은 초임 21만 8천 원, 20년 차 52만 2천 원, 국립국악원은 초임 18만 9천 원, 20년 차 31만 5천 원이었다.1) 열악한 대우에서 눈치챌 수 있듯 지금처럼 선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국가의 지원과 국민의 관심, 국악계의 열망으로 정악 위주에서 민속악도 포함하는 기관으로 바뀌면서 규모가 부쩍 커졌다. 1992년엔 전라북도 남원에 국립민속국악원이, 2004년엔 전라남도 진도에 국립남도국악원, 2008년엔 부산에 국립부산국악원이 개원했다. 본부 격인 국립국악원엔 소극장인 우면당, 대극장인 예악당, 박물관이 갖춰졌고, 2013년엔 옛 분위기 나는 공연장인 풍류사랑방과 연희마당이 문을 열었다. 주말마다 입문 격인 토요명품공연을 포함, 거의 매주 빠짐없이 국립국악원 무대는 돌아간다.

현재 국립국악원에는 정악단, 민속악단, 무용단, 창작악단 4개 공연단체가 소속되어 있다.

김해숙은 다를 것이다

img2 임기 2년의 국립국악원장이 취임할 때마다 기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올 1월에 취임한 18대 원장에 대한 기대는 국악계 안팎에서 남다르다. 이제 국립국악원은 당연히 변화할 것이라는 전망은 그의 이력에서 비롯된다. 1954년생인 김해숙 원장은 1977년 서울대 음대 국악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5년은 우리나라 문화사에서 큰 의미를 둘 해다. 6·25 전쟁 이후 무분별하게 수입해 따라잡기 급급하던 서양 학문에 대한 반동과 오역으로 뒤엉킨 문화예술계에 질서를 부여하자는 기운이 싹텄다. 철학자 김용옥과 국악작곡가 백대웅(1943~2011)이 만든 모임인 ‘악서고회’를 시발점으로 국악, 영화, 미술, 체육 등 다양한 분야로 퍼지던 때였다. 당시 이 모임에서 배움을 이어가던 김해숙은 가야금산조 연주가이자 국악 이론 연구자로 열성적이었다. 1998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로 부임해선 백대웅과 함께 기득권에 안주하는 국악계에 변화를 가져오는 파격적인 일을 자주 벌였다. 2005년부터 2년간 국립국악원 국악연구실장을 맡아 악기 개량 문제를 비롯하여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던 사안에 용감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여러 세미나에서 난감하거나 미묘한 선택의 순간에 보여준 분명한 태도와 잘 훈련된 화법을 구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똑 부러진다는 인상을 받았다는 국악인들이 많다.

“사람들이 저를 평가할 때 그래도 좀 열린 생각을 하는 사람 중의 하나로 본다고 생각해요. 우리 음악에 여러 장르(정악, 민속악 등)가 있지만, 어느 한 장르에 치우치지 않았고, 제가 연주자지만 연주뿐만 아니라 이론적으로도 공부했기에 뭔가 좀 열린 생각을 하고 국악원, 혹은 국악을 바꿔가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를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1990년에 창단된 ‘서울 새울 가야금 삼중주단’이 92년에 발표한 앨범의 수록곡인 ‘가야금 삼중주를 위한 파헬벨의 캐논’은 서양음악을 국악기로 연주한 곡으로 요즘엔 흔하지만, 당시에는 파격적이었다. 숙명가야금연주단, 사계 등 가야금 중주단의 효시 격인데, 지금 들어도 이 음반에 수록된 곡들은 촌스럽지 않다. 가야금 연주가로 너무도 유명한 김일륜, 김해숙, 박현숙이 구성 멤버다.

국악과 국제교류

1955년부터 현재까지 세계 각국의 전통음악 600여 종을 넘게 만든 오코라 라디오 프랑스(Ocora Radio France)가 제작하고, ‘하모니아 문디(Harmonia Mundi)’가 63개국 유통을 맡은 국악 부문의 첫 번째 음반이 《종묘제례악》(2011년)이고, 두 번째로 출시한 것이 《최옥삼류 가야금산조》(김해숙 연주, 2012)다. 두 번째 선택이 가야금 여러 유파 중 최옥삼류라는 게 흥미롭다. 최옥삼(1905~1956)은 무용가 최승희(1911~1969)의 무용 반주를 도맡아 했었다. 우리 예술가의 국제교류사에서 아직 최승희를 능가할 만한 인물은 찾기 힘들다. 1930년부터 일찌감치 미국, 유럽, 남미 순회공연 다녔다. 국제 진출 초기, 낯선 공연 유통 시스템에 적응 못 해 적자를 본 미국만 제외하고는 현지의 폭발적 호응도 이끌어내고, 상업적으로도 성공적이었다. 국제화 부르짖는 요즘도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공연시장 유통의 흐름에 편승할 줄 아는 최승희의 안목 덕분이다. 김해숙 원장도 이런 문제의식은 갖고 있다. 그는 오코라 레이블 작업을 예로 들며 국제교류에서 기획자의 역할과 유통의 중요성에 대해서 만날 때마다 강조했다. 그래서 국제교류 활동 일선에서 축적 없이 매번 리셋되는 기획력이나 공연유통시장의 맥을 번번이 놓치는 현 상황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는 매개 역할엔 관심이 없는지 물어보았다. 큰 틀에서는 적극 동의를 하면서도 국립국악원이 나설 자리인지에 대해서는 답을 미뤄두었다. 한편 국가대표 격인 국립국악원이 외국에서 무료 공연을 하게 되면, 다른 민간단체가 국제시장에서 제값을 받기 힘들다는 견해에 그는 국제교류에 대해 이런 생각을 밝혔다.

“국립국악원의 4개 연주단이 너무 싼값으로 돌아다니는 거 아니냐는 것도 맞는 말씀입니다. 예술적인 무대에서 공연을 펼친다기보다는 국가 행사의 일환으로 행사 음악으로서 세계를 돌았습니다. 문화부와 외교부에서 정책을 세울 때 국가 공연 기관들을 어떻게 어느 자리에 보내야 우리 문화의 격을 올릴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재)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도 젊은 친구들의 공연을 지원할 때 비행깃값 정도잖아요. 주최 측은 체재비와 연주료 정도 부담하고요. 상대방이 전부 부담하는 초청은 잘 안 이뤄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국립국악원도 연주비, 체재비 정도는 받아내는 시스템에 적응해야 하는 게 맞아요. 국립국악원이 전액 국고 지원받아 외국에 나가는 것은 민간에서 애쓰는 사람들을 굉장히 화나게 만드는 시장 교란 행위예요.”

국립국악원의 20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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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 국립국악원 정기공연 ‘종가(宗家)’ 포스터 (사진출처_국립국악원)

곧잘 세인들은 국립국악원과 국립극장을 비교하는 데서 쏠쏠한 재미를 느낀다. 레퍼토리 시즌제로 주목을 받은 국립극장과 달리 국립국악원은 2013년 좀 밋밋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국립극장의 손을 쉽게 들어준다. 그런데 필자는 그런 국립극장의 모습이 달갑지 않다. 생존 자체가 힘든 순수예술 기반의 공연계에서 레퍼토리 시스템은 상업성을 획득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통로다. 그래서 공연 문화가 일찍 정착한 나라에선 공적자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에서 레퍼토리 공연을 하는 것은 엄격히 제한한다. 오히려 실험적인 것들, 일회성일 수밖에 없는 공연을 하게끔 장려한다. 레퍼토리처럼 일반 관객의 관심을 끌 수 있는 공연은 민간에게 맡긴다. 국립극장이 아무리 빡빡한 예산으로 움직인다지만 민간에선 쉽게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인 한 해 295억 원의 세금이 투입된다. 자생력 없는 민간은 실험성 짙은 작품에 내몰리고, 국립이란 타이틀을 단 공공기관은 상업성 짙은 공연에 재주 있다고 칭찬받는 이런 상황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국립극장은 살이 찔지 모르지만, 공연계는 황폐해진다. 그런 국립극장의 사례가 성공 사례인 것처럼 다른 국공립 공연기관들이 따라 할까봐 내심 불안하다.

김해숙 원장은 연말에 무대에 오를 공연에 전력을 다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취임하기 전 이미 수립된 계획들에도 잔잔한 변화를 주고 있다.

“국립국악원 업무엔 공연이 80% 이상입니다만 교육, 연구, 강습 등 다른 분야도 많습니다. 공연을 제외한 분야는 얼음장 밑에 물이 흐르듯 가시적이진 않습니다. 사회나 학교에서 이루어져야 할 교육들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니 저희라도 능력 범위 내에서 수용하려고 합니다. 예술과 교육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확산 효과, 그런데 급하게 확 눈에 들어오는 이런 거를 당장 말할 수는 없는 것 같고요.”

“음악적 성취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지금 원장 시절에는 가능할 것이다. 라는 기대를 했으면 해요. 제가 그런 변화를 가장 크게 바라보는 곳은 창작악단입니다. 단원들 나이가 젊으니 그들이 하고 싶어하는 음악 욕구가 강할 겁니다. 그렇지만 조직 생리상 꿈을 펼치지 못하고 그냥 담아 두기만 하는 상황이었을 텐데 아마 저는 새로 부임할 감독이 반드시 실행할 수 있을 걸로 봐요.”

2) 조선조 궁중 의식은 예와 악을 일치하여 음악과 함께 진행했다. 제례악(제사), 군례악(거동, 행차), 연례악(연회)이 있다.


“올 한해 예정된 공연으로 상하반기에 정기공연을 4개 단체(정악단, 민속악단, 무용단, 창작악단)가 합니다. 또 기획공연도 있어요. 예전에는 국립국악원에서 조선조 연례악을 많이 했습니다.2) 이미 숙종조 기로연으로 기획공연을 준비했더군요. 그런데 제가 틀었어요. 기로연이라 하는 것은 장수한 신하들을 불러다 놓고 임금이 잔칫상을 차려주는 건데 요즘 세상에는 오래 살까 봐 걱정이잖아요. 120살까지 살아! 이게 저주거든요. (웃음) 전통이더라도 지금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내용으로 연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럼 다른 걸로 하자. 국악원의 네 단체가 뿌리가 되는 공연을 하고, 서울, 지방 가리지 않고 다양한 젊은 국악 연주팀도 참가해 펼치는 음악회를 3, 4일 열자. 그게 제 아이디어예요. 어른들은 변화하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지만 젊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잖아요. 그래서 국립국악원이 가진 전통 음악을 쫙 한번 하고 그 바탕에서 다른 단체들 공연도 한꺼번에 놓고 보면서 정말 저기서 우리가 살려낼 수 있는 국악이나 전통은 뭔가? 그걸 좀 다시 찾아보자. 그게 제 생각이에요. 5월의 기획공연은 이렇게 바뀝니다.”

국립국악원, 균형을 잡고 변곡점에 설 수 있을까?

img2 국립국악원장 취임 초기 김해숙 원장은 언론사 기자 간담회에서 작은 변화들이 없진 않겠지만, 연말에 공개될 음악극에 김해숙표 국립국악원의 모습이 많이 담길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두 달이 흐른 지금 어떻게 진행되고 있을까?

“이순신 장군 관련된 연말 공연이 취임 전인 작년에 이미 얘기되었더군요. 명량대첩에서 거북선 12척으로 133척의 배를 막아내지 못했더라면 지금 우리는 일본인으로 살아야 할 겁니다. 위대한 분입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을 다루려면 거기는 상대편으로 일본이 나와야 하는데 현재 우리 정부와 일본은 냉랭한 관계에 있습니다. 다른 관계에서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말아야 하지만 문화 외교적 측면에서는 가까워질 수 있도록 국립국악원이 방향을 잡아야 할 것으로 봅니다. 그것이 결국 우리의 힘을 키울 수 있는데 도움을 줄 테니 말입니다. 대안으로 실학자 홍대용(1731~1783)을 생각했습니다. 양금 연주법을 만들기도 했던 홍대용이 음악에 대해서 가진 생각은 ‘미(味)’입니다. 그가 음악을 통해 느낀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맛으로 느끼는 감각이거든요. 미(美)는 미(味)다.”

“조선 전기에는 음악을 감각으로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건 예(禮)와 악(樂)일 뿐이에요. 감수성으로 음악을 생각하지 않았단 말이죠. 조선 전기의 음악과 조선 후기의 음악은 그런 점에서 달라진 것입니다. 그 과정에 있던 홍대용이 미(美)는 미(味)라는 것을 내세우면서 음악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관점을 보여줬습니다. 전통음악사에서 너무도 중요한 순간이에요.”

예(禮)와 악(樂)이 중심인 조선 전기의 음악은 통치질서로서의 음악이다. 목적성 짙은 음악이 아닌 원래 모습 그대로를 즐기는 음악으로 바뀌는 변곡점에 서 있는 인물이 남산에 살던 홍대용이다.

“통치질서의 음악이라고 했을 때 국립국악원 입장에선 싫어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흐름을 제대로 봐야 하는 겁니다. 통치를 위해 예(禮)가 있으면 악(樂)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거고 그 악이라고 하는 것은 내 감수성에 의한 악이 아니라고 예를 위한 악이었어요. 그게 예악이라고 하는 겁니다. 조선 전기에는 사회유지를 위해서 필요한 거였겠죠. 그러나 그런 생각이 조선 후기로 오게 되면서 내 감각으로 느끼는 중요성에 눈을 뜨며 생겨난 게 민간음악입니다. 절제된 감정으로 너무 뜨지 않게 하는 게 조선 전기 음악이라면, 후기엔 감정에 기반을 둔 음악으로 스타일이 달라졌지요.”

“조선 전기에 있었던 연례악, 제례 같은 궁중음악을 보존하는 목적으로 국립국악원이 출발했고, 또 거기에 전통과 원형을 두는데 정악단이 담당합니다. 민속악단은 조선 후기 음악을 보존합니다. 두 음악 모두 중요합니다. 현대와 아우를 수 있는 음악에 초점을 두니 창작악단도 만들어졌어요. 그리고 무용단도 만들어졌고요. 결국은 조선 전기와 후기에 있던 전통을 다 흡수하고 앞으로 나아갈 창작음악까지 어찌 보면 완벽한 시스템을 갖춘 그런 국가 기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궁중 음악과 민속 음악에 대한 비중 불균형으로 말미암아 국악인끼리 서로 배척하는 것이 너무 심했습니다. 다 똑같이 우리 전통인데 말입니다. 조선 전기 음악사에 주류를 이루었던 음악(정악)에서 조선 후기의 음악(민속악)으로 이어지는 흐름에선 제각각의 독립적인 장르로서 중요한 겁니다. 무슨 이데올로기 싸움이나 혹은 헤게모니 싸움 그런 것으로 국악을 바라볼 게 아니란 말이죠. 장르별 특색이 있고 역사가 있으니 자기 길을 가면서 현대음악도 들여오는 ‘균형’이 필요합니다.”

당신들의 국악, 우리들의 국악

“2년 임기 중 첫 1년은 큰 그림이 (이미) 그려진 상태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국악원이 기존에 갖고 있던 시스템, 그 자체를 확 뒤집어엎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면 프로그램을 개선해서 대중에게 국악을 선보일까? (대중의 관심을) 끌어올까? 그런 생각 하나하나도 (이런 현실에선) 큰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아쉽게 느껴지는 국립국악원의 완고함은 무관심, 해봐야 안 된다는 낙담이 오랜 세월 퇴적된 것이다. 그 긴 시간 동안 변화를 기대한 이들의 노력이 왜 없었겠는가? 인터뷰 과정에서 원장은 내게 이상주의자라며 농을 건넸지만 실은 본인이 그런 세계관을 담고 있었으리라. 지난 세월 동안 그런 관점에서 추진했던 여러 가지 사업들에서 겪은 좌절이 김해숙 원장의 행보에 거름으로 쓰일 수 있을는지 걱정 반 기대 반이다. 아니 꼭 거름으로 쓰이기를 빈다.

사진촬영_김영탕

필자사진_ 윤시중 필자소개
유춘오는 국악을 매개 삼아 전통이 현대에서 갖는 위상을 탐구하는 잡지 [라라]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전통과 우주처럼 이질적 분야를 연결하는 작업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한 가지 목적을 위해 태어난 기계 수집에 열 올리고 있다. 홈페이지 페이스북 트위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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