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예술방담’의 밤이 시작됐다. 올해 예술방담에서 가장 비중 있게 논의되었던 것은 공연예술계의 정보와 담론을 담아내는 ‘플랫폼’에 대한 것이었다.《씬플레이빌》,《더뮤지컬》, 웹진《연극in》의 세 편집장들이 함께했던 첫 번째 시간에 이어 “우리를 대체 뭐라고 부를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두 번째 시간이 시작됐다. 앞선 방담이 생산된 담론들과 정보들을 ‘어디’에 모으고 안착시킬 것인가를 고민했다면, ‘우리를 대체 뭐라고 부르겠느냐?’고 묻는 두 번째 시간은 그 담론의 생산자들은 ‘누구’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방담의 패널이었던 김슬기와 정진세는 공연예술계에서 주로 ‘글’로 활동하고 있다. 해당 분야에서의 경력이 10년을 향해 감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여전히 젊은 필자다. 생물학적으로 본다면 이제 고작 30대 중반에 불과한 이들을 젊다고 하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공연계라는 공간에서 담론을 생산하고 이슈를 이끌어내는 존재로의 그들을 칭하는 호칭으로서 ‘젊은’이라는 수식어는 그 앞에 ‘아직’이라는 부사를 감추고 있을 때가 많다. 그들은 여전히 ‘시작’하는 단계다. 그들은 도리어 ‘나는 젊지 않다’고 항변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개인으로서의 항변을 대신하여, 함께 모여 ‘젊음’에 대한 능동적인 해석을 시작해나갔다. 젊기 때문에 기다려야 하고, 젊기 때문에 판단에서 배제되었던 또래의 창작자들과 또래의 평론가들이 서로가 서로를 인식하고 연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슬기와 정진세는 그 연대의 과정 그리고 이들 세대가 가지고 있는 공연예술계의(필자로서의) 문제의식을 관객과 공유했다.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글쓰기와 새로운 글쓰기 환경(매체)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사회를 맡은 송현민 음악평론가 역시 같은 세대의 필자로서 간혹 목소리를 더했다.

젊은 필자들 ‘환승’을 택하다

이 젊은 필자들이 처음으로 뜻을 모아 한목소리를 냈던 것은 한 해 전인 2013년이다. 그 연대의 결과물로 나온 것이 『환승+극장』(2013, 프린지)이었다. 『환승+극장』이란 여섯 명의 (이를테면) 평론가와 여섯 명(팀)의 예술가가 일대일로 만나, 평론가들로 하여금 예술가들의 지금까지 작업을 돌아보고, 기록하고, 읽어내도록 했던 책이다. 이 책에서 연구의 대상이 되었던 예술가는 극단 걸판, 양손프로젝트, 크리에이티브 바키, 다페르튜토 스튜디오, 코끼리들이 웃는다, 차지량이며 이들은 각각 김슬기, 김나볏, 김민관, 엄연희, 정진세, 전강희와 짝을 이뤘다. 이들은 모두 30대다. 이 책의 탄생은 같은 세대의 창작자와 필자들에게 용기를, 선배 세대에는 자극을, 후배들에게는 희망을 주었다. 또한 많은 이들에게 박수를 받고 부러움도 샀다.

무엇보다 그들이 스스로 자력을 인식하고, 앞으로 나아갈 동력을 얻는 계기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좁은 풀에서 낮게 헤엄치며 생존해오던 개인들이, 자기 세대의 고민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함께하기 시작했다. 여기서의 연대는 단순히 또래끼리의 모임이라기보다는 평론가와 평론가 사이의 연대, 평론가와 창작자 사이의 연대까지도 아우른다. 필자들 스스로가 자기 지면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첫 번째 움직임이었다. 그러기 위해 기존의 비평, 평론이 시도하지 않았던 것들, 선배들이 놓쳐버렸던 부분들을 먼저 고려해야 했다. 송현민 음악평론가는 어느 세대나 그들의 경력 초반에 지금 우리와 같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라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세대교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이 시대의 필자들은 더 이상 종이 위에 남겨지는 텍스트를 써내는 사람만이 아니다. 오늘날의 평론가와 비평가를 번역한다면 크리틱(Critic)보다 콘텐츠 프로바이더(Contents provider)에 더 가까울 수 있다. 그런 그들이 필연적으로 떠올렸던 고민은 ‘앞으로의 글쓰기와 글쓰기 환경’이었다.

매체의 자기 몸 전환과 젊은 필자들의 정체성 변환

이들의 선배 세대가 원고지에서 글쓰기를 시작했다면, 이들은 웹에서의 글쓰기를 시작한 세대다. 정진세는 그것을 자신과 그 앞 세대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라 생각한다. 따라서 그의 관심은 웹에서만 가능한 글쓰기를 실험하고 발견하는 것이다. 유튜브로 올리는 영상 공연 후기나 원미닛크리틱 등 활자를 벗어나는 웹 글쓰기(말하기)가 나타나리라 기대한다. 간단하게는 이모티콘의 사용에서부터 리뷰, 영상, 만화에 이르기까지 과거에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방식의 리뷰와 크리틱이 등장할 것이라 예견한다.

반면, 김슬기의 글쓰기는 같은 세대인 정진세와 달리 지면에서 시작됐다. 월간 《한국연극》의 기자로 처음 글쓰기를 시작했을 무렵은 아직 공연계에 웹진이 등장하기 전이고, 기관에서 발행하는 뉴스레터가 전부였다. 그 후로 몇 년이 지나면서 매체 환경이 변화했고, 오프라인 매체의 한계를 하나씩 실감하게 됐다. 지금은 오프라인 매체가 온라인 매체의 수를 넘어섰다.

궁극적으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의 결정적인 차이는 ‘웹에서의 글쓰기’에 대한 신뢰의 정도다. 김슬기가 “나는 웹에서의 글쓰기를 믿지 않는다.”라고 밝히듯, 새로운 글쓰기에 대한 생각도 완전히 같지 않다. 웹의 특징은 지면과 달리 지속적인 수정이 가능한 점일 텐데, 그 특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매체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미 수많은 정보가 있고, 그 이상을 전달하는 매체가 온라인과 오프라인에 넘쳐난다. 젊은 필자들은 더 이상 정보를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그들이 평론이나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쓰는 일도 드물다. 그렇다면 이들이 쓰는 글들은 도대체 무엇이라 불려야 하는 것일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평론이나 비평의 의미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보았다.

정진세는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공연예술계의 글쓰기가 이 커뮤니티를 소통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한국 연극계의 글쓰기는 제대로 된 소통을 오히려 방해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그의 글쓰기에 대한 고민은 20대 때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20대의 그는 독자에 관계없이 매끈하게 읽히는 글을 쓰기 원했지만, 지금은 ‘관객’이라는 분명한 타깃이 생겼다. 관객이란 누구며, 관객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일지 고민하며 쓴다. 관객이 대답할 수 있는 글쓰기, 글을 읽는 수신자가 이 글의 필자가 나를 호명하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글쓰기를 지향하고 있다.

관객 지향적 글쓰기를 해야 한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김슬기가 보다 더 고민하는 것은 창작자와의 거리 문제다. 기존의 비평들이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해 창작자와 거리를 두고, 바깥에서의 글쓰기를 많이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그와 반대로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창작자와 소통하고 그들과 맞닿아 있을 때 더 적확한 글쓰기가, 논리적 비평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이는 애초에 객관적 글쓰기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생각일 것이다. 두 번째로 그녀가 시도하고자 하는 것은 메타비평이다. 평론가들끼리의 연대라고도 할 수 있는데, 하나의 글이 생산된 그 지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글에 대한 새로운 비평과 논의들이 이어질 수 있는 환경을 꿈꾸고 있다.

순환이냐 평행이냐

예술도 평론도 누가 살아남고, 누가 죽느냐 혹은 누가 기억되고 누가 잊히느냐의 문제를 고민하는 것은 상생의 발전과 생존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서로에게 자극이 되는 좋은 파트너로 남아야만 함께 성장하고 생존하는 하나의 예술-세대를 이룰 수 있다.

시간상의 문제로 짧게 언급되고 말았지만 두 사람은 몇 동지들과 함께 ‘비평의 틈새’를 여는 새로운 플랫폼을 기획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야기 나눴던 공연예술계 안에서의 글쓰기와 글쓰기 환경에 대한 고민을 새롭게 만들어질 플랫폼에서 시도하고 실현하고자 한다. 앞선 방담에서 이야기했던 공연계 담론의 나루터가 관객으로서 공연에 다가오고자 하는 이들에게 정보와 더불어, 조금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전달함을 목적하고 있다면, 이들이 기획 중인 플랫폼은 필자인 나와 창작자, 필자와 또 다른 필자, 창작자와 관객, 필자와 관객을 연결하는 적극적인 ‘담론의 판’을 펼치는 것에 보다 힘 있게 방점을 찍고 있다. 메타비평, 자유로운 수정, 구매 후기식의 공연평 등, 새로운 비평적, 평론적 시도들이 새로운 플랫폼에서 실현되도록 할 것이다.

한 세대는 그 세대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 지금 이들은 그들의 세대로서 어떤 일을, 어떤 글쓰기를 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다. ‘우리를 뭐라 부르겠느냐’는 물음은 질문을 외부를 향한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는 무어라 불려야 마땅할까’라는 자기 존재에 대한 탐구, 그들 내부로 던져진 숙제이기도 하다. 공통된 문제의식으로 연합한 이들이 환승한 역은 내부 순환선일까 또는 새로운 노선일까. ‘너희는 무어라 불리길 원하는가?’ 이것이 그들이 던진 질문에 응답하는 최초의 반응이다.

허영균 필자소개
허영균은 LIG 문화재단 계간지《interVIEW》의 에디터와 공연 창작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재)국립극단 학술출판팀 에디터,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아예술극장 프로그래밍 코디네이터로 근무하며 프린지페스티벌, 다리 인큐베이팅, 하이서울페스티벌 등을 통해 창작활동을 지속했다. 현재는 예술-공연예술 출판사 1도씨를 운영하고 있다. 기록과 창작을 병행하며, 공연예술을 공연의 외부로 끌고 나가는 것이 최근의 관심사다.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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