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관리 전문가가 경영학과 학생들을 상대로 한 ‘항아리에 돌 채워 넣기 실험’을 생각해본다. 큰 돌 사이사이를 채워나가는 자갈과 모래에서 자투리 시간 활용의 중요성을 강조할 줄 알았더니, 큰 돌을 채우지 않으면 자갈과 모래를 채울 수 없으므로 각자 인생의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그 우선순위에 맞춰 나의 시간 계획은 수립되었는지 성찰하라는 일화 말이다. 무엇을 경영하든 효율, 관리 편의성, 경제적 가치에 함몰되어 빈틈을 채우는 데 급급한 것이 아니라, 경영의 본질과 철학이라는 큰 줄기를 먼저 세우라는 깨달음이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예술경영적 관점에서 접근하면 어떨까? 예술과 경영이라는 길항 관계의 두 질료로 만들어진 항아리 속을 먼저 채워나갈 큰 돌들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일까?

이는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 대구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을 취재하고 난 뒤, 필자에게 주어진 질문이었다. 사실 예술영화전용관뿐만 아니라, 이런 종류의 예술 공간 운영은 누가 해도 힘에 부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방만한 경영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요즘 시대의 경영 논리에 반(反)하는 철학으로 세워진 공간이기 때문이다. 왜 이 공간들은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키려는 것일까? 대답은 “우리가 이 영화들을 상영하지 않는다면, 영화·지역문화 생태계는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라는 각오였다.

이름을 뭐라고 짓든 우릴 ‘신영극장’이라 부를 것이다
–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

2011년 가을, 강릉시네마테크 운영진이 신영극장에 도착했을 때, 극장은 옛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었다. 지역 예술독립영화 관람 문화 조성을 위해, 10년 넘게 고정 영화상영공간이 없이도 80일 이상 예술독립영화를 상영하던 그들의 노력은 이 잠자고 있던 공간과 조우한다. 재개관을 준비하면서, 운영진은 극장 이름을 무엇이라고 지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이름을 뭐라고 하든 어차피 강릉 사람들은 여길 ‘신영극장’으로 부르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닿는다. 그렇게 신영극장은 2012년 5월 '강릉독립예술극장' 이라는 정체성을 앞에 달고 다시 태어났다. 공간 성격은 변화했지만, 신영극장의 원래 모습은 극장 곳곳에 남아있는 것이다.

신영극장은 지역 후원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는 극장이었다. 초기 자본으로 대출한 돈들이 대부분 장비 마련, 공간 방염 등으로 다 들어가느라 공간 보증금을 마련할 수 있는 방법은 후원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6년 강릉시네마테크 설립 때부터 꾸준히 활동해 온 정회원 및 후원회원, 정동진 독립영화제와 극장 개관을 통해 후원을 시작한 사람들의 힘으로 개관이 가능했다. 물론 영화를 자주 보러 오거나, 심지어 “영화에 원래 관심이 별로 없었는데, 이런 극장은 지역에 필요한 것 아닌가?”라고 해서 후원하는 분들도 있다고 한다.

▲ 신영극장은 “나는 주인이다”라는 좌석 후원제를 비롯해 다양한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다

숫자의 의미

신영극장은 개관 3년 만인 2014년, 당해 관객 1만 명을 돌파했다. 5,000만 인구 중에 1,000만 명이 한 영화를 보는 시대에, 강릉 인구의 5%가 극장을 찾은 셈이라는 박광수 프로그래머의 자부심에는 그러나 근심 또한 섞여 있었다. 유료 관객 1만 명으로는 극장 유지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의미 있는 숫자가 금전적 가치로 환원되는 순간, 의미는 소멸됐다. 하지만, “금전적 어려움과, 우리 극장에서 하는 영화를 아끼고, 찾아 주고, 극장이 사라지지 않았으면 하는 관객들에게 고마워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박 프로그래머의 의지에서, 필자는 ‘그만큼 영화관이 지역민들과 의미 있는 소통을 하고 있다는 증거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SNS를 활용한 극장 홍보와 금년 행사 기획은 무엇을 준비하는지 질문했다.

그랬더니 "SNS를 비롯한 온라인 홍보는 큰 도움이 못 된다"고 대답했다. 오히려 강릉 시내 40군데 정도 카페에 영화 시간표 전단을 배치하는 것이 더 큰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극장 있으면 좋으니까'하며 협조하는 카페들이 많다는 것이다. 금년은 어떤 행사를 기획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계획 없다’는 단호함이 돌아왔다. 매년 5월에 개관 특집 프로그램을 하는데, 작년에 행사를 크게 치르느라 무리를 해서 자금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많은 관객들이 행사를 찾아 즐기고, 행사로 인해 예술독립영화에 대한 지역민들의 관심은 더욱 높아졌지만 그건 그냥 그 뿐이라는 체념은 곧 운영자의 번민이었다. 같은 숫자를 논하는데도, 그것을 어디에 적용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완전히 변해버리는 상황 앞에서 필자가 준비해 간 질문들은 모두 소용없었다.

▲ 신영극장 매표 데스크와 로비 모습. 극장에 비치된 DVD들은 후원금을 통해 구입한 자료이므로, 회원이라면 누구든 빌려갈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재밌다

솔직히 프로그램 기획할 때, ‘사람들이 이 영화 모르겠지, 관심 가질까?’ 하는 속상한 생각이 먼저 든다. 실제로 그렇다. “이게 뭐지?” 하는 관객들이 더 많다. 하지만 인원수 상관없이, 반응을 해주면 희열이 있다. 실패해도 계속 기획전을 시도하는 늪인 셈이다. 그래서 지금은 지치지 않을 정도, 관객들이 심심해하지 않을 정도로 소통이 되고 있다.

신영극장은 관객들에게 입장권을 제공한다. 티켓 모으는 사람들을 위해 입장권을 만든 것이다. 그렇기에 “어, 입장권 바뀌었네요?”라는 관객들의 알아챔은 데스크 운영진들과 영화 및 공간에 대한 대화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발화점이다. 티켓이 영수증으로 대체되는 시대에 찾아보기 드문 풍경인 셈이다.

그런 작은 부분들을 알아주고 즐겨 주는 모습이 신영극장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다. “마치 박수를 치듯 서로 주고받는 것이 조금씩 늘어나는 게 보인다.”는 박 프로그래머의 대답은 미담에 대해 시종일관 회의적 모습을 보이던 그를 웃게 만들었다. 괄목할만한 증가세는 아니지만, 체감할 수 있는 변화를 직감할 수 있다는 대답은 공간 운영자로서의 사명감으로 이어졌다.

공간 운영 지원이 공간의 운명을 좌우한다?

안태훈 결국 이 모든 것의 전제 조건은 안정적 공간 지원에 있지 않나?

박광수 사실, 지원 사업이 끊기면 극장이 망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래야 지원 사업의 필요성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있다. 하지만 신영극장은 그렇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영극장이 문을 닫으면 제일 먼저 피해 볼 분들이 우리 극장 단골들이기 때문이다. 극장이 포기하면 극장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후원해주던 회원들의 기대와 사랑, 예술영화 상영 문화와 커뮤니티도 함께 죽는 것이다. 물론, 극장에 한 번도 안 오셨던 분들은, 그 극장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지원금이 필요한 이유는 운영하는 사람들이 엉망으로 운영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진짜 잘 운영해도, 필연적으로 이 시장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예술영화전용관이라는 것이 애초에 시장 역행적 발상이기 때문이다. 독립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영화들, 멀티플렉스에서 제대로 상영되는 영화들이 없다. 영화가 나빠서가 아니라, 돈이 없다 보니 아무도 그 영화를 몰라주는 것이다. 살아남기 정말 힘들다. 하지만 예술영화전용관이 있어야 이 영화들이 관객들에게 선보일 수 있는 것이기에 지원 사업의 존재 이유가 있는 것이다.

힘들어도 계속 하고 있으면,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지금 문 닫으면 그 기회가 그냥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영화관 개관할 때, 최소 5년만 버티자는 생각이었다. ‘왜 지금까지 잘 안 됐는가’라는 노하우가 생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근데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난 건 '버틸 수 있는', '버텨내고 말겠다'는 근성이다.

여기, 독립영화상영관 맞아요? - 대구 오오극장

대구 국채보상로길 어느 빌딩 1층에 위치한 오오극장은 대구경북독립영화협회, 대구 민예총, 미디어 핀다라는 세 단체가 주축이 되어 지난 2월 11일에 개관한 55석의 단관 독립예술영화관이다. 예술영화전용관이 채 소화를 못하는 독립영화 상영은 물론, 지역에서 제작되는 독립영화 상영 비중을 높여야겠다는 것이 개관 배경이다. 일반적으로 예술영화전용관들이 휴·폐관된 과거 극장들을 리모델링한 형태로 개관한다면, 오오극장은 젊은 감각이 반영된 신축 공간이다. 상영관 옆에서 운영되고 있는 카페 ‘삼삼다방’은 오오극장의 매표소 역할도 겸하고 있는데, 이는 커피 한잔 마시러 지나가던 일반인들이 카페에 들어왔다가 “어 여기 영화관이 있네?” 하고 자연스럽게 오오극장을 둘러볼 수 있게 만드는 효과를 내고 있었다.

카페와 영화관, 단순하면서 명료한 두 공간의 공존은 방문객들의 자연스러운 동선을 유도한다. 카페에 들어오면 영화관 벽면에 새겨진 공간 설립 배경과 공간 운영 철학에 관한 선언들이 시각적으로 잘 들어오도록 설계돼 있다. 방문객은 그 문구들을 찬찬히 읽어보고, 이번 주에 어떤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하고, 흥미가 생기는 영화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카페 매표소에서 표를 구입한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기 전까지 카페에 앉아 차를 마시며 영화를 기다린다.

▲ 대구 오오극장 까페와 로비 모습(사진제공: 대구 오오극장)

이는 접객 공간뿐만 아니라, 영화관 운영자들의 사무 환경을 밀도 있게 만드는 데도 기여하고 있었다. 카페 안에 있는 사무실은 업무 공간이자 또한 영사 공간이기도 하다. 영사 장비가 디지털이므로, 과거처럼 영사실에 인원이 상주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사무-접객-영사 공간의 일원화는 업무의 효율뿐만 아니라, 최소 인원이 다양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조직돼 있었다.

하지만, 오오극장을 주목해야 하는 결정적 이유는 바로 예술영화전용관 최초로 ‘협동조합’ 운영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간이 만들어지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부터, 협동조합 운영을 위한 구체적 밑그림과 이를 통해 성취하려는 목적은 무엇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최태규 오오극장 운영팀장과의 인터뷰는 이런 궁금증에서 진행되었다.

협동조합 운영은 지역 독립영화 제작, 상영 문화의
자생력을 위한 밑거름

안태훈 협동조합 운영 계획은 지역 커뮤니티성에 대한 고민의 산물이겠지만, 동시에 관심과 우려를 함께 낳았다.

최태규 일단 ‘협동조합이 과연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조합원들이 점점 불어나 모든 조합원들이 표를 행사하게 되면 체계가 매우 복잡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의 조합원 체계’로 운영하려 한다. 각 그룹의 대표자가 조합원으로 참여하여 공간 운영, 프로그래밍, 행사 계획, 지역 독립영화 제작 지원 등의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커뮤니티 시네마’가 이런 맥락이다. ‘이런 영화를 보고 싶다’, ‘지역에서 제작된 영화 상영이 필요하다’는 요구에 대해 나름의 조합원 체계를 갖춘 프로그래밍 팀이 모여서 이러한 요구를 최대한 반영하는 것이 골자다.

안태훈 협동조합 지향은 그만큼 국가 지원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의지인가?

최태규 지역민들의 문화 향유를 확대하는 지원금제도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지역 독립영화 관람 문화 확산, 지역 제작 독립영화 및 상영이라는 가치가 지원금이 사라진다고 동시에 사라져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원금이 없어도 생존이 가능할 수 있는 자금 체계와 마케팅 전략이 항상 준비돼 있어야 한다.

안태훈 지역 독립영화 제작·상영을 지원한다는 계획은 이 극장의 가장 큰 특징이라 본다.

최태규 무엇보다 지역의 한계를 계속 경험한 지방 제작 인력들이 자꾸 서울로 유출된다. 어느 경지에 올라서면 ‘여기서 더 할 것 없다’는 식으로 말이다. 영화를 만들고 트는데, 기반 지역으로 인해 여건이 더욱 안 좋다는 얘기는 더 이상 나와서는 안 된다. 지역 독립영화전용관은 당연히 지역독립영화를 품어야 한다. 그것은 상영관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안태훈 예술영화관들은 대부분 옛 영화관을 리모델링해서 개관하지만, 오오극장은 아예 새로 개관했다.

최태규 2년 전부터 개관 계획을 세웠고, 작년 9월에 이 공간에 계약을 했다. 근대 건축물 리노베이션을 통해 개관하려 했지만, 많은 시행착오로 중간에서 접어야 했었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정말 발품 팔아 좋은 공간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괜찮은 조건에 1층 공간이 나왔다고 연락이 왔다. 기본 설계도, 설립 법령, 소방법부터 심지어 공사비를 줄이기 위해 배선 매립, 바닥 마감, 상영관 의자 설치 등 거의 모든 작업을 자체적으로 진행했다. 상영관 의자도 구한 것이다. 경기도 모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마침 의자를 교체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연락해서, “어차피 폐기 처분할 것 같으면 고치고 닦아서 우리가 감사히 쓰겠다.”라고 해서 받아왔다. 운송비만 들어간 셈이다. 비용은 절감하되, 갖출 것은 모두 갖춘 공간이 나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 여기에 있다.

안태훈 운영 노하우나 지역 공동체를 위한 공간 조성 연구를 오래 고민한 흔적이 엿보여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어디로 우리가 성장할지 모르는 영화관”이라는 구호가 인상적이었다.

최태규 카페 차리고 표 팔아 장사하겠다는 생각으로 나온 공간이 절대 아니다. 연구하고, 운영하면서 앞으로 생길 문제점들을 계속 수정해나갈 것이다. 예술적 의미의 공간 당위성과, 경영적 의미로서의 공간 운영의 상반 관계를 어떻게 극복할지 고민해야 하는 시점은 확실하다. 지역 문화생태계에 녹아들면서 공간 자생력을 키워나가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