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2014년 3월 28일(금) 오전11시/장소:양평군립미술관 관장실

‘문화도시’가 가진 매력적인 수사 덕분인지 지역에 미술관이 우후죽순 건립되기 시작한 지가 한참이다. 하지만 막상 건립 후에는 예산과 인력난, 대중소통 능력부재 등의 문제로, 그 존재감이 문화센터만 못한 경우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양평군에는 양평군립미술관이 있다. 중앙선 청량리역을 따라 양평역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우리를 반기는 양평의 대표적인 기관 중 하나다. 인구 10만 5천명인 군 단위의 지역에 지난 2011년 12월 개관한 이래 지금까지 누적관람객 수 32만 명(2014년 4월 기준) 넘겨, 양평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주목의 대상이 된 미술관이다. 양평군립미술관의 성공은 그래서 이례적이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언급한 관람객수 이외에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문화관광연구원에서 발표한 「2013 지역문화지표 지수화를 통한 비교분석」에 따르면 경기 양평군이 2년 연속(2012~2013)으로, 전국 군 단위 2위에 올랐다. 보고서에 따르면 양평군은 전국단위 229개 기초자치단체 중 23위(상위 10%), 전국 88개 군 단위 기초자치단체 중 2위(상위 2%)에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양평군립미술관이 쌓아온 성과가 이 지표에 큰 일조를 한 것은 물론이다.

양평군에 문화의 온기를 불어 넣은 사람이 있다. 양평군립미술관 초대 관장, 이철순이 그 주인공이다. 차 한 잔 마시러 놀러 왔다가 양평이 좋아 눌러 앉게 됐다는 그는, 예술의전당 공채 1기로 예술경영분야에 첫 발을 내디딘 이후, 예술의전당 초기 플랫폼 구축은 물론 행정과 기획을 종횡무진하며 오늘날의 예술의전당을 있게 한 숨겨진 공헌자다. 뛰어난 개인이 독자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경우는 비교적 종종 찾아볼 수 있지만, 오히려 인 하우스에서 창조적 역량을 발휘해서 무언가를 남긴 인물을 찾기란 정말 쉽지 않는데, 그는 후자에 속한다. 예술의전당에서 그가 한 기획은 그래서 대부분 ‘첫 번째’다. 예컨대, 약관 형식의 계약서 시스템 구축, 월간 [예술의전당] (현 [Beautiful Life]) 창간, 5개년 중장기 프로젝트 기획 최초 실시 등 그가 최초로 구축해 놓은 창조적이고 합리적인 플랫폼 덕에 예술의전당은 안정적인 대중 문화예술 매개처가 될 수 있었다. 합리적인 경영감각, 뛰어난 통찰력과 예술에 대한 감식안은 어디에서나 빛을 발했다. 물론 양평군립미술관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양평군립미술관에 얽힌 속사연과 그의 경영 철학을 물었다.

초대 관장의 좌충우돌 플랫폼 구축기

사진_양평군립미술관 외관 사진_무료로 열리는 '양평의 봄' 미술관음악회 ▲▲양평군립미술관 외관

▲무료로 열리는
《양평의 봄미술관음악회

사진_무료로 열리는 '양평의 봄' 미술관음악회

사진_무료로 열리는 '양평의 봄' 미술관음악회

▲▲양평군립미술관 내부

《양평의 봄전시전에 참여한 이예승 작가의 작품
(사진제공_양평군립미술관)

안대웅 먼저 양평에 미술관이 지어져야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수요나 요청이 있었던 것인가.

이철순 전국에서 인구단위 비율로 보면 가장 많은 예술가가 사는 도시가 양평이다. 그 중에서도 시각예술가가 많이 사는 동네가 이곳이다. 통계가 들쑥날쑥하긴 하지만 1,000명도 산다 한다. 예전에 경기도지사의 시찰이 있었을 때, 다른 지역은 문예회관을 짓는데 여긴 미술관을 지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 특수한 면이 있다.

안대웅 오늘날 ‘지역 미술관 시대’라고 할 만큼 그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지만, 현실에는 미술관 운영에 있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미술관의 성공 요인은 무엇이라고 자평하는가?

이철순 모든 프레임은 처음에 만들어진다. 처음에 잘못 만들어 지면 그 이후에 고치기가 몇 배로 힘들다. 그래서 초대 관장의 역할이 중요하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비전 설정이나 해야 될 미션이 뭔지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구체화하고 실행하기 위한 체계, 이를 위한 예산 확보, 인력문제 등 모든 것을 꿰뚫고 있어야 한다. 근데 미션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예컨데 국립기관은 나라 대표 격답게 운영되어야 하고, 도기관은 도의 대표성을 띠어야 한다. 군이라는 건 죽었다 깨어나도 ‘군’, 즉 이 지역을 벗어날 수 없다. 군민들의 문화향수권 신장은 기본이며 지역 예술가를 위한 활동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도 필수다. 그리고 운영 규칙 제정, 안내원 배치 등 세세한 문제까지 초대 관장이 잡아줘야 한다. 그에 걸맞는 하드웨어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콘텐츠가 있어도 할 수 없다. 이것이 안 되면 결국 빛 좋은 개살구가 된다. 한국의 경우 마스터플랜에 의거해 하드웨어를 구축해야 하는데 그게 아니니까 지었다가 고쳐야 한다. 양평군립미술관도 그런 과정을 거쳤다.
내가 와서 처음 한 일이 ‘개관전’이 아니라 ‘공사’였다(웃음). 미술관을 좀 고쳤다. 용도에 맞게 공간이 되어야 전시를 할 수 있는데 전시장을 보니까 설계를 잘못했더라. 벽면을 석고보드로 만들어 놓아 깜짝 놀랐다. 그래서 설계도면을 재검토해 벽에 합판대고 방염처리해서 소방인증 받는 등 잘못된 점을 찾아 고쳤고 교육시설, 편의시설, 놀이방, 휴게실 등도 갖췄다.


안대웅 그 전에 설계를 주도한 공무원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이철순 그러니까 그 과정이 쉬웠겠나? 예술의전당 (건축)고문을 하셨던 분의 도움을 받아 진행했다. 2011년 5월 준공 공사가 끝났고 그해 6월 6일자로 관장직을 발령받았다. 9월쯤 앞서 전시일정이 잡혀있었는데 박서보, 오광수 선생이 “이것도 미술관이냐” 라고 그랬다. 공무원들이 전문성이 없이 만든 것이다. 그래서 개관 전시가 끝나고 바로 공사했다. (지자체 단체장의) 선거 공약 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문화도시, 관광도시’다. 하지만 그렇게 하려면 예산 뒷받침이 되어야되고, 인력이 있어야 되고, 그걸 담을 수 있는 적절한 용기, 하드웨어가 있어야 한다. 아무것도 없이 문화예술도시를 만든다고 하니 ‘빌 공(空)’아니겠냐. 허공의 메아리인 셈이다. 고맙게도 김선교 양평군수는 전문가를 신임하신다. 오히려 “공무원을 가르쳐라”라고 하신다. 그러니까 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

대중은 다 안다

사진_

안대웅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여기도 적용되는 것 같다. 지금까지는 플랫폼 구축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구체적인 경영 방침이나 사례도 궁금하다.

이철순 예술가는 자기 창작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내가 최고다’라고 하는 게 예술가다. ‘스스로 3류다’ 하는 예술가는 예술가 축에도 못 낀다. 그것은 지역 예술가든 수도권 예술가든 모두 똑같다. 이 점이 바로 예술가의 속성이라 본다. 그러다보니 수요자들과 (예술가의) 간극을 못 메운다. 어떤 미술관의 관장은 원로평론가나 작가가 와서 좋다고 하면 만족해하겠지만 나는 그게 중요하지 않다. 나의 최대 관심사는 많은 시민들이 즐겁게 보고 가느냐다. 문화를 매개하고 소비하도록 하는 것 즉, 효율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문제다.
지금까지의 예술은 생산자 중심이었다. 특히 한국의 미술관들은 생산 중심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술적 가치다. 하지만 예술적 가치를 우위에 두면 보통 사람들은 현대예술은 난해하다고 받아들인다. 예술가들은 무식하다고 무시하고. 그런데 사실 예술가보다 더 높은 지적활동을 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대중과 국민의 소비수준을 예술분야에선 생산자수준에서 너무 무시한다. 현대에는 이런 현상이 있다. 정보가 양방향이 되면서 소비자가 생산자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소비자가 전문 지식인인 경우가 훨씬 많아졌다.
가끔 드는 예인데, 한국에서 음악에 관해 가장 좋은 책을 쓴 사람은 음악학자가 아니다. 약사가 썼다. 요즘은 ‘정보개방시대’이기에 전문가라고 하는 영역이 자기가 전공을 안했어도, 옛날에 도서관에서 한 달에 한 꼭지 찾을 시간에 리얼타임으로 레퍼런스로 달아서 볼 수 있는 시대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현대에 모른다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옛날의 지식 개념과 다르다. 국민의 눈높이에 맞춘 기획과 예술적 가치라는 것이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면 안 된다.


안대웅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지역 이익단체들의 압력 같은 것은 없었는가. 있다면 어떻게 해결하는지 궁금하다.

이철순 보통 미술관이 오픈하면서 뭘 하나? 하면 지역 원로작가 전시를 하게 된다. 그런데 양평군립미술관의 경우, 국내의 대표적인 현대미술작가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전시 제목은《마법의 나라, 양평이다. 얼마나 황당하냐. 저렇게 문패(전시 제목)를 단 것을 못 보지 않았나?(웃음) 뚱딴지같은 짓을 하는 거 아닌가 싶지만 여기서 필요한 경영감각은 균형이다. 예술협회 같은 단체는 종종 이익단체가 될 때가 있다. 개관전이라 했는데 지역작가 쏙 빼고 전국적으로 한다고 하면 매 맞기로 작정한 거지. 그래서 아예 한 섹션을 1945년 이전에 활동한 양평출신작가 코너를 따로 만들었다. 이게 문제를 피해나가기 위한 경영전략이다. 불만은 있겠지만 다음 차례는 당신이라는데 하면 참는다. 현재 현대미술 전시와 지역작가 시화전을 동시에 열고 있는데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놓인 공공미술관

사진_이철순

안대웅 펀드레이징은 어떻게 하나? 요즘 트렌드가 ‘미술관 재정자립’이다. 각종 문화예술 관련 예산도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이철순 택도 아닌 소린 게, (미술관의) 재정자립은 어떻게 하냐고 묻는다. 난 예산을 더 따겠다고 한다. 재정효율성과 자립도를 묻는 거 자체가 신자유주의 경제다. 재정자립하란 소리는 미술관을 수익자 부담 원칙에 의한 사적 재화로 바라보는 것이다. 예산을 더 따겠다고 하는 건 공공성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기업 후원을 언급하는데, 현실을 말하자면 이렇다. 공공미술관이 전체 예산에서 몇 퍼센트를 기업협찬을 받으며 오고가는 이야기들이 바로 ‘입도선매 선단체 구매’다. 그게 무슨 후원인가. (기업이) 표를 미리 사라는 거다. 기업은 절대 손익 계산에서 밑지지 않는다. 표 몇 장에 얼마해서, (기업이) 1억 원을 내면 그들은 1억 원을 다 가져간다. 1억 원의 협찬과 공공성의 훼손의 정도를 놓고 비교하자면 사실 협찬으로 잃는 것이 더 많다. 경험에 의하면 기업체에 가서 1억 원을 얻기 위해서 활동하는 것보다 군이나 공공기관 등 유관기관과 관계 맺는 게 훨씬 쉽다.
다시 돌아가서, 원래 기관을 지으면 건립비의 10%를 적정 운영비로 받는다. 그런데 해보니까 턱도 없이 부족하다. 내 경험으론 20%가 적정하다. 그래야 잘 돌아간다. 그런데 건축을 하는 사람들이나 정치가들은 200억 원으로 지으면 끝인 줄 안다. 하지만 사실 20억 원이 매년 들어가는 것을 계산하지 않는다. 왜 자꾸 돈이 들어가냐고 묻는데 200억 원을 지었으면 사실 40억 원이 매년 들어가야 된다.


안대웅 옳은 말씀이다. 예술경영을 공부하고 희망하는 후배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인 것 같다. 예술경영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 달라.

이철순 첫째, 똑똑하고 냉철해야 한다. 여기는 절대 폼 잡는 데가 아니다. 펀드레이징이라는 것 자체가 방법적으로, 도구적으로 후원을 따내는 것일 뿐이다. 특히 한국은 미국과 사회구조나 배경이 다르다. 미국에서 왜 기부를 하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한 가지다. 세금혜택을 받으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 기업에선 최고의 방법이다. 카네기처럼 미국의 대재벌이 왜 (문화)재단을 만들었겠나? 악명 높은 악덕기업주이지 않았느냐. 그런 배경도 모르고 어설프게 예술경영학을 배워서 자꾸 손 벌려 펀드레이징, 외국 사례를 언급하면 국내 사례와 잘 맞을리 없다. 예컨대 양평에는 기업이 하나도 없다. 상수원 보호지역이다(웃음). 더 하고 싶은 말은 문화예술계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허상을 자꾸 만들어주니까 실망도 많이 하고 적응도 못하고 그러는 것 같다. 현실을 직시하고 정확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 분야의 일이 공공성을 추구하려고 해도 최소한 문화예술경제학적 이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기초다.



이철순/이철순은 고려대학교 재료공학과 사회학을 공부한 이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예술경영학 전문사 과정을 거쳐 고려대학교 행정학 박사과정까지 수료한 융복합 인재다. 예술의전당 공채 1기로 25년 재직 중 ‘한국의 소리와 몸짓’, ‘한국 강의 혼과 예술’ 등 5개년 사업과 ‘예술의전당 10개년 중장기 사업’을 기획·총괄했으며 월간 [예술의전당(현 뷰티풀라이프)] 창간 작업을 맡았다. 경기 양평군 서종면 주민으로서 문화모임 ‘서종사람들’의 일원이기도 한 그는 <우리동네 음악회>를 2000년부터 기획했다. 현재 양평군립미술관 초대 관장으로서 지역 문화 융성에 힘쓰고 있다.
필자사진_안대웅 필자소개
안대웅은 월간 [퍼블릭아트]의 기자이자 웹진 [똑똑talk talk 커뮤니티와 아트] 편집자이다. 비평모임 &lsquo;유능사&rsquo;의 일원이기도 하다. 국민대학교에서 회화와 미술이론을 공부했으며, 경기창작센터와 경기도미술관에서 어시스턴트 큐레이터를 거쳤다. 대안 공간에서 몇몇의 조그마한 기획을 하기도 했다. &lsquo;재밌는 일이 없을까&rsquo; 맨날 궁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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