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재)예술경영지원센터 센터스테이지코리아(Center Stage Korea), 주헝가리 한국문화원, 한국문학번역원의 후원으로 루마니아 클루지(Cluj), 헝가리 부다페스트, 체코 플젠(Plzeň) 및 프라하에서 <모두를 위한 피자>(김황 연출) 동유럽 투어를 진행했다. 고작 20일 동안이었지만 직접 보고 경험한 동유럽의 축제와 투어 짬짬이 방문했던 공간을 소개하고자 한다.

동시대를 바라보는 냉철한 무대

굳이 번역하자면 시간예술축제 정도의 의미를 지닌 페스티벌 탕 디마지(Festival Temps D’Images)는 프랑스와 독일이 함께 설립한 유럽 문화 예술 공영 채널 아르테(ARET)가 2002년 창설한 페스티벌로 프랑스, 독일, 루마니아, 헝가리, 포르투갈, 캐나다에서 각각 개최되는 페스티벌 네트워크이다. 각 국가별로 주최 기관의 성격이나 연간 테마는 상이하나 기본적으로는 영상이나 미디어 기술을 예술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들이 가진 파급력과 효과성을 공연예술과 결합시켜 긴 생명력을 가진 예술, 사회와의 연결이라는 미션을 실현한다.

그중 루마니아 에디션이 열리는 클루지 나포카(Cluj-Napoca)는 전통적인 교육의 도시로 대학생 인구 비율이 높고 헝가리 민족이 인구의 다수를 점하는 다문화 도시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클루지 나포카는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에 버금가는 문화 도시이자, 오히려 젊고 실험적인 시도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2008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는 클루지 페스티벌 탕 디마지(Festival Temps D’Images in Cluj)는 연극, 무용, 영상 중심의 현대 예술 축제로 민간단체인 현대 예술 기획·제작 그룹 컬렉티브에이(ColectivA)가 주최한다.

올해 페스티벌은 11월 6일부터 16일까지 ‘누가 밥을 주나(What feeds us?)’를 주제로 개최되었다. 실제로 먹거리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전면 배치되었는데 ‘밥’이 곧 생존을 의미하며 결국은 사회·경제 시스템을 겨냥하는 슬로건이라는 점을 쉽게 연상할 수 있었다. 지역적인 부분과 예산상의 이유로 해외 프로그램은 주로 동유럽 지역(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에 집중되었지만 올해 처음으로 <모두를 위한 피자>를 초청하면서 프로그램 영역을 아시아로 확장했다. 이 페스티벌에는 공연 외에도 국내외 젊은 공연예술 예술가나 기획자들을 초청하는 프로그램도 동시에 진행하고 있어 특히 동유럽권 네트워크 거점으로서의 장점을 가진다.

젊은 현대 예술의 거점답게 페스티벌 후반 프로그램은 자국의 젊은 예술가 플랫폼으로 구성, 쇼케이스는 물론, 예술가 간의 대화와 토론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올해 루마니아 아티스트 플랫폼은 ‘과거는 죽었는가(Past is dead?)’라는 주제로 이루어졌다. 이들 공연 작품은 물론 플랫폼, 토크 세션 등은 89년 공산 독재 정권이었던 차우셰스쿠(Ceauşescu) 정권을 무너뜨렸지만, 부패가 여전히 만연한 정치와 사회적 혼란에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예술적 관점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페스티벌이었다.

있는 그대로의 시선을 무대로, 악센트페스티벌

체코의 ‘악센트 페스티벌’(Akcent Festival)은 프라하에 소재한 현대 공연예술 극장인 아르하 시어터(Archa Theatre)가 2010년부터 개최해 온 페스티벌이다. ‘아르카’는 ‘노아의 방주’라는 의미로 ‘홍수로 물에 잠긴 건물을 리노베이션하다’, ‘다양한 예술로서 사회를 지탱한다’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 이름이다. 아르하 시어터는 체코에서 처음으로 1991년 공모를 통해 예술감독을 선임하여 프로그램과 경영 전권을 맡긴 극장(국내에는 아르하 극장으로 알려져 있다. 글 맨 아래에서 관련 기사 링크를 확인할 수 있다)으로 현대 공연예술과 사회의 관계를 미션으로 내걸고 있다. 악센트 페스티벌은 이러한 극장의 지향과 뜻을 함께하는 독일의 쉬쉬팝(She She Pop), 중국의 리빙 댄스 스튜디오(Living Dance Studio), 뉴욕 팔리시모 컴퍼니(Palissimo Company), 벨기에 헷 킵(Het Kip) 등 해외 유수의 컨템퍼러리 공연을 집중적으로 소개해 온 플랫폼이다.

▲ 아르하 시어터 입구

올해 다섯 번째를 맞은 악센트 페스티벌은 ‘다큐멘터리 연극(documentary theatre) 페스티벌’의 표방이라는 큰 변화를 자처했다. 연출가이자 페스티벌 예술감독인 야나 스보보코바(Jana Svobocova)는 이러한 변화를 “예술과 사회 간 역할을 끊임없이 탐색해 온 페스티벌의 자연스러운 귀착”이라고 이야기한다. 올해 페스티벌의 경우에는 ‘전쟁 전? 전쟁 후?(Before the war or After the war?)’를 테마로 여러 작품들을 선보였다. 어머니들과 딸들이 함께 무대에 올라 일상과 역사를 회고한 쉬쉬팝의 <봄의 제전(The Rite of Spring)>, 아르헨티나의 비전문 배우들이 무대에서 자신과 가족 이야기를 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76년 아르헨티나 군사 쿠데타의 피해자와 가해자 자녀로 연결된 관계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롤라 아리아스(Lola Arias) 연출의 <이후의 삶(My Life After)>, 체코의 한 마을에서 독일인 집단 학살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 펍(pub)을 무대로 옮긴 체코 연출 이리 하벨카(Jiri Havelka)의 <브라스밴드(Brass Band)>, 중국 밀수 루트를 통해 남북 젊은이들의 소통을 꾀한 김황의 <모두를 위한 피자> 등이 소개되는 한편, 현재 진행형인 다양한 형태의 동시대 ’전쟁’과 예술의 개입 방식에 대한 토론, 다큐멘터리 영화/공연과 현실 간의 관계를 묻는 라운드 테이블 등이 열렸다.

▲ 악센트 페스티벌에서 김황의 기자 간담회 모습(왼쪽)과 롤라 아리아스의 <이후의 삶>공연 중(사진 출처: 악센트 페스티벌 홈페이지)

연대를 조장하는 공간들

▲ 뮈시 내부

<모두를 위한 피자>가 공연된 곳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뮈시(MÜSZI)’라고 하는 복합 문화 공간의 한 칸이었다. 뮈시는 우리말로 ‘문화, 커뮤니티 층(floor)’이라는 의미인데, 오래된 백화점의 한 층이라는 데서 유래했다. 상업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쇠락 일로에 있는 옛날식 백화점이 한 층을 통째로 폐쇄했는데, 현재는 그 공간을 한 예술가가 임대하여 ‘문화/커뮤니티 층’으로 재구성하여 운영하고 있다. ‘옛날 백화점’에서 상상할 수 있듯이 상당히 넓은 공간에 셰어 오피스(share Office), 예술 단체나 시민 단체의 사무실 및 작업실, 공연장, 전시장, 카페 등이 있다. 기존 백화점 물품이나 가구를 재활용했기 때문에 ‘통일감 없이’ 꾸며진 이 공간은 늘 개방되어 있어 언제고 무언가를 ‘도모’하는 헝가리의 젊은 작업자, 액티비스트(Activist)들이 삼삼오오 모여드는 곳이다.

뮈시 실내 루마니아 클루지 페스티벌 탕 디마지의 주요 행사장 중 한 곳이자 이 축제를 주최하는 컬렉티브에이의 사무실이 소재하고 있는 파브리카 드 펜수라(Fabrica de Pensula) 역시 뮈시와 비슷한 맥락의 공간이다. 이곳은 시내 중심지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위치한 공장을 예술가들이 공동으로 임대하여 자치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각 단체의 사무실 겸 공연장, 전시장, 공동 주방, 클럽 등으로 개조하여 사용하는 곳으로 ‘팩토리’라 불린다. 클루지를 거점으로 예술가, 클루지를 방문하는 관계자 등이 빠짐없이 찾아가는 대표적인 현대 예술 공간이다.

▲ 파브리카 드 펜수라의 내부와 외관

프라하에도 젊은 예술가들이 사랑방처럼 드나드는 공간이 있다. 프라하 북역 근처, 한적하고 으슥한 철로 변에 그래피티(graffiti)로 건물 전체가 덮여진 미트 팩토리(Meet Factory)가 바로 그러하다. 음악 공연, 연극, 미술 등 장르 불문한 현대 예술을 발산하는 곳으로 젊고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필요한 공용 공간(바, 자전거 수리점 등)이 함께 들어있다. 공간 자체는 한 예술가가 만들었지만 공간 운영과 후원을 통해 운영되고 있는 비영리 복합 문화 공간으로 레지던시와 교육 사업을 병행하고 있다.

▲ 미트 팩토리 외관(사진 출처: 미트 팩토리 홈페이지)과 내부

나라별로 처한 정치적, 경제적 상황은 조금씩 다르지만, 공산 정권이 무너지고,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합류’하면서 꿈꿨던 미래와 그 후 25년에 걸쳐 그들이 몸으로 체감한 현실의 차이는 동유럽 예술계를 오히려 냉철하게 자각, 혹은 긴장시키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겨우 보름에 걸친 경험이었지만, 그들이 구현하고 있는 세련되고 감각적이되 가장 ‘정치적인’ 현대 예술은 형식과 미학적 실험을 앞세우고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직시와 이를 전하고자 하는 사명에서 모색되고 파생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혼돈스러운 정치와 사회, 절망적인 경제적 상황에서 예술가이자 젊은 사회 구성원인 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서로를 만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하고, 머리를 맞대고 방안을 세우는 방식으로 맞서고 있었다.

사진제공_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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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사진_고주영 필자소개
고주영은 독립 기획자로서 한국과 일본의 예술가들의 작업을 기획, 제작, 코디네이팅 하는 한편, 번역자로도 활동하고 있다.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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