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경영사람들'은 예술경영 현장에서 활동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의미 잇는 경험과 지혜를 공유하는 프로그램으로서 한국예술경영학회, 문화다움, 한국문화예술경영학회.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함께 진행하고 있다. 8인의 예술경영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동시대 예술 현장의 지식과 노하우를 공유하고 나아가 예술경영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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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경영사람들’ 네 번째로 안호상 국립극장장에 대한 소개는 지난 10월 28일 경희대에서의 강연과 인터뷰로 진행되었다. 여기서는 편의상 인터뷰 형식으로만 싣는다.

여기까지 오리라고는 상상 못 했던 입문기(入門期)

당시에는 이런 선택이 흔한 일은 아니었을 텐데, 우선 예술의전당 입사로 예술경영 분야에 입문한 동기와 과정을 이야기해 달라.
어려서부터 건축에 관심을 가졌고, 건축가가 되고 싶었다. 시골서 자라 그런지 나무 냄새가 좋았고, 목수들의 연장도 좋아했다. 대학 전공은 어쩌다 보니 정치학이었다. 그런데도 건축가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대기업에 그룹 공채로 입사하여 건축직을 희망했지만 엉뚱하게 인사팀으로 발령을 받았다. 포기하고 이번엔 다른 금융기관에 합격을 했는데 그 회사에서도 비슷한 보직을 줄 것이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차에 예술의전당 채용 공고를 보게 되었다. 당시 예술의전당 건립 준비단에서 낸 신입 직원 모집 공고 제목이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행정 요원을 뽑는다”였다. 타이틀도 멋있어 보였지만 복합아트센터니 아트컴플렉스니 하는 용어가 ‘건축적으로’ 근사해 보여 지원을 했다. 1984년이었다. 그때는 30년 이상을 이 바닥에 몸담게 되리라고는 물론 짐작도 못했다. 이 분야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예상 못하던 시절이었다. 기획팀에 발령을 받고 내가 맡은 일은 운영 계획을 세우고 건축 공모를 진행하는 것들이었다. 당시 공모자에는 김중업, 김수근 같은 거물과 젊은 건축가였던 김석철이 있었고, 또 런던의 ‘C.P.B’라는 건축 회사와 미국의 ‘리차드 부르커’라는 건축가가 있었다. 그런데 한국 건축가들과는 달리 이 사람의 요구 조건이 당시의 우리에게는 생소했다. 여기서 무엇을 할 것인지, 얼마나 할 것인지를 포함한 종합 운영 마스터플랜을 먼저 줘야 설계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준비단 측에서 내게 그 골치 아픈 일을 맡겼는데, 그때 자료라고 준 것이 딸랑 영문과 한글로 된 설계 지침서가 전부였다. 그러고는 나더러 그 사람의 질문에 답변해 주라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나는 운영 마스터플랜을 위해 한국무용의 김매자 선생, 연극의 손진책 선생 등에게 1년에 공연을 몇 번 하는지 등을 묻고 다녔다. 건립 후 소요되는 운영 예산과 소요 인력을 계획하는 것도 내 일이었다. 그렇게 기획 팀에서 10년을 보냈고, 그때 배운 것들은 내게 큰 자산으로 남았다.

회의를 딛고 일어선 성장기(成長期)

아마 그 무렵 예술의전당은 평생 일할 수 있는 곳이라는 예측이 가능한 최초의 기관이었지 싶다. 그 후의 성장 과정은?
그 와중에 마음속의 갈등이 있었다. 공사는 엄청나게 컸고, 겁도 났다. 또 내가 평생 예술가들을 뒷바라지하는 집사 같은 일이나 할 것 같았다(예술경영자, 기획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었을 통과의례 같은 것일까?). 사표를 세 번이나 써서 주머니에 넣고 다녔고, 내밀었다가 선배들의 설득에 다시 집어넣은 일도 두 번 있었다. 어느 날 우면산 꼭대기에 올라 공사가 한창이던 예술의전당을 내려다봤다. 그 순간 ‘내가 참 엄청난 죄를 저질러 놨구나’ 하는 충격을 받았다. 선배들은 많이 떠나고, 이걸 누가 감당해야 하나, 나마저 도망친다면 마치 범인이 야반도주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죄책감, 책임감, 이런 것들이 밀려왔다. 그러다가 공연기획팀으로 발령이 났다. 그전부터 공연기획을 해 보고 싶어서 계속 읍소를 했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던 회사가 어느 날 갑자기 그리 가라는 것이었다. 직원들과 팀장 사이가 안 좋아서 갈등을 빚고 있으니 차장인 내가 가서 중간 역할을 잘해 보라는 것이었다. 가서보니 나를 기다리는 것은 나보다 늦게 입사했지만 상당 기간 이미 공연기획을 경험한, 이미 이 바닥에서 한창 물이 올라 있는 후배 기수들이었다. 그들은 뭘 물어봐도 “그거 뭐 어렵지 않아요!” 하는 식으로 목에 힘을 줬다. 그들이 바로(이제는 말할 수 있다?) 김주호(2013년 작고, 전 롯데콘서트홀 대표), 이승엽(현 세종문화회관 사장), 고희경(현 홍익대 교수, 홍익대 대학로 극장장), 전해웅(현 예술의전당 사업본부장) 등이다.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서라도 나는 나대로 열심히 일하고 배워야 했다. 어린이 영어 연극을 기획하고 학습지 교사들을 만나 단체 관람 부탁도 하고, 심지어 학교 졸업식장에 가서 교장의 마이크를 빌려 공연 소개를 하는 일까지 했다. 조직 내부의 분위기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게 했다. 후배들을 사수로 생각하고 그들에게 묻고 또 물었다. 아래 기수인 박민정 공연기획부장과는 지금도 만나면 “나의 영원한 사수”라며 농담한다. 그렇게 하면서 사방의 좋은 사람들도 많이 알게 되었다.

위기관리를 통해 얻은 낙관(樂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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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초청 공연 때의 지휘자 대체 사건은 그가 자주 위기관리의 예로 드는 유명한 일화다. 간단히 옮기면 이렇다. 쿠르트 마주어 지휘, 바이올린의 장영주 협연으로 계획된 이 공연은 그해의 큰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지휘자가 첫날 공연 후 쓰러졌다. 다음날 공연을 취소하고 환불을 해야 할까도 생각했지만 그러면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부랴부랴 런던의 에이전트에게 SOS를 쳤다. 당시 아시아에 마주어를 대체할 만한 지휘자가 세 명 체류하고 있는데, 두 명은 이미 떠났고, 레닌그라드 필의 유리 테미르카노프가 일본에 있다고 했다. 밤 2시에 어렵게 수소문해서 술에 취해 있던 그와 통화했다. 그를 설득하고, 내가 예술가 초청 부탁을 들어주지 않아 소원해 있던 일본 에이전트에게도 사정을 했다. 오케이 사인을 얻었을 때가 새벽 4시. 이번에는 그의 한국 입국 비자가 문제였다. 상급기관인 문화부 차관에게 전화했다. 사정을 이야기하니 도쿄 영사관에게 연락해 줘서 새벽 7시에 영사의 집에까지 가서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관객들에게도 사정을 알리고 환불에 대비하여 현금도 준비했다. 단 4명만이 환불을 해 갔다. 그날 저녁 연주가 끝나자마자 일본으로 돌아가는 비자는 다시 문화부 차관에게 부탁해서(그도 이번엔 짜증을 냈다) 일본 대사관에서 어렵게 얻어 냈다. 항공편은 평소 알고 지내던 대한항공 간부의 도움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모 기관의 지인도 도와줬다.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아무 일 없이 공연을 치를 수 없었을 것이다.
정명훈 지휘로 바스티유 오페라 초청 때도 위기가 있었다. 보통 유럽에서는 10일 정도면 되었을 셋업을 바스티유 측에서는 한 달 동안 해야 한다고 했다. 당시엔 그만큼 우리를 믿지 못했던 것이다. 한 달이라는 시간을 확보하려면 대관이 확정된 다른 공연을 밀어내야 했다. 그 기간에는 《동아일보》 창립 기념 공연이 예정돼 있었다. 매니저인 정명훈의 형은 오케스트라만이라도 하자고 했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고민을 하다가 알고 지내던 프랑스문화원 직원에게 연락하여 주한 프랑스 대사 면담을 요청했다. 프랑스 대사로 하여금 《동아일보》 김병관 회장에게 부탁하도록 할 참이었다. 그런데 《동아일보》 내부에서 일이 쉽게 풀렸다. 프랑스 대사 면담 요청을 받은 김회장이 그 이유를 듣고는 흔쾌히 양보해 주었던 것이다. 세상에 안 되는 일은 없다는 것, 길이 없는 곳은 없다는 것을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몸으로 느꼈다(이 부분은 ‘후배 혹은 예비 예술경영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을 물었을 때 그가 꺼내 든 사례다. 세상에 안 되는 일은 없으니 낙관적인 태도로, 뭐든 악착같이 해보라는 뜻으로).

‘예술가에 대한 존중’, 서울문화재단 대표 시절

그는 2007년 예술국장을 끝으로 23년간 몸담았던 예술의전당을 떠나 서울문화재단 대표로 부임한다. CEO로서의 첫출발이다. 작년에 나온 『서울문화재단 10년 백서』를 보니 그의 서울문화재단 시절(2007~2011)은 그야말로 일 더미에 묻혔던 시기였다. 새로 서울시로부터 위탁받거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이전 협력 사업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남산예술센터의 위탁과 개관, 서울연극센터를 비롯해 현재 서울 시내 열 몇 개의 창작센터도 그가 있을 때 개관한 것들이다. ISPA(국제공연예술협회) 2012 서울총회를 유치하기도 했다. 링컨센터 예술교육연구소와의 협력이라는 질 높은 교육 사업도 그때 시작되었다. 엄청난 일을 소화하기 위해 조직을 늘리고 사람들을 대거 뽑고 관리하는 한편, 사업을 무난히 처리해 나간 시절이었다. 그때 팽창된 600억 규모의 예산은 지금도 거의 그대로다. 우리가 문화CEO로서의 그의 능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시기다. 그리고 기억난다. 그가 서울문화재단 직원들이 가져야 할 핵심 가치로 제시했던 것이 “시민에 대한 헌신”, “예술가에 대한 존중” 등이었던 것을. 세월과 경험이 그의 예술가에 대한 태도를 이렇게 바꿔 놓은 것인가. 글이 너무 길어질까 해서 서울문화재단 시절은 이 정도로 정리한다.


2015-2016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 발표회

▲ 2015-2016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 발표회

2015-2016 국립극장 레퍼토리 시즌 개막작 창극 <적벽가>

▲ 2015-2016 국립극장 레퍼토리 시즌
개막작 창극 <적벽가>

국립중앙극장의 부활(復活)

2012년 국립극장장으로 부임하여 ‘국립레퍼토리시즌제’를 들고 나오면서 국립극장이 문화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시즌공연 프로그래밍 방식은 일찍이 유럽에서 시작되었고, 패키지 판매 방식은 1960년대에 미국에서 본격화된 시스템인데, 이를 도입한 동기와 전개 과정, 성과를 이야기해 달라. 특히 성공의 핵심 요소를 무엇으로 봤는가?
처음엔 국립극장에 간다고 하니까 주변에서 왜 거길 가느냐고 말리는 사람도 있었다. 가서 한 달 정도는 우울했다. 내 인생과 경력이 여기서 꺾이려나 싶었다. 극장장이 새로 왔는데 업무 보고를 하는 직원도 없고, 사업 계획이며 예산 등을 내가 일일이 찾아서 파악해 나가야 했다. 좀 복잡한 걸 물어보면 관련 법령과 규정집만 가져다 놓고 나가는 직원을 보면서는 ‘내가 여길 잘못 왔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오기도 생기고 더욱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고민의 중심은 ‘국립극장이 국민과 예술계에 어떤 의미 있는 공간이 될 수 있을까?’였다.
과거 대한민국 예술의 중심이었던 국립극장은 아마도 1990년대 초반부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국립극장은 이런저런 도전을 받아 왔던 것이다. 서양 예술의 폭발적인 성장과 뮤지컬 등 민간 공연시장의 팽창으로 전통예술이 위협을 받아 온 가운데 예술의전당과 LG아트센터 같은 강력한 경쟁자들의 등장으로 국립극장은 점점 존재감을 잃어 갔다. 특히 창극, 한국무용, 국악관현악 중심의 국립극장 단체들은 현대성 혹은 동시대성의 상실이라는 위기가 있었다. 거기에다 프로그래밍도 제작 극장으로서의 미션은 간데없고, 뮤지컬 중심의 대관 공연이 대부분이었다. 시설의 낙후는 말할 것도 없었다.
‘레퍼토리시즌제’는 이런 국립극장의 새로운 부활을 위한 총체적 처방과 다름없었다. 2012년 8월 13일 국립레퍼토리시즌제를 발표하면서 대관 공연을 배제하고 국립극장 3개 단체의 공연을 메인으로 시즌 프로그램을 구성하였다. 없애지 않을 바엔 단체의 활동을 극대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전임 극장장들이 애써 제작해 놓은 <춤 춘향>, <수궁가> 등도 큰 도움이 되었다. 이전에 독립해 나간 국립극단, 국립발레단, 국립오페라단 등의 공연들도 더했다. 손진책 국립극단 예술감독에게 사정을 했더니 “가긴 가겠지만 달오름극장에서는 못 하겠다”라고 했다. 극장이 구조적으로 너무 열악했으니까. 그래서 꼭 고치겠다고 했다(작년에 리노베이션으로 재개관하여 그 약속을 지켰다). 무엇보다 전통 3개 단체의 공연은 동시대성의 추구가 핵심이었다. 연출가, 안무가 등의 새로운 제작진을 투입한 것도 그 때문이다. 100년 전에 출현한 창극, 신무용은 당시로서는 동시대적인 공연이었겠지만, 100년이 흐른 지금은 낡았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언론과 문화계의 반응이 좋았고, 무엇보다 관객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체와 작품 간의 내부 경쟁을 유도하기도 하고 첫 작품부터 매진이 되니 자연스럽게 경쟁 분위기도 생겼다. 첫 개관 작품인 한태숙 연출의 <장화홍련전> 7회 공연이 개막 전에 매진되니까 다음 작품인 <배비장전>에서는 단체 스스로가 티켓을 팔고 연습 시간도 늘리더라. <화선 김홍도>까지 연이어 매진되니까 분위기가 좋아지기 시작하는 게 눈에 보였다. 주역의 기회도 모든 단원으로 확대했다. 이렇게 되니 외부 연출가와 안무가들의 참여 열기도 고조되었다. <다른 춘향>을 연출했던 안드레이 서반은 처음엔 제안을 거절했다가 스승인 피터 브룩의 권고로 다시 돌아오기도 했다. 성과라면 양적으로는 작품 수가 종전 33개에서 64개로 거의 두 배가, 신작과 신작의 재공연이 9개에서 24개로 3배 가까이 늘었고, 시즌관객은 6만 3천 명에서 13만 9천 명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시즌이 거듭되면서 유료 객석 점유율도 꾸준히 늘었다(국립극장은 시즌제 도입 전 50% 전후에서, 시즌 3년차인 2014-2015 시즌에는 70%에 이르렀다고 발표했다. 이런 기록은 한국의 국공립 공연장에서는 드문 경우다). 최근에는 해외 공연도 늘었다. 내년엔 프랑스의 무용 전용 국립극장 샤이오와 공동 제작으로 서울과 파리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국내에서는 처음 서양식인 가을부터 다음 해 봄까지로 시즌을 정했다(역사적으로 이런 방식은 유럽의 오페라하우스 등에서 크리스마스 시즌부터 금욕 기간인 사순절 직전까지 3개월 정도였다. 그러니까 세속의 공연에 대하여 우호적이지 않았던 기독교의 영향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것이 점점 앞뒤로 늘어나서 현재는 9월부터 다음 해 6월까지도 간다). 그렇게 간 이유는?
여름 시즌은 공연에 몰입하기 어렵다. 모두 밖으로 나간다. 밤이 긴 겨울이 단절 없이 공연에 몰입할 수 있는 성수기다. 연말에 시즌 공연이 더 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혹자는 우리가 회계 연도가 달라서 어려울 거라고 말하던데 그렇지 않다. 회계 연도야 어느 나라나 같다.

시즌제 전후로 직원들의 반응과 행동의 변화는 어땠나? 그것을 어떻게 이끌어 냈는지?

국립극장

▲ 국립극장

시즌제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 달 정도는 조용하더라. 나는 시즌 북을 구상하면서 마침 그해 10월에 대관이 확정되어 있던 뮤지컬 <영웅>이 걸림돌이 되어서 윤호진 대표한테 사정하여 다른 극장으로 옮겨 가는 일 등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직원들이 따로 모여서 면담 신청을 해 왔다. 가 보니 첫마디가 “극장장님이 생각하는 시즌제가 뭔가요?” 하는 것이었다. ‘아, 내가 자세히 설명을 안했구나’라는 걸 그때 알았다. 상세하게 설명하고 나서야, 어떻게 하고 있는지 나를 감시(?)하며 주변을 맴돌던 직원들이 비로소 이것을 자기 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실 공연이 늘어나고, 그것도 대부분 자체 제작이라서 무대 직원들이 반발할까, 그것이 제일 걱정이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첫 시즌부터 매진되는 공연들이 나오고, 언론에 호평도 나고 하니까 실감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 <단테의 신곡>을 할 때는 서울 시내의 모든 인문학 강좌를 찾아다니며 홍보를 하고 <배비장전> 공연 때는 심지어 북한산에 등산 온 시민들에게까지 전단을 나눠 주며 티켓을 팔기도 했다.

2003년 예술의전당에서 야심 차게 시작한 시즌 방식은 왜 지속되지 못했는지?
그때는 잘 됐다. 확장된 관객을 놓치지 않으려고 해외 단체와 ‘센’ 예술가들을 많이 포함시켰더니 협찬이 자발적으로 들어오는 등 반응이 괜찮았다. 사실 기획자가 의지할 일반 관객이 없다 보니 제작비를 예술가가 부담하거나, 매표의 대부분을 출연자들이 해결하게 되어 기획자의 역할이 마치 예술가의 집사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술경영의 직업적 정의를 다시 해 보고 싶은 소망도 있다. 지금도 관객을 만드는 일이라면 웬만한 욕을 감수하는 이유가, 그것이 지금 우리 세대가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즌제는 한편 ‘끼워 팔기’가 가능한 시스템이다. 단독으로 하면 관객의 반응을 끌어내기 어려운 공연을 패키지로 넣으면 같이 주목을 받게 된다. 중단했던 것은 새로운 사장의 반대 때문이었다. 너무 해외 단체가 많다는 게 중단 지시의 이유였다. 예술 자원은 사실 유한하므로 레퍼토리 시즌과 패키지를 계속하기에 어려움도 있다. 그래서 레퍼토리 축적이 필요하다. 앞으로 국립극장은 50개의, 언제든지 공연할 수 있는 레퍼토리를 축적하는 것이 목표다. 그렇게 되면 여러 위험 속에서도 후배 예술가들과 경영자들이 더 마음 편하게 자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레퍼토리 시즌제와 관련하여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면?
이후의 문제가 있다. 서구에서는 패키지 판매 비율이 줄어드는 등 위기가 나타나자 미니시리즈, 자유 패키지 도입 등으로 대처했다. 그러나 불확실한 사회 분위기와 생활 패턴의 변화 등으로 여전히 패키지 판매는 줄고 있다. 그런 추세에 우리도 대비를 해야 한다(사실 그렇기는 하지만 아직도 시즌 방식과 패키지의 중요도가 낮아지지는 않았다. 싱글 티켓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주목하게 되었지만 여전히 패키지 관객이 마케팅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 패키지 판매 비중이 매우 작으므로 실상 시즌제 자체를 흔들 정도로 큰 문제는 아니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실정에 시즌제 자체가 무리라고 해석하는 것은 뭘 잘 모르는 데서 나오는 발상이다. 관객 기반이 약한 우리와 튼튼한 서구는 다르다. 우리는 뭐라도 해야 하고, 현재로서는 효용성이 높은 게 시즌제다(그래서 시즌제와 패키지는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시즌제는 시즌 프로그램을 일괄 공개하여 관객들이 입맛에 맞는 작품을 미리 고르게 하는 것과 전체 프로그램의 가치가 순차 공개보다 더 높아져 보이는 것에 더 큰 의미가 있다. 앞에서도 나왔듯이 주목도가 낮은 공연을 넣어서 같이 조명을 받는 것도 가능하다. 패키지는 시즌 공연 티켓 판매의 세련된 한 방식일 뿐이다).

리더십(Leadership)에 대하여

리더십은 어떤 스타일인가?
사실 지금까지 리더십에 대한 의식이나 생각은 많이 하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지난 봄 ‘문화예술기관의 리더십’을 주제로 한 한국문화예술경영학회 학술대회 토론자로 참여하여 그런 것을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거래적 리더십, 감성적 리더십, 변화적 리더십 등등…. 거래적 리더십도 사실 필요한 것 같다. 열심히 일한 직원에 대한 보상은 있어야 하니까. 그런데 국립극장 즉, 공공기관에 있으니 이게 참 어렵다. 권한이나 자원이 제한적이니까. 무엇보다 리더는 비전 제시가 명확해야 한다. 공감하는 목표의 깃발을 세우고, 특히 그것을 숫자로 이야기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직원들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주게 된다.

맺으면서

강연을 듣고 인터뷰를 하는 내내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던 것은 ‘이 사람 참 생각이 깊구나’라는 것이었다. 우면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했던 생각부터 국립극장 ‘부활’을 이끌기 전에 했던 고민까지. 시대의 흐름을 읽고 해야 할 일을 찾은 것은 깊은 생각의 힘일 터이다. 또 하나는 ‘사람’이다. 그가 국립극장장 연임이 된 직후, 공연을 보러 갔다가 로비에서 한 고참 직원에게 농담 삼아 “옆에서 보는 안 극장장의 힘이 무엇이라 보는가”라고 물었다. “영민하게 일을 잘 끌고 가는 것이 먼저이긴 하지만, 한쪽으로 기울지 않게 두루두루 사람 관리를 잘하는 것 같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를 두고 관운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 운이라는 것도 일을 잘하고 인맥이 두터운 데서 오지 않겠는가. 예술가들의 ‘집사 노릇’이 싫어서 사표를 두 번이나 던졌던 그가 지금 대한민국에서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가장 크게 미치는 사람 중의 하나가 되었다.


이용관 필자소개
이용관은 (사)한국예술경영연구소장, 한국문화예술경영학회장이다. 중앙일보 호암아트홀(부장), 부천문화재단(전문위원), 안양아트센터(관장), 대전예술의전당(관장) 등 극장경영으로 경력의 대부분을 보냈다. 공연예술 관련 정책, 예술경영, 문화예술 교육이 주 관심사이고 세부적으로는 관객개발에 가장 몰두해 있다. 저서로 『관객을 만드는 예술경영』, 『한국의 예술소비자(공저)』, 역서로 『극장경영-공연예술 제작과 유통(공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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