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정민룡 관장은 전라도 광주 ‘북구 문화의집’을 비롯한 전국 150여 개 문화의집의 산 역사다. 정 관장은 우연한 계기로 1997년 개관한 북구 문화의집을 2000년에 입사했다. 그 후 섬세하면서도 깊은 여운을 남기는 다양한 문화 기획 프로그램을 선보이며, 북구 문화의집이 전국 최고의 문화 기획 공간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필자와의 인연은 2000년대 초반 테마 여행 프로그램의 강사로 나서며 시작되었고, 이후 8년간을 함께 일했었다. 헛기침 소리만 들어도, 꺼낸 책만 보아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만 정작으로 그가 문화 기획에 대한 어떤 소신을 가지고 임하는지 45장의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진행된 강연과 질문의 시간을 가지며 그를 다시 생각해 본다. 늙지 않는 “똘똘이 스머프” 그 별명이 가장 어울리겠다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문화 기획자의 비빌 언덕

정민룡 관장은 “기획은 관계의 호출이다”라고 여긴다. 때문에 그의 휴대전화는 쉴 틈이 없다.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 주면서 치르는 일이 문화 기획이라고 생각하는 탓이다. 그가 보여 준 두 명의 사수가 있다. 어느 술집에서 마치 친구처럼 어깨동무하고 찍은 사진에는 진한 사람 내음이 배어 있었다. 첫 사수 김호균(현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추진단 전문위원)은 다큐 사진을 찍는 정민룡 관장을 문화의집으로 초대한 이다. 그리고 기획의 일이 얼마나 섬세한지, 기획의 기승전결을 보여 주며 일상적 삶이 문화 안에서 어떻게 발화되는지를 함께 구축해 나갔다. 두 번째 사수는 필자였다. 일 저지르기 선수였던 필자는 문화의집에서 일하는 영역을 일상적 일에만 가두지 않고 지역사회와 만나고 함께하는 비엔날레 시민 프로그램, 대인예술시장 프로젝트 등을 함께 만들어 갔다. 이런 세 사람의 관계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술잔만 부딪쳐도 다음 단계의 일은 또 어느 것을 지향할 것인지를 공감하고 지지하는 사이이다.

고객의 요구는 무서운 것이다. 특히 국비 지원을 받는 기관에서 본디의 과업 외에도 요구되는 사업, 덤벼 보고자 하는 사업 등을 이행하면서 치러야 하는 다양한 관여와 간섭, 지시 사이에서 기획자는 줄타기를 한다. 정 관장은 이런 줄타기를 즐긴다고 했다. 대신에 사업 전체에 대한 마스터플랜을 구축하고 행여 발생할 수 있는 사건 사고에 촉수를 세우며, 최대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데, 기실 목표했던 것보다 그 과정 자체에 더 큰 의미망을 둔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갑의 관여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말에, 때론 응수하고 때론 설득하고, 때론 무언으로 일관하다가 그래도 안 되면 어쩌지 못하고 따르는 것이 방법이라고 전했다. 그래 주요한 갑이 어딘가 그의 프레젠테이션을 보니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예술위원회, 광주광역시,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등이었다. 필자가 보기에는 가장 중요한 갑이 빠져 있었다. 바로 정 관장이 위치한 북구 문화의집을 지원하는 광주광역시 북구청이었다. 왜 뺐는지, 두려워서 뺀 것이 아니냐고 물으니 “오랜 세월 동고동락하다 보니 가장 친근한 지원 세력이 되었다”라고 고백했다. 모서리와 모서리가 만나 닳아지면 원이 되는 기적이 거기 보였다.

기획자의 아이디어 창고

그 많은 아이디어를 어디에서 구하는지 그 스스로 보여 준다. 메모였다. 그의 머리를 퍼뜩 스쳐 가는 것, 가슴을 퉁 치는 것, 늑골 깊숙이 내려앉는 것들을 요리조리 메모하거나 스케치한 그의 수첩을 공개해 주었다. 그리고 어느 지역 신문의 한 페이지거나 텔레비전의 한 장면 같은 것이 보였다. 이어서 그가 추려 낸 키워드에 해당하는 관련 서적이 드러났다. 그는 해 아래서 새로운 것은 없다는 진리 속에서도, 뒤섞이고 범람하는 정보 속에서도 북구 문화의집의 현재와 광주, 한국 문화의 지형도 속에서 그가 수행해야 할 일들을 찾아내고 있었다. 가장 최근에 그가 수행한 “우락부락”이라는 어린이 문화예술교육 캠프를 들여다보면, 대인시장에서 시작한 다다익선이라는 가게 수리 및 목공에서 시작한 프로그램이 다시 북구 문화의집으로 옮겨 와 있다. 목공 교실을 열고, 거기에 어린이 건축 캠프를 진행하고, 그 사이 경험했던 것을 모두 결집하여 170명의 어린이가 비엔날레 기간이 아니면 열지도 않은 전시관을 열어젖히고 2박 3일 동안 그들이 원하는 “어린이 도시 IN 광주”라는 창의적이고 미래 지향의 어린이 친화 도시를 구축해 냈던 것이다.

기획자를 꿈꾸는 이들에게 기획서는 하나의 입봉과 같은 관문이다. 한 해 8천만 원의 예산으로 운영되는 북구 문화의집임에도 다양한 일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은 각 기관의 지원 사업에서 공모를 통해 가져 온 예산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그가 하는 주요 사업은 “문화재 생생 사업, 미래창조과학부의 무한상상실” 등이다. 이를 위해서 그는 오직 단 몇 줄의 핵심어로 승부를 건다고 전한다. 감동을 주거나 치열한 고민이 드러나 있거나, 이것을 꼭 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집약된 단어 안에서 그는 기획서를 제출한다고 전한다. 이를 지켜본 필자의 입장에서도 탈락률은 0%였었다. 이는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열망과 소명 의식과 프로 정신이 함께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정 관장은 창의적 아이디어의 샘물이자 동지로, 술을 함께 마시는 예술가로 꼽았다. 열 몇 살의 터울이 있는 형님뻘의 예술가를 그는 존경하면서 한편으로 일을 함께하는 도반으로 삼아가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에게 예술가는 항상 그들의 영혼을 존중해 줘야 하고, 어떤 일이건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될 존재감이지만, 그들 안에 담겨 있는 사유의 깊이와 행동의 의지를 사회적 차원으로 치환하면 얼마나 엄청난 에너지를 발휘하는지 사례를 통해 보여 주었다. 대인예술시장에서부터 인연이 되어, 손과 도구의 이용에 관한 한 가장 베테랑인 신양호 작가와의 프로그램은 세상에 널브러진 모든 잡다한 것이 예술품이 된다는 것을 입증해 주었고, 진한 먹빛의 농경도를 그리는 박문종 작가와의 노작프로그램은 그림으로 존재하는 농경이 아니라 화가와 참여자 모두가 그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고인이 된 강준혁 선생의 기획자의 길 중 몇 대목 “앞서가는 예술을 사랑하라. 그리고 예술가를 존중하고 아껴라, 예술가를 가까이 하라 그러나, 무모한 예술가는 멀리하라, 자신의 기획이 예술을 훼손시키고 예술가를 소모시키는 일이 되지 않게 하라.”라는 말을 되새기며 임하는 그의 관점이 또렷하게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 북구 문화의집 문화예술 프로그램 전경

주체이자 가능성 있는 존재로서의 주민

동원의 대상으로 주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주민은 주체로서 그 무엇이고 할 수 있는 가능성 있는 존재로 ‘모셔’ 왔다는 게 정민룡 관장의 지론이었다. 생활문화 공간으로서 문화의집의 프로그램은 항상 주민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렇게 실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주민과 함께 실행한 사업의 사례를 컷으로 보여 줬다. 충효마을에서 태어난 김덕령 장군을 기리는 마당극을 준비하는 마을 할머니들이 냄비와 밥그릇, 솥, 쓰레받기 등을 들고 신명을 주체하지 못해 마을회관 안에서 벌이는 한마당의 장면은 그의 이야기가 허언이 아니었음을 입증한다. 가장 최근의 프로그램으로는 북구 문화의집에서 벌이고 있는 한평 장터가 소개됐다. 어린이, 청소년, 청년, 주부, 아저씨, 할머니가 보따리를 들고 문화의집 강당에서 펼치고 있는 장터는 삽시간에 지역 사회의 이슈가 되어 있었다. 불과 15만 원의 예산으로 진행하는 이 프로그램은 마치 아나바다 같기도 하지만, 집안에 가지고 있는 안 쓰는 것, 나눠 쓰고 싶은 것, 바꾸고 싶은 것들의 총체가 동원되며 주민 주체의 시장이자 문화적인 판을 형성하고 있었다. 광주에서 열리는 야시장과는 다른 형태의 즐길 거리이자 살 거리가 넘치는 판을 삽시간에 주민들의 관심사로 끌어가는 힘은 그가 얼마나 주민들의 마음을 함께 읽고 있으며, 그들의 열망을 문화적으로 치환하는 데 탁월한가를 보여 준 사례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기획자의 가장 큰 배경은 바로 ‘주민’이라는 사실로 그와의 대화는 마감되었다.

그의 고향은 완도다. 완도는 섬이되 섬이 아닌 곳이다. 그곳에서 교직에 계신 아버지를 따라 부속 도서를 전전했다. 그 떠돌이 생활 속에서 동네의 속살을 깊이 보는 버릇을 배웠다. 정 붙이면 어느 곳인들 고향이 아니겠는가마는 정 관장은 이런 생활 속에서 사람을 사귀는 법도 배우고, 사물의 쓰임, 생각의 발전 등을 연마했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꼼꼼한 기록의 방식을 터득했다. 그가 보여 준 사진에는 이번 추석 때 고향 집에 모인 가족들이 담벼락에 벽화를 그리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예술적 감성을 타고난 가풍이 보이는 경관을 바라보며 필자가 한마디 던졌다. “정민룡 관장의 누나는 시인이죠. ‘발자국은 길을 묻지 않는다’라는 시를 통해 해남 우항리 공룡과 대화를 나눴던 시인, 그리고 그의 매형은 극단 갯돌의 상임연출로 계시지요. 그런 가운데 농대를 다니면서 다큐 사진을 하고, 대학원에서 영상 인류학을 공부하며 문화 기획의 세계에 더욱 탐닉하게 된 것입니다”라고.

너무나 잘 안다고 하지만 모르는 게 더 많았음을 깨닫는 시간은 훌쩍 두 시간을 넘겨 버렸다. 이제 함께 술 마시면 그의 속내를 더 깊게 탐험해야 되겠다는 다짐을 하며, 정민룡 관장이 구축하는 문화 기획의 세계에 대한 담화를 마친다.

※ 참고링크
[현장+人] 예술경영사람들 I: 이철순 양평군립미술관 관장
[현장+人] 예술경영사람들 Ⅱ: 최광일 (사)한국공연관광협회 회장


필자소개 필자소개
전고필은 전남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화재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북구 문화의집에서 8년간 관장으로 재직(2004-2010)한 바 있으며, 광주문화재단 문화관광팀장과 2014년 대인예술시장 총감독을 역임했다. 현재 《광주드림》 여행전문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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