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약 력/·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아동청소년극 전문사/·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 책임연구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산학협력단 연극 교육연구소 인터 부소장/·극단 북새통 예술감독, 상임연출가/·판소리창작 공연단체 판소리만들기    자 예술감독
/연 출/·2004 <가믄장아기>/·2011 뮤지컬 <재주 많은 다섯 친구> <소년이 그랬다>/·2012 <겨울이야기> /단편소설 입체낭독극장 <어쩌면>/·2013 <구름>, <사천가>/·2014 <억척가>/수 상/·2012 서울어린이연극상 연출상/·2010 서울어린이연극상 극본상, 작품상, 연기상

남인우, 그녀에게 붙는 수식어는 꽤나 다양하다. 연극 연출가, 극단 북새통의 예술감독이자 상임 연출가, 판소리 창작 공연 단체 ‘판소리만들기 자’의 예술감독 등. 또한 그녀는 창작뿐만 아니라 연극놀이 전문가로서 교육 분야에서도 꾸준히 그 활동을 이어 오고 있다. 데뷔작인 <가믄장아기>는 국내에서는 물론 해외 공연예술계에서도 수차례 공연되며 호평받은 바 있다. 이 흥행은 이후 <사천가>와 <억척가>로 이어졌다. 그런 남인우를 이 자리에 있게 만든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말한다. 예술로 인해 그녀의 삶이 변화할 수 있었으며, 그러한 가치를 공유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기에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먼저, 연극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중학교 때 아버지하고 사이가 안 좋았어요. 그러다 보니 집에서 탈출하는 방법으로 대학은 서울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때 제가 공부를 못하진 않았는데, 영어가 부족했거든요. 영어 공부를 하겠다고 서점에서 책을 읽곤 했는데, 어느 날 어떤 책의 단어가 유난히 쉽고 재밌는 거예요. 그 책이 『고도를 기다리며』였죠. 고독과 몸부림? 탈출하고 싶은 욕구? 그게 멋있게 느껴졌어요. 나의 상황과 절묘하게 만났던 거죠. 그래서 연극이란 걸 한번 해 봐야겠다 하고 친구들을 모아 연극반을 만들기로 한 거예요.

학교에 최초로 연극반을 만드신 거네요? 그것도 자발적으로.
그렇죠. “연극이다, 이제. 연극의 미래가 왔다” 하면서(웃음). 그런데 동아리를 만들려면 지도교사가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때 학교에 갓 부임한 지구과학 선생님이 있었어요. 그 선생님께 단체로 찾아가 여기 도장 찍으시라고(웃음). 그렇게 직접 희곡도 쓰고 무대에서 공연도 하면서 연극을 시작했죠.

그전에 연극에 대한 교육을 받으신 것도 아니었을 텐데, 대단하세요.
중고등학교 때 교과서에 나오는 희곡이라는 걸 읽잖아요. 그때마다 연극이 어렵다고 느낀 적은 없었어요. 오히려 뭔가 분출해 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연극을 전업으로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죠. 그런데 아버지 귀에 제가 연극한다는 소문이 들어간 거예요. ‘딴따라’는 절대 안 된다는 신념이 확고했던 아버지가 결국은 제 교복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셨죠. 그때 다짐했어요. 아버지가 이렇게 싫어하시니 꼭 연극을 해야겠다고(웃음).



막상 대학에서는 연극에 재미를 못 느끼고 방황을 많이 했어요. 내가 왜 연극을 해야 하는지, 예술이 뭔지,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고등학교 수업의 연장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한편으로는 지방에 있다가 서울에 와서 문화적 괴리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아버지를 향한 반항심이 지금의 선생님을 만든 거군요(웃음).
그렇죠. 제가 자그마치 3년 동안이나 아버지를 괴롭혔어요. 매일 연극영화과에 가겠다고 편지를 보냈거든요. 그랬더니 결국 아버지가 원서 쓰는 걸 허락해 주셨어요. 대신 특정 대학에 가야 한다는 조건이 있었는데, 진짜로 그 학교에 합격한 거예요. 하지만 막상 대학에서는 연극에 재미를 못 느끼고 방황을 많이 했어요. 내가 왜 연극을 해야 하는지, 예술이 뭔지,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고등학교 수업의 연장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한편으로는 지방에 있다가 서울에 와서 문화적 괴리감을 느꼈던 것 같아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진리라는 게 뭔가, 정의는 있는가 하는 물음들과 더불어 한국 사회의 단면을 생생하게 경험했는데 이런 것들을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몰랐던 것 같아요.

오히려 연극에 관한 이론적인 배경보다 그러한 고민과 질문이 예술가로서 삶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어요.
그렇죠. 예술은 정신과 기술이 합쳐지는 건데, 기술 이전에 스스로 질문을 한 시기였으니까요.

졸업하고 바로 연극을 시작하셨던 게 아닌가요? 2~3년간 직장 생활을 했어요. 그러다 보니 세상에 대한 질문이 사라지는 게 느껴졌죠.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공부를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대학원에 간 거예요.

그런데 아동청소년 연극을 전공으로 택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직장을 그만두고, 보호감찰원 청소년들이랑 연극 캠프를 갈 기회가 있었어요. 어렸을 때 제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연극을 통해서 어린이, 청소년들과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연극이 사회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이런 생각으로 캠프에 지원했는데 막상 현장을 경험해 보고 목적으로서의 예술이 아니라 예술 그 자체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거예요.



연극을 통해서 어린이, 청소년들과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연극이 사회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이런 생각으로 캠프에 지원했는데 막상 현장을 경험해 보고 목적으로서의 예술이 아니라 예술 그 자체로서 충분히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거예요.



▲ <가믄장아기>(2004)


극단 북새통의 <가믄장아기>로 데뷔를 하셨고, 그 작품이 굉장한 히트를 쳤잖아요. 그런데 중간에 잠시 극단을 떠나신 적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기존의 작품들이 레퍼토리로 공연되다 보니까 창작자보다 경영자로서의 능력이 많이 필요했어요. 서른둘, 서른셋에는 밤낮없이 일만 했죠. 그러다 서른일곱 즈음에 극단을 잠깐 그만두겠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때 제가 그랬어요. “나는 내가 예술가인지 사장인지 모르겠다. 세상에 대한 어떤 질문도 생기지 않고, 내가 이거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너희들도 다 보기 싫다”라고.

극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셨던 것 때문이겠죠?
이런 문제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극단 북새통 같은 경우 창단 초기에는 청소년연극 단체라고 밝혔다가 나중에 그 타이틀을 싹 걷어 냈거든요. 실상 저에게 어린 관객을 만난다는 것은 관객을 확대한다는 개념이었어요. 그동안 연극에서 소외됐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었고, 그래서 극장에서 제한된 공연을 하는 게 아니라 연극이 필요한 곳에 찾아가는, 일종의 운동을 하고자 했던 거죠. 그런데 청소년연극이라고 하니 너무 그 틀에 제한된 시선으로 저희를 보시더라고요. 그러다가 <사천가> 같은 작품을 연출하면 “오, 얘가 이런 작업도 하는 애였어?”라는 얘길 들었죠. 그런 에너지에 휩쓸리기도 했고, 극단 운영에 대한 압박을 많이 받아서 누적된 피로감이 컸어요. 그래서 1년은 쉬어야겠다는 선언을 하게 된 거고요.

쉬면서 뭐하셨어요?
돈도 벌고(웃음), 춤추는 사람, 미술 하는 사람, 여기저기서 많은 사람을 만났어요. 정말 재밌고 신나더라고요. 그러니까 숨도 좀 쉴 수 있게 되고 다시 북새통 생각이 났죠. 결국 내가 비빌 언덕이니까요. 나의 동지, 동료들이 거기 있어요. 지금은 다시 북새통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물질적, 정신적인 고생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작업을 할 수 있었던 토대가 무엇일까요? 세상에 대한 질문이 그 답이 될 수 있을까요?
아니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러게, 연극할 운명인가(웃음)? 일단, 다른 걸 해 보겠다는 생각을 미처 못 했던 것 같아요. 욕망이 거기에 미치지 않는 거죠. 또 하나는 주변에 치열하게 고민하는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고요.

그게 중요한 것 같아요. 주변에 동료가 있다는 거요.
좋은 동료는 스스로 만드는 거예요. 동료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기 시작하면서 질문을 공유하기 시작하죠. 사실 저랑 동료들은 연극을 하면 가난한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이 불편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꿀 만큼 불편하지는 않았던 거죠. 저에게는 삶을 다시 바라보고 무엇보다 나를 만나게 하는 예술의 가치를 공유하는 일이 중요해요. 그렇기 때문에 여길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아요.


▲ <재주 많은 다섯 친구>(2011)


창작 이외에도 교육 등 다양한 활동을 하시잖아요. 넓은 스펙트럼을 종횡무진 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인가요?
기본적으로 사고의 틀, 본인이 가진 것을 발산하는 형식을 제한하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우리가 다루는 기술이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거죠. 예술가가 뭔가 발현할 때 제한된 울타리 안에서 벗어나기가 쉬운 일은 아닌데요. 그러나 이것도 예술가의 성향인 것 같아요. 다 넘나들어야 할 이유도 없죠. 또한 저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예술이 이렇게 저렇게 가야 한다고 규정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생각해요.

작업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재미요. 이게 나한테도 재미있나, 왜 재미있나? 관객은 왜 재밌지? 그 재미가 단순히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일까? 그게 지금 저에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고통스러워도 재밌는 게 있잖아요. 해야 할 이유가 있는 거.

예술가로서 살아가는 게 행복하신가요?
행복해요. 힘들 때도 많죠. 타인의 삶을 훔쳐보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사실 고통스러운 일이니까요. 배우라는 게 그렇잖아요. 심장이 한 번도 아프지 않으면서 어떻게 타인의 삶을 내 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어요. 그건 거짓말이죠. 심장이 빠개지는 경험을 어마어마하게 하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경이로워요. 아름답죠. 그리고 또, 제가 예술가가 아니었다면 태양이 저렇게 뜨는 게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왜 걸어야 하는지, 이런 것들을 어떻게 질문해 봤겠어요. 내가 흔들릴 때 손을 잡아 주는 동료들을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어요.

작업하면서 느끼는 불안감은 어떻게 극복하시나요?
그냥 불안해해요. 극복하려고 하면 꼭 안 되더라고요. 불안하니까 재밌는 거 아닐까요(웃음). 충분히 불안해하면서도 언제나 자신을 찾아오려고 하는, 그런 내성이 있는 것 같아요.

미래의 남인우는 어떤 모습일까요?
계속 질문하고 싶어요. 다양한 삶의 목소리를 들여다보고 궁금해하고. 또 그들의 삶 속에서 나 자신을 찾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거예요. 연극을 하면서 느끼는 건, ‘내가 그렇게 살고 있다’가 아니라 ‘내가 그렇게 살고 싶다’는, 작품들로 대변되는 나의 선언 혹은 다짐 같은 거예요. 그런 도전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사진촬영_장우제

※ 참고링크
문화예술 청년, 인생 UP 지원사업 가이드
문화예술청년, 인생 UP 데이트: 문화예술선배 30인의 서른 가지 길


필자소개 필자소개
김미지는 대학에서 연극학을 공부하고 월간 『한국연극』 기자로 활동했다. 현재는 문화, 예술, 놀이를 통해 협동하며 다 함께 잘 놀고 잘 사는 세상을 꿈꾸는 '이웃문화협동조합'에서 일하고 있다.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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