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은미컴퍼니(예술감독 안은미)가 <조상님께 바치는 땐스> <사심 없는 땐스> 그리고 <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땐스>(이하 ‘땐스 3부작’)를 9월 23일부터 10월 3일까지 프랑스 파리의 테아트르 드 라 빌(Théâtre de la ville de Paris, 파리시립극장) 무대에서 속속 공연하는 것을 보고 돌아왔다. 이 ‘땐스 3부작’은 이미 국내에서 보톰업(bottom up), 즉 “아래로부터의 춤바람”이 위로 위로 솟구쳐 오르는 자발적인 춤과 안무의 커뮤니티를 만드는 작업들로 각광받았고, 그 춤바람의 기세등등함은 전방위적으로 퍼져 나갔다. 지난 백 년이란 시간 동안, 근대화라는 이름의 공업화와 서구화 그리고 민주화의 운동, 이어지는 정보화와 디지털 혁명 등등 숨 가쁘게 살아온 한민족의 몸을 마치 선불교에서 말하듯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는 취지에 가장 정확하게 부합하는 공연예술이자 시간예술이었다. 백 년의 시간이 온축되어 있는 몸의 주름으로부터 삶의 시간을 춤으로 풀어내는 것. 그러나 이러한 구체적 몸의 역사와 맥락을 모르는 서유럽 사람들, 특히 입맛 까다롭기로 소문난 프랑스, 파리 시민들에게도 이것이 통할까 궁금했다.


안은미컴퍼니 3부작 중<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땐스> (사진제공: 2015-2016 한·불 상호교류의 해 사무국) 안은미컴퍼니 3부작 중<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땐스> (사진제공: 2015-2016 한·불 상호교류의 해 사무국)

▲ 안은미컴퍼니 3부작 중<아저씨를 위한 무책임한 땐스> (사진제공: 2015-2016 한·불 상호교류의 해 사무국)

무균질의 자발적 안무가 만들어 낸 토론장

결론부터 말하면, 파리에서의 공연은 매번 환호성과 기립 박수의 연속이었다. 필자뿐만 아니라 동행했던 일간지 기자들, 철학자들은 이처럼 파리 시민들이 관대한 족속들이었는가 의심했다. 왜 이들은 이 20세기의 시간을 몸으로 함유해 버린 채, 전혀 심미적이지 않고 오히려 야생의 소나무 등걸처럼 거칠디 거친 막춤들에 그토록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가. 사실 공연이 끝난 후, 이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객석과 통로, 로비 공간, 심지어 극장 앞 거리까지 가득 메운 채, 삼삼오오 짝을 지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서울이나 기타 도시에서 공연 이후에 보던 광경과는 너무나 다른 문화 충격이 있었는데, 이 토론은 근 1시간가량이나 이어졌다. 놀라운 일이었다. 무엇이 이 바칼로레아 같은 시험을 통과하며 어려운 철학적 교양을 당연하게(!) 쌓은 파리 시민들에게 거꾸로 문화 충격을 가했던 것일까.

먼저 9월 23일부터 한국의 꾸밈없는 청소년 남녀들이 춤추는 <사심없는 땐스>가 공연되었다. 이 공연은 객석의 다수를 점유한 노년층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 같았다. 미래의 불안과 성장하는 몸의 불균형 그리고 심리적 균열 등은 가벼운 불어 대사와 불어 번역이 딸린 한국어 대사로 소화되었고, 무대에서는 이들의 전혀 인위적 조작이 가해지지 않은 무균질의 자발적 안무가 춤으로 하나씩 둘씩 떨려 나왔다. 그 과정은 결코 심미화된 아름다움, 모던댄스가 지향하는 약속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으로부터 뿜어진 자발성의 젊은 에너지는 코스모스가 아니라 카오스에 가까운 형태였고, 그것을 안무가 안은미가 수용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 웬만큼 정신이 강하지 않으면, 프랑스 파리 시민들로 구성된 이 객석이 어떻게 반응할지 현기증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모던댄스, 혹은 (프랑스의 경우) ‘농 당스[Non-Danse]’라는 주어진 판을 깨버리는 쾌거이기도 했다. 뒤샹의 나라이므로 이러한 전략은 분명히 통하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가졌는데 아니나 다를까 마디 부러진 대나무의 거친 속내가 그대로 표출되는 듯한, 그 안의 여린 속살의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는 듯한 관객의 폭발적 반응이 있었다. 어쩌면 10월 초까지 이어진 ‘땐스 3부작’의 대성공에는 이 작품의 첫 번째 공연이 파리 시민들의 마음과 낯선 이방인들의 몸이 상호 접속하여 전혀 다른 문화들끼리 이심전심 이해하게 된 것이 주효했다는 생각이 든다.

안은미컴퍼니 3부작 중 <조상님께 바치는 땐스> (사진: 고흥균, 이태/ 사진 제공: 안은미컴퍼니) 안은미컴퍼니 3부작 중 <조상님께 바치는 땐스> (사진: 고흥균, 이태/ 사진 제공: 안은미컴퍼니)

▲ 안은미컴퍼니 3부작 중 <조상님께 바치는 땐스> (사진: 고흥균, 이태/ 사진 제공: 안은미컴퍼니)


백남준 작가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예술은 사기다’라는 말은 내 예술의 기초다. 사기(도박)는 정신적 게임 아닌가. 그러니 예술이 어떻게 정신적 게임이 아닐 수 있는가.”라고. 맞는 말이다. 이것은 배짱이 있지 않으면, 되지 않는 고차원의 예술 논리였다. 이 무대가 어떤 곳인가. 피나 바우쉬, 윌리엄 포사이스를 비롯하여 세계 유수의 안무가들이 동경하고 선망하는 무대가 아닌가. 물론 그것은 1990년대까지 유럽중심주의에 입각한 '세계사' 구도가 너무도 강하게 주조한 공연예술의 세계 체제 산물이긴 하지만, 좌우간 ‘지구사’라는 보다 평등해진 글로벌 관점의 세계에서 바라봐도 대단하긴 대단한 것이었다. 왜? 파리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과 1913년 에펠탑의 라디오 전파 송신을 통해 전 세계에 민주주의와 예술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퍼뜨려 온 나라의 수도이자 모더니티의 수도이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우리가 가져온 소위 근대성이라는 트라우마가 항상 도지곤 했는데, 한국인들의 몸 정치가 이 모더니티의 수도 한복판에 자리 잡은 극장 무대에 ‘출현’하면서 트라우마 역시 환원할 수 없이 깨져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주름 많은 시간의 춤, 현재적 순간의 춤, 원죄의 춤

안무가 안은미의 ‘땐스 3부작’은 동시대의 시간의 흐름, 즉 지금 흘러가는 현행하는 시간의 흐름 위에 서 있는 우리의 몸을 확 잡아채서 마치 동해를 펄떡거리는 푸른 고등어처럼 테아트르 드 라 빌 무대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것은 할머니의 백 년 동안 굴곡과 주름 많은 시간들의 춤이기도 하고, 이제 가까운 미래의 첨예한 지점과 마주쳐서 새로운 현재를 만들고 있는 청소년들의 현재적 순간의 춤이기도 하고, 한국 사회를 이 지경이 되도록 엉망으로 몰아온 아저씨들이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나이다”(누가복음 23:34) 상태에서 추는 원죄의 춤이기도 하다. 이것은 한국 사회를 이끌고 있는 사람들의 몸들을 통계적인 수법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몸들을 다시 한번 프랑스 파리라는 공간 속으로 옮겨 놓는 장치이기도 했다. 안무가 안은미는 대범하면서도 혁명적인 수단으로 한국인의 몸들이라는 존재론을 ‘출현’시키는 안무를 구사했다. 그것은 국내의 문화예술적 맥락과는 또 다른 글로벌 차원의 실재적 균열을 내는 맥락의 조성이었다. 그리고 이는 테아트르 드 라 빌을 가득 메운 사람들이 공연이 끝난 이후, 끝없는 토론에 돌입하게 된 배경이었다. 도대체 이것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 정체불명의 몸들의 난입, 그 난입한 아시안들의 몸들은 일본인의 것도, 중국인의 것도 아닌 제3의 어떤 현존이었다. 서유럽의 인문학에서는 중국과 일본, 하다못해 인도차이나까지는 풍부하게 다뤄지고 있지만, 한국의 몫은 제한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미미하다. 그런 상황에서 ‘한류’ 같은 무시 못 할 최근의 풍문과 트렌드를 순풍의 돛배처럼 넉넉히 채우고 몰려온 이 이국의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의 몸들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예술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장면으로서 인상적이었다.


안은미컴퍼니 3부작 중 <사심없는 땐스> (사진: 고흥균, 이태/ 사진 제공: 안은미컴퍼니) 안은미컴퍼니 3부작 중 <사심없는 땐스> (사진: 고흥균, 이태/ 사진 제공: 안은미컴퍼니)

▲ 안은미컴퍼니 3부작 중 <사심없는 땐스> (사진: 고흥균, 이태/ 사진 제공: 안은미컴퍼니)


한국과 프랑스가 수교한 이후 상호 교류해 온 역사가 130년이란 시간에 가까운데, 이 기념비적인 세월의 흐름 위에 양국은 '2015-2016 한·불 상호교류의 해'라는 제하의 공식 행사를 합의했고, 주로 한국의 문화예술이 프랑스 유서 깊은 이곳저곳에서 펼쳐지는 형태로 내용의 뼈대를 삼았다. 1990년대 '세계사'라는 유럽 중심주의의 헤게모니가 동구 대몰락과 동아시아 네 마리 용의 급부상이라는 대조적인 급변 아래 '지구사'라는 보다 평등해진 서구와 비서구 사이의 관점이 역사에 도입되었고, 이제 그 수확이 21세기 한국에도 할당되었다고 생각된다. 물론 그 과정에는 한국이 세계 경제 순위 10위 언저리를 점하고 있는 국가적 위상도 고려되었다. 그 위상에 걸맞게 문화와 예술 그리고 사상이 뒤따라와 주어야 하는데, 이 문화 지체 현상을 해소하는 것이 어쩌면 이번 '2015-2016 한·불 상호교류의 해' 행사였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번 행사를 치르는 한국 측의 입장은 경제결정론 단계에서 점프하여 글로벌 차원의 문화적 입성을 제도적으로 이뤄 내야 하는 과제가 있었기 때문에 전례 없이 매우 신중하고 공정한 의사 결정이 이루어진 것 같다. 덕분에 기념비적 전환의 특이점을 목격한 증언자가 될 수 있었다.


김남수 필자소개
김남수는 2003년 무용월간지 『몸』 편집위원이었으며, 2006년 퍼포밍아트지 『판』을 창간, 현재까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 백남준아트센터 학예연구원, 2011년 국립극단 선임연구원, 2013년 국립아시아예술극장 드라마투르그로 활동했다. <오픈댄스:달리는 늑대들>(백남준아트센터), <고래-시간의 잠수자>(국립극단)를 기획했다. 현재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 경기문화창조허브에서 <사슴뿔 도서관>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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