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경기민요 이수자 이희문은 스물여덟에 소리를 시작했다. 소리를 하기 전에는 백댄서가 하고 싶었고, 가수가 되고 싶었고, 자신이 재미있다 느끼는 것들을 하지 않을 수 없어 결국 연예기획사에 들어가 활동도 했다. 그리고 뮤직비디오 조감독으로 작업하다가 꽤나 먼 길을 돌아 경기민요 앞에 멈춰 서게 된다. 끼와 흥, 살아온 환경 등이 어우러져 소리에 입문한 지 채 몇 개월이 되지 않아 그는 전통예술계 내부에 자신의 존재를 강렬히 각인시켰고, 이후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들과 협업을 통해 경기민요를 새롭게 읽어 내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시도를 해 오고 있다. 그는 말 그대로 ‘잘 논다’. 깔아 준 판 위에서 휘적휘적 날아다니더니 이젠 더 잘 놀기 위해 자기 맞춤형 판들을 직접 깔기 시작했다. 바로 이런 겁 없으면서도 되바라진 행보가 지금의 이 특별하고도 특별한 이희문을 만들었다.

사실 자기 전공을 살린 직업을 갖는다는 게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오히려 예술 전공자들은 그 전공을 반드시 살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이런저런 문제에 부딪치기도 하는 것 같아요. 소리를 전공한 학생들은 어떤가요?
대학 졸업하면 다 흐지부지 없어지죠. 국공립 단체에 취직하고 싶어 하지만 소리 하는 사람은 많이 뽑질 않아서요. 대개 전통 쪽에는 정말 뼛속까지 예술인의 삶을 살아오신 선생님들이 계시잖아요? 그런데 저는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소리를 하면서 예술경영도 알아야 하고요. 저는 아무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직접 찾아서 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고민하고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이 인터뷰를 제가 해도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인지 제가 할 수 있는 얘기는 결국 ‘자기 밥그릇 만들기’ 딱 하나인 것 같아요.


대개 전통 쪽에는 정말 뼛속까지 예술인의 삶을 살아오신 선생님들이 계시잖아요? 그런데 저는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를테면 소리를 하면서 예술경영도 알아야 하고요. 저는 아무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직접 찾아서 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시작하자마자 너무 본격적인 얘길 해 주시네요(웃음). 실은 이런저런 인터뷰를 통해서 어떻게 소리를 시작하신 건지, 그 이전에는 어떤 것들을 좋아하셨는지 이미 많이 얘기하셨잖아요. 그러니 저는 조금 다른 질문을 드려 보려고 해요. 어떤 전환점의 계기라든지 혹은 자기 확신에 관한 것들요.
이런저런 환경의 영향도 있겠지만 일단은 성격 탓이 크겠죠. 뭐든지 직접 경험을 해봐야 직성이 풀리고, 놀이 하나를 하더라도 끝을 봐야 그만두는 편이거든요. 처음 대학에 갈 때는 가고 싶은 데가 아예 없었기 때문에 정말 별 생각 없이 동물자원학과에 지원했던 거고, 당연히 학과 생활에는 흥미가 없었어요. 그러다 어릴 때부터 동경했던 가수의 꿈을 접지 못하고 결국 소속사에 들어가서 고생을 무지막지하게 한 거예요. 좋은 프로듀서를 만나지 못했던 것 같기도 하고, 어찌 되었든 그게 내가 생각했던 가수가 아니라는 건 분명히 알았죠. 그러고 나서는 군대 다녀와서 무작정 일본으로 갔어요. 그때만 해도 내가 가수의 꿈을 포기하면서 힘들었던 기억 때문에 좋은 프로듀서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일본에서는 뜻밖에도 영상을 전공하고 뮤직비디오를 제작해서 수상하신 경력도 있잖아요. 결국은 그런 경험들이 지금 작업을 하는 데 여러모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을 것 같은데요.
내 자랑하는 게 좀 우습지만 제가 편집은 꽤 잘했거든요(웃음). 워낙 좋아하기도 했고, 편집하고 싶어서 영상을 찍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때 영상을 했던 게 연출 콘셉트를 정한다거나 시각적인 감각을 예민하게 하는 데 많이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한데 무엇보다 큰 공부가 되었던 건 같이 작업하는 스태프들에 대한 마음이랄까, 그들에 대한 감사함과 애정을 표현하는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관객들한테 좋은 작품을 보여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작품을 만들 때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과 어떻게 작업해야 하는지 경험한 거죠. 지금도 작업하게 되면 먼저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얘기하는 걸로 시작해요. 서로에 대해 이해하게 되면 더 많은 것들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 <거침없이 얼씨구> (2012)


소리를 시작하게 된 건 스승이신 이춘희 명창님 눈에 띄어서였잖아요. 어머니가 고주랑 명창이시니 어릴 때부터 소리를 가까이 하셨겠지만, 그렇게 좋아하던 일이 있었는데 과연 소리가 진정 자기 길인지 고민은 없으셨나요?
맞아요, 어릴 때부터 저는 어머니 팬이었죠. 그때도 어머니가 공연을 보러 가신다기에 따라나섰는데, 꼬마 때 뵀던 이춘희 선생님께서 우연히 제가 흥얼거리는 걸 들으시고선 소리를 해 보지 않겠냐고 말씀하셨어요. 스물일곱까지 살면서 그런 얘기를 들었던 건 정말 처음이었거든요. 일단은 시작해 봤는데 두어 달 연습했을 무렵, 선생님께서 대회에 한번 나가 보자 하시더라고요. 근데 거기서 덜컥 2등을 해 버린 거예요. 그때부터 ‘내가 이걸 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부분 소리꾼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지 않나요. 시작이 꽤 늦었던 셈인데 그로 인한 불안함이나 조급함도 있었을 것 같아요.
실상 슬럼프가 찾아왔던 건 3년 정도 지났을 때였어요. 고음을 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됐죠. 지금은 남자 소리꾼들이 거의 없어서 선율 악기의 연주 자체가 여자 음역대에 맞춰져 있거든요. 가까스로 따라가기는 하지만 어떤 극한 같은 걸 느꼈어요. 단순히 그 음을 내고 있을 뿐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발성 치료도 받고 남몰래 가수들이 다니는 학원에 보컬 트레이닝도 받으러 다녔어요. 득음이라는 게 소리를 얻는다는 얘기잖아요? 그건 결국 소리 내는 방법을 얻게 되는 거거든요. 몸통 전체를 써서 내가 낼 수 있는 모든 소리의 방법을 알아 가는 건데, 그게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사람마다 얼굴 형태나 구강구조 등에 따라서 소리가 나오는 경로가 다르기 때문에, 그건 정말 자기가 알아 가는 수밖에 없어요. 스승이 온전히 전수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죠.


큰 공부가 되었던 건 같이 작업하는 스태프들에 대한 마음이랄까, 그들에 대한 감사함과 애정을 표현하는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관객들한테 좋은 작품을 보여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작품을 만들 때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과 어떻게 작업해야 하는지 경험한 거죠.



어디나 마찬가지겠지만 같은 분야 안에서 가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지켜야 할 질서나 규칙 같은 게 있게 마련이잖아요. 전통 커뮤니티 안에서 이희문이라는 존재는 꽤나 낯설었을 것 같은데 어땠나요?
욕을 몰고 다녔죠(웃음). 같은 분야에 어머니가 계셨기 때문에 내가 하는 실수가 유독 부각되기도 했고, 워낙 자유로운 직종에 있다 왔으니 옷차림이나 행동 하나하나 선생님들 보기에는 아마 마땅치 않으셨던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무엇보다, 누군가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너무 작은 밥그릇을 앞에 두고 서로 차지하려다 보니 그런 문제들이 생기는 건데, 저는 선생님이 부르시거나 후배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가 아니면 아예 민요 쪽에 계시는 분들하고 교류를 하지 않았어요. 사실 대회 같은 데 나갔던 것도 내가 연습한 노래를 누군가한테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지, 문화재 같은 것에는 애초에 관심이 없었고요.


그러다 작업의 전환을 맞게 된 게 안은미 선생님을 만나면서부터였던 거죠? 지금의 이희문컴퍼니는 어떻게 만들게 된 건가요?
처음에는 협회에서 공연을 기획하거나 연출하는 일을 했는데, 대개의 전통 공연들이 어떤 콘셉트가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잘하는 거 나열해 놓고 그럴싸한 제목을 붙이는 식이었거든요. 그러다가 2007년에 안은미 선생님 작업에 참여하게 됐고, 현대무용이나 다른 장르의 공연들을 접하고선 새로운 시도를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컴퍼니를 만들게 된 건 좀 우연한 계기인데, 2008년에 처음으로 제 공연을 했거든요. 그때 공연 포스터를 가만히 보고 있다가, 주최 주관에 들어 있는 ‘한국전통민요협회’가 저와 너무 안 맞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어요. 그 이후 1인 기업이든 뭐든 내 걸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이런저런 기관들과 일을 하다 보니 사업자가 필요해져서 컴퍼니도 만들게 된 거예요.


▲ 씽씽밴드(2015)


젊은 작업자들한테 언제나 가장 절실한 건 펀딩의 문제잖아요. 어떤 경로들을 통해서 작업을 하셨는지 얘기해 주셔도 좋고, 현재의 지원 제도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공유해 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모두에게 골고루 지원금을 나눠 주는 것도 좋지만 실상 지원금만으로 공연 하나를 제작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잖아요. 그러니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금액을 책정해 한 팀이라도 제대로 지원해 주는 게 낫지 않나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다른 한 가지, 저는 순수예술이 대중문화로부터 배워야 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홍보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거예요. 어찌 되었든 대중문화는 스타를 만들어 내잖아요. 그런데 순수예술이 그걸 어떻게 알아서 하느냐는 거죠. 보다 적극적인 홍보를 통해 창작자들을 많이 알리는 일을 해 주셨으면 해요.


저는 이 얘기는 꼭 하고 싶어요. 난 이걸 하고 싶은데, 이렇게 하면 날 이상한 사람으로 보겠지 싶은 거, 바로 그런 걸 하라고요. 그거야말로 자기밖에 못 하는 거라고요. 요즘 같은 세상에는 재능 있고 끼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런 가운데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건 참으로 아슬아슬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과 더불어 이 시대 청년 예술인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부탁드릴게요.
실은 그사이 씽씽밴드라는 팀을 하나 결성했거든요. 홍대 클럽에서 공연도 했고, 올해 그 밴드 공연을 몇 차례 할 계획이 있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 나한테 맞는 것, 내가 거쳐 온 시대를 통해 내 몸속에 자연스럽게 남아 있는 것들을 하는 거예요. 지금 하고 있는 작업들도 민요를 대중화하려는 노력이라기보다는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제 방식대로의 시도를 해 보는 거죠. 무엇보다 저는 이 얘기는 꼭 하고 싶어요. 난 이걸 하고 싶은데, 이렇게 하면 날 이상한 사람으로 보겠지 싶은 거, 바로 그런 걸 하라고요. 그거야말로 자기밖에 못 하는 거라고요. 요즘 같은 세상에는 재능 있고 끼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그런 가운데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건 참으로 아슬아슬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용기를 가져야죠. 하고 싶은 걸 하세요.

사진촬영_장우제

※ 참고링크
문화예술 청년, 인생 UP 지원사업 가이드
문화예술청년, 인생 UP 데이트: 문화예술선배 30인의 서른 가지 길


필자소개 필자소개
김슬기는 창작을 위한 읽기와 기록을 위한 쓰기를 하고 있다. 공연예술의 창작과 수용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가치에 주목한다. 월간 『한국연극』 기자로 근무했고, 국립극단 학술출판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연극과 관련된 출판물과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대학원에서 연극 이론을 공부하고 있으며, 공연 드라마투르그를 비롯해 각종 연구와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다.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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