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약 력/·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아동청소년극 전문사/·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 책임연구원/
·한국예술종합학교 산학협력단 연극 교육연구소 인터 부소장/·극단 북새통 예술감독, 상임연출가/·판소리창작 공연단체 판소리만들기    자 예술감독
/연 출/·2004 <가믄장아기>/·2011 뮤지컬 <재주 많은 다섯 친구> <소년이 그랬다>/·2012 <겨울이야기> /단편소설 입체낭독극장 <어쩌면>/·2013 <구름>, <사천가>/·2014 <억척가>/수 상/·2012 서울어린이연극상 연출상/·2010 서울어린이연극상 극본상, 작품상, 연기상

요새 드라마에서 우아하고 지적인 이미지로 자주 출현하는 직업 중 하나가 큐레이터다. 큐레이터는 주로 미술관이나 갤러리 등에서 열리는 전시회의 A부터 Z까지 전 과정을 주도·진행하는 사람이다. 그 누구보다 먼저, 가장 밀접한 거리에서 미술 작품을 접하고 예술가들과 같이 호흡하게 된다. 황정인은 현재 우리나라 미술 현장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큐레이터 중 한 명이다. 그녀는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2003년에서 2009년까지 사비나미술관 소속 큐레이터로 일하다가 돌연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문화산업을 공부했다. 귀국 후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하다가 현재는 대안공간인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이하 사루비아다방)에서 전시 기획 일을 하고 있다. 인터뷰를 위해 만난 그녀는 큐레이터란 직업에 대한 달콤한 환상을 철저히 거부했다. “허황된 꿈은 깨라”라는 거다. 대신해 그녀는 꿈에서 벗어나 직접 맞부딪히게 될 현실과 전시를 만드는 일, 그리고 동시대 작가와 함께 호흡하며 성장해 나갔던 경험에 대해 들려주었다.


처음 어떻게 큐레이터를 꿈꾸게 되셨나요? 당시로서는 큐레이터가 생소한 직업이었을 텐데, 체계적 공부를 위해 예술학과를 선택한 계기는 무엇인가요.
어려서부터 미술이 좋아서 미술에 관련된 것이라면 작품 창작이든 향유든 꼭 그 언저리에는 있고 싶었어요. 그러다가 열일곱 살 때 미술 전시를 기획하는 큐레이터라는 직업이 있다는 얘길 들었죠. 그게 좀 근사해 보였고 미술 작가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졌어요. 그땐 인문계 고등학교를 다니던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였지만, 어려서부터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재밌는 일을 벌이는 걸 굉장히 좋아했거든요. 그런 공부를 하려면 어디를 가야 할까 알아보다가 ‘예술학과’에서 미술 이론을 공부할 수 있다고 해서 입학원서를 넣게 됐어요.

막상 전공하면서 꿈이 바뀌는 경우가 있는데, 계속 그 꿈을 가져가신 거네요. 처음 전시 기획을 체험한 건 언제였나요?
학교 동아리 활동 중에 ‘거리미술전’이란 게 있었어요. 8회부터 11회까지 4년 동안 계속 참여 했거든요. 물론 ‘거리미술전’은 학생들이 하는 전시라 아마추어 수준이긴 했지만, 그래도 서울에 있는 모든 미술대학 학생들과 얘기하고, 그들이 작업하는 실기실을 직접 방문해 섭외하는 과정이 지금 제가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오히려 학생이란 신분이었고 새로운 걸 할 수 있다는 용기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일들을 벌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던 중 대학 4학년 때 사비나미술관에서 인턴으로 근무할 기회를 갖게 되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후로 약 6년간 미술관 학예실에서 근무하게 됐죠.


▲ 독립기획으로 진행한 프로젝트 < Situated Senses 01: Inclined Angles> 전시 전경.
사진 속 작품은 허산 < Tilt>(2011) ⓒ 허산


사비나미술관에서의 경험은 어떠셨나요? 학교에서 배운 것과 현장에서 하는 일에 다른 점이 있었다면요?
그땐 미술관 일 자체가 매우 즐거웠어요. 친구들과 학교에서 나눴던 경험이 보다 전문적인 체계 안에서 다듬어질 수 있었거든요. 문제는 관람객을 위해 전시 설명을 쓰는 거였죠. 학예 연구란 깊이 들어가야 하는 거고, 글쓰기는 대중과 만나야 하는 거잖아요. 전문가와 대중의 중간 입장에서 글을 쓰려고 노력했고, 글이 너무 어려우면 몇 번이라도 다시 쓰는 과정을 반복했어요. 큐레이터가 쓰는 글과 대중이 원하는 글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이론과 현장의 간극을 깨는 과정이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학교에서는 미술사 수업 등, 대개 학문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작가들을 접하잖아요. 그런데 현장에선 직접 작가를 만나 어떻게 전시를 끌고 갈 것인지 토론해야 하니, 매 순간이 설득과 협의의 과정이었어요. 미술관 전시 작가 중 대부분이 중견 작가들이다 보니 삶의 경험에서 오는 차이도 있었고요. 그래서 오히려 더 꼼꼼히 업무를 챙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이 미술관 큐레이터로 활동하는 원동력이 된 것 같아요.

학예 연구란 깊이 들어가야 하는 거고, 글쓰기는 대중과 만나야 하는 거잖아요. 전문가와 대중의 중간 입장에서 글을 쓰려고 노력했고, 글이 너무 어려우면 몇 번이라도 다시 쓰는 과정을 반복했어요. 큐레이터가 쓰는 글과 대중이 원하는 글의 성격을 파악하는 것이 이론과 현장의 간극을 깨는 과정이 아닐까 싶어요.



2010년 사비나미술관을 떠나 영국 유학을 선택하셨어요.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영국에서는 어떤 공부를 하셨죠?
전시 기획에 있어서 주제 의식이나 목적 의식을 제대로 갖지 않고 일하다 보니 제 자신이 여러모로 소진된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서른 나이에 유학을 갔어요. 2010년에 가서 2012년에 돌아왔죠. 가서 미술 이론과 상관없는 다른 걸 해 보고 싶어서 공부한 것이 문화산업이었어요. 우리나라 상황과 유럽의 상황을 비교하며 우리 미술계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죠.

미술관이라는 안정적인 직장을 버리고 영국 유학을 결심할 때 불안하진 않으셨어요?
기획자로서의 주제 의식이나 전시 기획에 대한 신념이 완전히 확립되지 않은 상태에서 떠나는 유학이라 불안했죠. 또한 미술계를 떠나 있는 동안 제가 잊힐 거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다행히 사립미술관협회에서 발행하는 『아트뮤지엄』 편집팀으로부터 유학 기간에 런던통신원으로 활동해 주길 제안받았어요. 영국의 현대미술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나 문화예술경영에 대한 흥미로운 주제를 연재하기 시작했죠. 이것을 계기로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 독립 큐레이터로 활동하면서 영국의 문화예술 아카이브에 대한 연재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 유학 중에도 큐레이터 활동의 끈을 놓지 않으셨어요. 버려진 공간에서 전시 프로젝트를 하셨다고요?
우연치 않게 갤러리로 곧 전환될 빈 건물에서 전시 기획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어요. 인연인 듯 건물주를 직접 만나서 두 달간 해당 건물을 전시 공간으로 사용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죠. 물론 관심 있는 주제와 참여 작가에 대해서도 논의했고요. 다행히 건물주의 이해와 호의로 그곳을 전시 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었어요. 그다음에는 100년 된 경찰서의 독방에서 전시를 열기도 했는데, 이때는 아주 적은 비용의 장소 사용료만 지불했고요. 당시 런던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작가들이 지금 국내 미술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걸 보면 뿌듯하죠.


▲ 2015 사루비아다방 기획전 <맞물린 대화: 근시>의 전시 전경.
사진 속 작품은 요건 던호펜의 <무제>(2015)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다방


현재 일하고 계신 대안공간 사루비아다방은 이전에 계셨던 사비나미술관과는 다른 성격의 전시 기관인데요.
사루비아다방은 많은 작가들을 배출한 대안공간이에요. 앞으로도 비영리 대안공간으로서 사루비아다방의 성격을 보여 주는 전시와 프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관객, 세대가 모일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가려고 해요.

온라인에서 국내외 미술 관련 뉴스 및 아카이브를 제공하는 『미팅룸』 편집장도 맡고 계시잖아요.
미술관을 그만둔 후에도 여러 작가들이 자료 관리를 도와 달라고 연락을 주셨어요. 학예연구를 하다 보면 전시 기획을 위한 작가 리서치와 자료 정리를 병행하게 되거든요. 그 일에 워낙 흥미를 갖고 있었던 터라, 언젠가는 아카이브를 통해 작가와 기획자를 위한 온라인 서비스를 해야겠단 생각을 했죠. 그때 이미 ‘미팅룸’이란 이름을 지어 뒀는데, 제가 제일 많이 하는 일이 결국 여러 사람들과 만나는 거고, ‘미팅룸’은 그 만남이 이뤄지는 하나의 공간이란 뜻이었죠. 현재는 영국에서 만난 동료 큐레이터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어요.


미술관을 그만둔 후에도 여러 작가들이 자료 관리를 도와 달라고 연락을 주셨어요. 학예연구를 하다 보면 전시 기획을 위한 작가 리서치와 자료 정리를 병행하게 되거든요. 그 일에 워낙 흥미를 갖고 있었던 터라, 언젠가는 아카이브를 통해 작가와 기획자를 위한 온라인 서비스를 해야겠단 생각을 했죠.



회의가 들거나 힘 빠질 때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럴 땐 어떻게 하세요?
작가 작업실에 가서 힘을 많이 받아요. 늘 열심히 하는 작가들을 보면서 제가 할 일이 많다는 걸 느끼죠. 연구도 하고 기획도 하고, 때론 말벗처럼 대화도 나누고요. 작가-큐레이터의 관계는 같은 시대를 살면서,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작품에 대해 논평할 수 있는 동반자 같은 관계라고 생각해요.

큐레이터 일이 행복하신가요? 평생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세요?
저는 아주 만족해요.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잖아요. 그 사람들을 통해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사회,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들을 배울 수 있다는 게 무척 좋아요. 이 일을 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지금으로선 제가 하는 일이 즐겁고,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이걸 접고 다른 걸 한다 한들 잘 못 할 것 같거든요.

큐레이터로서 전문가가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요?
남들 눈 의식하지 않고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알아야 돼요. 그리고 남들이 알 수 없는 깊이로 그걸 파고들면 그것에 대해서는 굉장한 전문가가 되는 것 같아요. 저도 아직은 전문가가 되기 위한 과정이죠. ‘큐레이터’, ‘갤러리스트’라는 건 미술계라는 사회제도 안에서 유효한 일종의 약속 같은 건데, 직함에 맞는 전문성을 갖추려면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해요. 요새 강의 나가서 학생들을 보면 본인이 뭘 했을 때 가장 즐거운지를 몰라요. 저 역시 그랬고요. 그걸 극복하려면 사회적 시선에서 조금 떨어져 나와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하는 시간이 꼭 필요해요.


꿈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차근차근 쌓아 가다 보면 그 일에 가닿게 되는 것 같아요. 물론 힘든 일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승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죠. 하지만 그걸 해냈을 때 그만큼의 경험치가 쌓이기 때문에, 어느샌가 제가 생각한 지점에 가까이 가 있더라고요. 비전이란 건 매 순간 만들어 가는 거잖아요.



마지막으로 큐레이터로서 간직한 비전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가 열일곱 살 때 품은 큐레이터의 꿈을 스물일곱 살 때 나도 모르는 사이 이루게 됐는데, 꿈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할 일을 차근차근 쌓아 가다 보면 그 일에 가닿게 되는 것 같아요. 물론 힘든 일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승부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죠. 하지만 그걸 해냈을 때 그만큼의 경험치가 쌓이기 때문에, 어느샌가 제가 생각한 지점에 가까이 가 있더라고요. 비전이란 건 매 순간 만들어 가는 거잖아요. 한 발자국 더 가려고 노력했을 때 거기에 있는 무엇일 뿐, 뚜렷한 문장으로 얘기할 만한 건 아닌 것 같아요. 적어도 지금의 저에게는 그래요.

사진촬영_장우제

※ 참고링크
문화예술 청년, 인생 UP 지원사업 가이드
문화예술청년, 인생 UP 데이트: 문화예술선배 30인의 서른 가지 길


필자소개 필자소개
주혜진은 대학에서는 불문학을, 대학원에서는 예술학을 공부했다. 『미술세계』, 『경향아티클』 기자를 거쳐, 현재 책에 관한 다양한 정보들을 담는 인터파크 도서 웹진 『북DB』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주혜진이라는 캐릭터를 연기하고 있다. 이메일

  • 페이스북 바로가기
  • 트위터 바로가기
  • URL 복사하기
정보공유라이센스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