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세계적으로 중국의 예술시장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이에 《Weekly@예술경영》에서는 중국 현대미술의 이해를 돕기 위해 2013년, 시각예술 국제교류 플랫폼 더아트로에 소개되었던 내용을 다시 한 번 소개하고자 한다. 이번 《Weekly@예술경영》 312호에서는 중국 현대미술의 형성 과정과 미술시장의 흥기 현상을 따라가 보고, 20여 년간 우후죽순 생겨나 꽃을 피운 다양한 현대미술 공간들을 살펴보자. /중국 현대미술의 형성 과정과 미술시장의 흥기/중국 아트 스페이스의 번영과 쇠퇴

중국은 1966-1976년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 전통문화와 서양 문화를 부정하면서 중국 문화를 백지상태로 만들었고 이 시기 새로운 문화를 정립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1978년 개혁 개방을 맞게 된다. 지난 30년간 개혁 개방과 현대화 건설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며 2008년 베이징 올림픽과 2010년 상하이 세계박람회를 통해 국제적인 위상과 영향력이 상승되었다. 그러나 2008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국제금용위기로 인해 잠시 중국 미술시장이 약세를 보였지만 2009년 중국 경제조정 이후 2010년부터는 회복된 경제 위기로 인해 미술시장에서도 다시금 고도의 성과를 올리고 있다. 이전에는 주로 서양인 소장가가 중국 미술시장을 장악했다면 2010년 이후에는 중국 화교 및 중국 대륙인들에 의해 새로운 미술시장이 형성되고 있어 중국 본토의 미술 경매 기록만으로도 런던과 뉴욕, 홍콩을 추월하여 독자적인 시장의 규모를 형성하였다. 중국 현대미술은 문화대혁명 이후 80년을 전후로 형성되었으므로 중국 현대미술이 성립되기 그 이전의 시대적 배경과 미술 구조에 대해 알아보고 그 후 중국 미술이 세계 미술로 대두되게 된 상황과 더불어 중국미술시장의 고도성장에 대해 짚어보도록 하겠다.

중국 문화대혁명 시기 미술

1949년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을 대륙에서 축출한 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립하게 된다. 정권 변화와 더불어 예술사 역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게 되고 이 시기 미술은 통상적으로 '신중국(新中國) 예술(1949-1976)'과 '신시기(新時期) 예술(1976-1984)'로 구분된다. 또한 신중국 예술 중 문화대혁명 시기 예술은 혁명예술(1966-1976)로 불리면서 분류되고 있다. 신중국 예술에서는 지도자, 군인, 농민, 소수민족과 마오쩌둥과 같은 형상들이 도상의 주제로 등장하고 혁명 역사 사건과 사회주의 현실 생활의 내용을 반영한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지만 이 시기 예술가들은 정부로부터 제압을 받고 다소 창조력이 결여된 형식화, 양식화된 화면을 구성한다. 70년대 말 문화혁명 종결과 더불어 혁명미술에 대한 비평적 시각으로 ‘상흔미술(傷痕美術)’, ‘향토미술(鄕土美術)’과 미술학원 내부에서 형성된 ‘유미풍(唯美風) 미술’이 출현한다. 문화대혁명 이전 미술에서는 각종 역사와 정치적인 원인으로 인해 사회주의적 미술 형식이 양식화되는 경향이 농후했다면 신시기 예술가들은 문화대혁명 시기 상처받은 이들, 정치 운동에 대한 반박, 농촌 혹은 변방 정치 운동과 무관한 환경으로 회귀해 인생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상흔미술’은 허두어링(何多苓), 청총린(程叢林) 등, ‘향토미술’은 루오종리(羅中立), 천단칭(陳丹青) 등, ‘유미풍(唯美風) 미술’로는 위엔윈셩(袁運生), 진상이(靳尚誼)가 대표 작가라고 볼 수 있다.

‘85신조’

1989년 2월 《중국 현대 예술전》 포스터

▲ 1989년 2월
<중국 현대 예술전> 포스터
(출처: 국립극장 홈페이지)

(사진 제공: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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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5월 베이징에서 열린 <전진 중의 중국청년화전(前進中的中國青年畫展)>이 중국 ‘85신조’의 발단이 되었고 그 후 1989년 2월 중국미술관에서 개최한 <중국 현대 예술전>이 중국관방에서 개최한 최초 전시로 186명의 293점 작품이 전시되었다.

1989년 2월 《중국 현대 예술전》 전시현장

▲ 1989년 2월, 중국미술관 <중국 현대 예술전> 전시 현장(사진 제공: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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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국 현대미술의 대표 작가는 이 전시를 통해 배출되었다고 본다. 이 시기부터 작가들은 생명, 의지, 의의, 이상 등 추상적 개념, 인류적, 철학적 측면에 관심을 기울였고 회화, 조각 이외 설치, 행위예술이 첫 등장하게 된다. 이 시기 미술단체 활동이 유행하게 되어 순수예술에 대한 토론의 장을 마련하거나 전시 개최를 시도했으나 중국 정부의 철저한 제압과 보안으로 창작의 제한을 받거나 전시가 임시 중단되는 현상도 비일비재했다.

이 시기 중요 작가로 쉬빙(徐冰)과 꾸원다(谷文達), 황용핑(黃永砯), 차이궈창(蔡國強)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중국현대미술의 해외 사대금강(四大金剛)이라 불리며 중국 사대발명(四大發明: 나침반, 화약, 인쇄술, 종이)을 이용해 창작을 시도했고 1989년 이후 해외에서 활동하면서 국제적 명성을 얻어 현대예술의 형식과 중국 전통문화의 결합으로 서양 미술계를 자극하는 데 성공한 작가들이다.

쉬빙은 최초로 중국 전통문화와 민간문화를 이용해 창작을 시도한 작가로서 한자 인쇄물을 이용하여 추상적인 글씨를 창작했으며 중국 서법(書法)으로 영문을 작성하여 새로운 문자를 창조하기도 했다. 꾸원다는 샤먼 출신으로 ‘샤먼다다(廈門達達)’에서 출현한 대표 작가로 나침판을 이용한 창작물로 유명하며 <중국 현대 예술전>(1989.중국미술관)에서는 행위예술로 한자 서예의 추상적인 글씨를 보여주었다. 동일 전시에서 황용핑은 ‘중국회화간사’와 ‘현대회화간사’ 서적을 세탁기에 넣고 돌린 후 건진 종이 더미를 전시하기도 했다. 차이궈창은 화약을 이용해 화선지 위에 흔적을 남긴 설치 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해 줄곧 화약과 불꽃을 이용해 대형 프로젝트를 제작했고 08년 베이징올림픽 개막식 불꽃축제 장면을 총감독하기도 했다.

황용핑_ 중국회화간사와 현대회화간사를 2분간 세탁기에 넣고 돌리다_ 1987

▲ 출처 : 쉬빙_천서 天書_1987-1990
황용핑_중국회화간사와 현대회화간사를 2분간 세탁기에 넣고 돌리다_1987

(사진 제공: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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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생대’

90년대 초 60년대 출생한 예술가들은 이전 전통예술관과 신조예술관에 대한 반성과 질의를 구현하고, 독특하고 긍정적인 예술 태도로 新화풍을 형성하게 되면서 ‘신생대(新生代)’라고 명명되어진 사조를 형성하게 된다. 그들은 개인 서사적 행위에 관심을 가지고 일상생활과 주변 환경에서 소재를 취득하게 된다. '신생대’ 작가 대부분이 중앙미술학원 출신으로서 리우칭허(劉慶和), 리우샤오동(劉小東), 위홍(喻紅)이 대표 인물이다. 그 이외 지방에서 온 회화 위주 작가들은 베이징 원명원(圓明園)에, 마리우밍(馬六明), 장환(張洹), 창신 등 행위예술 작가들은 동촌(東村)에서 거주하면서 창작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후 도시 개발로 인해 작업실이 철거되고, 정부의 통제와 감시로 인한 표현의 자유를 억압받게 되자 이들은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당시 공장지대였던 798지역으로 이주해 자리를 잡으면서 현재 문화관광지로 변천된 798예술특구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큰 원동력을 제공한다.

‘완세 현실주의’, ‘정치팝’, ‘염속예술’

중국현대미술의 거장 완세 현실주의(玩世現實主義)의 팡리쥔(方力鈞), 위엔민준(岳敏君), 양샤오빈(楊少斌)과 '정치팝'의 선두 작가 왕광이(王廣義), 위요우한(余友涵), 리산(李山) 등이 출현하였고 동시에 '염속예술(艷俗藝術)'에 왕칭송(王慶松), 루오 브라더스(羅氏兄弟), 펑정지에(俸正傑) 등이 출현한다. 이들은 문화대혁명과 천안문 사태 등 격동기에 청년기를 보낸 작가들로 관념주의와 이상주의에 대해 회의적이고 反정부 反체제 反사회주의 성격의 풍자적인 태도를 표출하고 있다. 이들 작품은 다소 냉소적이고 허무적의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급속한 경제 발달로 인한 물질 만능주의가 싹트면서 문화대혁명 시기 유행했던 포스터나 마오쩌둥의 형상을 이용해 정치적 상업적 문화적 권력의 혼재된 작품을 창작하기도 했다. 더불어 저속하게 화려한 예술이라 할 수 있는 '염속예술'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상업문화가 확산되면서 자본의 남용에 대해 강한 부정적 시각을 띠며 풍속화적인 느낌으로 일상의 저속함, 어리석음을 묘사했다. 완세주의와 정치팝 미술은 정치·사회·정부에 대한 강한 반감 의식을 표출하여 풍자, 비판적인 경향을 띤다면 염속예술은 경제·상업문화에 젖어가는 대중에 대한 찬양, 비판적인 복합된 의식을 표출하고 있다.

‘영상 미디어아트’

1988년 장페리(張培力)의 작품<30×30>을 시작으로 근 20여 년간 급속 발전한다. 90년대 중국 전위예술은 2단계로 구분되는데 90년대 초·중기는 주로 설치, 행위, 사진과 비디오 등 미디어상의 광범위한 실용으로 본다면, 90년대 후기는 단순한 기술 매개와 개념예술의 실험적 표현이 아닌 비디오아트의 수단을 이용해 중국 사회 변화에 대한 문화적 반영으로써 여성, 청춘예술 등 주제를 표현하게 된다. 2000년 전후 단편영상, 비디오설치, 행위예술 작품이 중국 미디어아트 발전의 주된 형식이 되었으며 나아가, 평면 작품, 조각등과 복합된 형식의 작품도 등장한다. 중국에서 최초로 변형된 촬영 방식을 도입하여 주목받는 작가로는 까오 브라더스(高氏兄弟), 왕칭송(王慶松)을 들 수 있다.

까오 브라더스는 강렬한 정치적 은유를 내포한 디지털 영상 작품을 선보였다면 왕칭송은 캐나다 작가인 제프 월(Jeff Wall)의 영향을 받아, 작가가 마치 영화감독이 되어 어떠한 특정의 세트장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일정한 자세를 취하게 한 후 촬영하는 형식인 허구의 가상세계를 만들어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한다. 반어적 표현 수법으로 역사와 현실 생활의 가치관에 대해 자신의 관념을 강렬하게 표현한 관념성 영상아트의 대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먀오샤오춘(繆曉春)은 모의 영상을 근본 소재로 삼아 디지털 3D를 이용해 르네상스 이후 고전회화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고 표현한다. 최근 야오 루(Yao Lu)는 도시화 중 건축 현장에 덮여있는 녹색 그물망을 포착하여 소재로 삼아 디지털 작업으로 중국 전통 수묵청록산수화의 의경을 표현했다. 이는 현대성의 급속 사회 발전 과정 중 경관에 대한 반어적 야유를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왕칭송_ Knickknack peddler_ 120x400cm_ 2002

▲ 왕칭송_Knickknack peddler_120x400cm_2002(사진 제공: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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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이전까지는 중국 작가들이 해외 중요 전시에 참여하여 중국 현대미술을 소개했다면 2000년 이후부터 경제 성장과 더불어 중국 자체적으로 국제비엔날레, 페스티벌을 개최하기 시작하여 잠재되었던 파워풀한 중국 대륙의 막강한 강세를 보여주는 대형 전시를 개최하고 있다. 개혁 개방 이후 민간 재산은 급속도로 성장 발전하였다. 대량 유휴자금을 투자할 곳을 찾기 시작하고, 미술품 투자자들이 대거 등장하게 됨으로써 자연스럽게 중국 미술시장은 팽창 확대되었다. 이에는 중국정부의 문화산업 육성정책과 기업의 투자와 참여가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정부는 경매법을 제정하였고 베이징 이외 상하이, 선전 등지 문물국(문화유산의 관리 및 보전을 총괄하는 국무원부위관리국가국의 하나-편집자주)이 직접 투자하는 경매회사 또한 출현하게 된다.

경매회사 내에서 고가의 성적을 거두는 것은 고대 서화, 도자기, 고서적이며 이에 비해 근현대 작품들은 다소 저가로 낙찰된다. 2010년 가을 경매 100순위 중 장샤오강, 리우샤오동, 쩡판즈, 리우이에 4명만이 포함된 적도 있다. 2008년 중국지아더(中国嘉德) 봄 경매에서 리우샤오동의 작품 <溫床NO.1>이 5712만 위안(한화 약 102억 원)에 낙찰되었고, 2010년 홍콩 소더니 경매에서 장샤오강의 <창세편:일개공화국적탄생2호 創世篇:一個共和國的誕生2號>는 홍콩 달러 5218만원(한화 약 75억 원)에 낙찰되어 2010년 중국 현대미술 최고가를 갱신했다.

장샤오강_ 창세편:일개공화국적탄생2호_ 유화_ 149×119cm_ 1992

▲ 장샤오강_ 창세편:일개공화국적탄생2호_ 유화_ 149×119cm_ 1992(사진 제공: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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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전년 중국 예술품 경매시장 거래 총액은 596.53억 위안(한화 10조 6,182억 원)을, 2011년에는 968.46억 위안(한화 17조 2,386억)에 달하는 성과를 기록했다. 2012년 경매를 통한 중국 미술품의 거래 총액은 536.9억 위안(한화 9조 5,568억원)으로 2011년보다 44% 하락한 것으로 집계됐다. 중국의 미술품 시장은 2008년 금용위기 이후 2009년부터 자본이 유입되면서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고 특히 2011년 봄 경매는 중국미술시장의 최고 호황기를 누렸다. 그러나 2012년을 고비로 하락세를 탈 것인지는 곧 진행될 2013년 봄 경매를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중국 미술시장은 거듭된 고비와 눈부신 활약을 하면서 어느덧 가격, 자본이란 잣대로 미술품을 평가하게 되고 고가에 판매되는 작가가 중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블루칩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현상이 일고 있다. 경매 판매 가격에 따른 작가들의 순위 결정, 경매회사가 내놓은 가격별 작가 명단 전파에 따라 이런 발신파급 효과로 인해 해외에서는 고가에 판매되고 있는 소수의 중국 작가만을 인식하게 되고 한정적이고 편협한 자원을 습득하게 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중국 현대미술의 사대천왕 이외 발굴해야 할 무수한 신세대 중국 작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주목해 앞으로 형성될 중국 신미술 사조의 주류에 대해 모색하도록 하자.


※ 본 기사는 현대미술 국제교류 플랫폼 더아트로에서도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오영민 필자소개
오영민은 대만 사범대학교에서 석사, 중국 중앙미술학원 미술사학과에서 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중앙미술학원 인문학원 미술사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며 북경고궁박물원 과학연구처 한국연구원으로 있다. 2009년 중국 따리(운남성, DIPE), 리쉐이(절강성, LSPE), 리엔조(광동성, LIPF), 2010년 핑야오 국제 사진페스티벌(산서성, PIP)에서 한국관 총기획과 2011년 <방관자의 공연-한중일 현대사진전> 등을 기획했다. 이메일
출처 : 쉬빙_천서 天書_1987-1990 출처 : 황용핑_중국회화간사와 현대회화간사를 2분간 세탁기에 넣고 돌리다_1987 중국 아트 스페이스의 번영과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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