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에 떨어진 나의 가방에는, 이상하게도 식민지 조선의 시인 이상(1910~1937)에 대한 두터운 평론집이 들어 있었다. 수많은 책들 중에 나는 왜 하필 식민지 시인에 관한 책을 짚어들고 왔던 걸까. 무자비하게 도래하던 모더니즘이 경성의 거리를 덮을 때, 분열된 자로 그 모든 문화를 받아들이던 식민지의 시인. 그는 강국의 문화와 약국의 현실 속에서 생산-재생산되는 차이와 간극을 너덜너덜해진 제 몸으로 껴안았다. 그 충격. ‘컬처 쇼크’란 늘 이런 식이다.


나의 부모 세대는 전혜린의 수필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주무대인 슈바빙의 밤거리와 가스등의 낭만으로 뮌헨을 기억한다. 기술에 열광한 테크노 오타쿠들에게 뮌헨은 첨단 기술이 집적된 BMW의 산지이자 성지이고, 인생을 즐기는 젊은 세대에게는 10월에 열리는 맥주 축제인 오토버페스트와 축구명가 분데스리가로 뮌헨을 떠올릴 것이다.

시인 이상이 뮌헨에 왔다면

하지만 나에게 뮌헨은 좀 달랐다. 뮌헨의 풍경이 내 앞에 펼쳐졌을 때, 나는 이상하게도 이상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이상이 살아서 뮌헨을 보았다면, 그 역시 내가 목도한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강한 역학의 힘을 시에 담았을 것이다. 중앙역(Hauptbahnhof)에서 숙소로 가는 골목과 골목과 골목과 골목과 골목들. 시간의 무게는 휘발되고, 전통은 사라지며 문화적 죽음을 맞이하던 조선 경성의 골목에, 이상은 ‘13인의 아해’를 뛰게 하여 사라지는 전통과 존재를 향해 만가(輓歌)를 부르게 했다. 그런 그가 살아서 이곳을 보았다면··· 창문을 열면 수백 년 전 양식의 스타일을 지금의 옷인 양 입은 현대식 건물들이 펼쳐져 있고, 오래된 성당의 뾰족한 첨탑을 위해 현대식 건물들이 제 지붕을 일제히 낮춘 곳. 과거로부터 전해진 시간들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에릭 홉스봄이 말한 ‘만들어진 전통’이 도시 곳곳의 틈들을 메우고 있는 곳. 학창 시절에 미학강의에서 수없이 들었던 미래파와 그 대책 없는 ‘전통파괴’의 강령은 전통의 문화가 지겨울 정도로 산재되어 있는 이곳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문예사조일 것이다. 그런 곳이 뮌헨이었다.

뮌헨

음악 천국, 뮌헨

뮌헨 오페라 페스티벌(6월 24일~7월 31일)이 열리는 바이에른 슈타츠오퍼(Bayerische Staatsoper)로 가기 위해 ‘트램’이라 불리는 전차에 올라탔다. ‘슈타츠오퍼(Staatsoper)’란 말은 8·15 해방 후에는 ‘오페라좌(座)’로 번역되었고, 이후 ‘가극장’, ‘국립 오페라극장’ 등으로 번역되었다. 지금은 클래식에 일가견이 있는 이들 사이에선 그냥 ‘슈타츠오퍼’로 통용된다. 그만큼 우리도 국제화되었고 동시성이 형성된 시공간에 살고 있는 것이다.

뮌헨

▲ 바이에른 슈타츠오퍼(Bayerische Staatsoper) 전경



트램의 매표원이 승차권을 보여 달라고 한다. 공연 입장권을 보여주니 "OK!" 하고 지나간다. 공연 관람객은 공연 몇 시간 전부터 극장까지 가는 대중교통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정책이다. 뮌헨은 한국에도 잘 알려진 음악 도시이다. 작년에 서거한 거장 로린 마젤(1930~2014)이 마지막까지 지휘봉을 잡았던 뮌헨 필하모닉과 마리스 얀손스(1943~)가 이끄는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그리고 며칠 전 베를린 필하모닉의 수장으로 임명되어 2018년부터 베를린 필을 이끌 젊은 거장 키릴 페트렌코(1972~)가 음악감독으로 있는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오케스트라가 있는 곳이다.

무엇보다도 뮌헨의 자랑거리는 뮌헨 오페라 페스티벌이다. 한국의 음악계가 뮌헨 오페라 페스티벌을 더 친숙하게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작곡가 진은숙과 그의 작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때문일 것이다. 2007년 페스티벌 개막작이자, 그녀를 세계에 널리 알려준 작품이었고, 바이에른 슈타츠오퍼의 역사상 처음으로 상연된 여성 작곡가라는 기록도 세웠다.

이 페스티벌은 1875년 이래로 140년간 매년 수준 높은 오페라를 선보이고 있다. 페스티벌 동안은 새로운 프로덕션의 공연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시즌, 즉 지난해 가을부터 그해 봄까지의 오페라와 발레 중 가치 있고, 관객들에게 인기 있었던 오페라를 선별하여 공연한다. 즉 극장의 한 시즌을 총정리하는 시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전통으로부터 벗어난 거리를 재보는 오페라하우스의 노인

GENTRIFICACIÓN

▲ 바이에른 슈타츠오퍼의 오페라극장
관객의 대부분은 노인이다.

7월 28일 푸치니 ‘마농 레스코’를 시작으로, 차이콥스키 ‘오네긴’(29일)과 베르디 ‘돈 카를로’(30일)를 관람했다. 원작을 정통적으로 재연하기보다는 일명 ‘레지테아터’라고 불리는 연출가의 시도와 손맛을 중심에 둔 작품들로, 이러한 메가톤 급의 공연을 연일 본다는 것은 한국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공연장에 들어서니 순간 숨이 턱하고 막혔다. 무대보다는 객석의 분위기에 압도되었던 것. 하얗게 센 은발과 고급 드레스를 걸친 노인들이 객석을 가득 메웠다. 나는 그곳에서 외양적으로나 문화적 감수성으로나 이질적 얼룩 같은 존재처럼 느껴졌다. 1950년대에 “모든 오페라극장은 폭파하라!”라는 강령을 안고 곡을 쓰던 작곡가 피에르 불레즈(1925~)의 외침이 생각났다. ‘폭파’라는 단어를 쓸 만큼 그곳은 단단하고 보수적인 곳이었다.

‘마농 레스코’에선 최고의 주가를 달리고 있는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이 데 그리외 역을, 소프라노 크리스틴 오폴라이스가 마농 레스코 역을 맡았다. 한스 노이엔펠스(1941~)의 연출은 19세기에 탄생한 음악을 21세기적 감수성으로 몰고 갔다. 4막에선 모든 연출적 장치들을 밀어버렸고, 극 속의 황량한 사막은 화이트 큐브처럼 보이는 휑한 무대가 대신했다. 카우프만과 오폴라이스는 별다른 무대 장치의 도움 없이 오로지 노래와 연기로만 관객을 압도했다. 그 어떤 시각적 장치와 연출적 기지도 오페라의 중심인 음악을 못 당해낸다는 연출가의 과감한 믿음이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 7월 29일에 관람한 ‘오네긴’에는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가 타티아나 역을 맡았다. 연출가는 크리스토프 발리코프스키(1962~). 2006년에 내한한 ‘정화된 자들’을 통해 국내에 소개된 그 역시 19세기의 음악에 현대적 감각을 입혔다.

4일에 무대에 오른 푸치니의 ‘마농 레스코’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과 소프라노 크리스틴 오폴라이스 5일에 선보인 차이콥스키의 ‘오네긴’ 렌스키 역의 테너 파볼 브레슬릭(왼쪽)과 타티아나 역의 안나 네트렙코(왼쪽에서 두 번째)

▲7월 28일에 오른 푸치니의 '마농 레스코'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과 소프라노 크리스틴 오폴라이스

▲29일에 선보인 차이콥스키의 '오네긴' 렌스키 역의 테너 파볼 브레슬릭(왼쪽)과 타티아나 역의 안나 네트렙코(왼쪽에서 두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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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코프스키

▲ 발리코프스키는 오네긴과 렌스키를 동성애 코드로 연출하여 관객의 반감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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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돈 카를로’에는 한국의 테너 김재형이 타이틀 롤인 돈 카를로 역을 맡았다. 그의 첫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데뷔였다. 그가 무대에서 열연하는 동안 같은 한국인으로서 묘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눈동자와 머리색이 다른 관객들의 반응은 서늘했다. 그들의 박수에는 뜨거움이 없었고, 냉정했다. ‘오네긴’에서 시인 렌스키와 오네긴의 우정을 동성연애로 그렸을 때도 그들은 어디선가 공연을 보고 있을 연출가를 향해 거침없이 야유를 보내는 듯했다.

비평적 기능은 그 자리에서 바로 순식간에 이뤄지는 것이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그간 수많은 공연과 성악가들을 통해 쌓 아올린 ‘마농 레스코’와 ‘오네긴’과 ‘돈 카를로’의 상이 확고하게 있는 듯했고, 이렇게 ‘반복’된 형상 속에서 그 반복의 고리를 끊는 ‘차이’로서의 새로운 무대가 나오면 열렬히 환호했다. 한국에서는 정말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바이에른 슈타츠오퍼의 관객은 그런 곳이었다.

유산이자 첨단의 문화적 산물인 오페라

1유로에 구입한 프로그램 노트에는 공연 종료 시간이 명확히 명기되어 있었다. 귀가하는 관객들의 교통 이용을 위한 배려였다. 하지만 나는 밤거리를 천천히 걷기로 했다.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앞의 막스 요제프 광장에는 거대한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었다. 며칠 뒤에는 공연 실황을 야외에서 동시 상연한단다. 이에 대한 이유는 여러 가지일 테다. 일단 뮌헨 오페라 페스티벌 티켓 구하기는 현지인들 사이에서도 ‘하늘의 별 따기’로 통하기 때문이다. 3일 동안 정통 턱시도를 말쑥이 갖춰 입고 "Suche Karte(티켓 구함)"이라고 적힌 종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 있는 은발의 신사를 극장 앞에서 수없이 볼 수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공연 콘텐츠를 어떠한 형태로든 향유·소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배면에는 오페라는 공공적 문화 자원이며 다 함께 공유하고 지켜야 할 문화유산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바이에른 오페라하우스는 1943년 2차 대전 당시 폭격으로 전소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재정이 부족하여 전통 양식을 입은 옛 극장으로의 ‘복원’보다는 현대식 극장으로 ‘재건’하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뮌헨 시민들이 옛 오페라하우스 그대로 복원할 것을 요청하면서 건립에 필요한 모금 운동까지 벌였다고 한다.

바이에른 슈타츠오퍼(Bayerische Staatsoper) 전경

▲ 바이에른 슈타츠오퍼(Bayerische Staatsoper) 전경



그런 이들이 삶을 꾸리고 있는 뮌헨의 밤거리를, 걸었다. 골목을 지나 광장이 나왔다. 광장이 좁아지면서는 또 다시 막다른 골목이 나왔다. 마리엔 광장에 있는 뮌헨 시청사의 중세 장식과 문양에는 네온사인의 불빛이 고여 있었다. 앞서 말한 전통-과거와 현대-현재의 시간은 그렇게 맞물려 있었다. 시각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다가오는 전통이 아니라 촉각적이고 물질적으로 다가오는 전통의 풍경들. 이들은 플라스틱으로라도 전통을 복원·재현하고 그 위에 과거의 장식을 씌운다. 그리고 그 장식들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 그것들을 벗기었다. 추상주의는 이런 과정을 통해 나왔다. 그리고 밋밋함과 불확실한 형태가 지루할 때 과거의 시간을 다시 덧붙였다. 여기서 신고전주의가 나온 것이고.

오페라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지금 있는 ‘곳’과 보고 있는 ‘것’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 과거의 시간을 바로미터 삼아 측량하게 해주는 곳. 오페라도 미술도 건축도 모두 그렇게 존재하는 곳. 그곳이 뮌헨이었고, 뮌헨 오페라 페스티벌이었다.

필자소개 필자소개
송현민은 음악평론가로 음악 듣고, 글 쓰고, 음악 하는 사람 만나며 책상과 객석을 오고간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공부했고, ‘한반도의 르네상스’를 주장했던 음악평론가 박용구론으로 제13회 객석예술평론상을 수상했다.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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