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공공미술 작품을 둘러싼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2016년 5월 일베를 상징하는 손가락 모양의 대형 조형물이 홍익대 정문에 세워졌다. 이 대학 조소과 4학년인 홍기하가 '환경조각연구 야외조각전'에 출품한 작품으로 기념비 조각이 가져온 전근대적 미학의 문법을 따른 거대한 크기의 하얀 조각상이었다. 작품은 설치와 동시에 거센 논란을 일으켰고, 이틀 뒤 '랩퍼성큰'과 두 명의 홍대 재학생에 의해 크게 파손된 후 작가 측에 의해 철거되었다. 작가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제가 일베를 옹호하느냐 비판하느냐를 단정 짓는 이분법적인 의도는 담고 있지 않다"는 다소 모호한 입장을 밝혔고 "실체가 없는 일베를 실체로 보여줌으로써 논란과 논쟁을 벌이는 것이 작품의 의도다"라고 덧붙였다.



홍기하,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다>, 2016 ▲ 홍기하,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다>, 2016
http://limpbizkit.tistory.com/123


2016년 4월 이화 벽화마을 주민 3명이 61개 계단에 걸쳐 타일을 이어 붙여 만든 꽃 그림을 회색 페인트로 덮어버렸다. 계단 옆쪽 벽면에는 붉은색 래커로 '주거지에 관광지가 웬말이냐, 주민들도 편히 쉬고 싶다'는 글씨가 씌어 있었다. 주민들은 "이곳에 벽화가 생긴 이후 밤낮없이 소음과 낙서, 쓰레기 투척에 시달렸다"며 "구청에 수차례 민원을 제기했지만 전혀 개선되지 않아 이웃 주민 34가구의 동의를 받아 벽화를 지웠다"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10년 전인 2006년 '소외 지역에 거주하는 이들과 문화를 더불어 나눈다’라는 기치로 진행된 <낙산 공공미술 프로젝트> 작업이었다. 당시 언론은 지역 주민들의 삶을 담은 공공미술의 모범적인 예라고 평하며 이진남(81) 할머니의 소감을 담았다. “몸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려진 귀한 선물입니다.”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쳐 직접 걸어 다니기 어려운 계단에 그림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좋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홍기하, <어디에나 있고, 아무데도 없다>, 2016 ▲ 이화마을벽화
http://www.healingdiscovery.co.kr/view.asp


공공미술은 ‘공공’과 ‘미술’이라는 함께 하기 어려운 두 가치가 공존하는, 태생적 모순을 가진 예술 영역이다. 공공미술은 미술관이나 갤러리처럼 관객이 미술을 관람하기 위해 찾아가는 화이트큐브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공간에서 진행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예술적 비전과 사회적 가치가 공존해야 하는 공공미술에서 '내 예술적 표현의 자유를 위해 타인의 삶과 일상이 침해될 수 있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폭력이 되는 것이다. 일베 조각상 파괴를 두고 “어떤 대의를 위해서 남의 표현의 자유를 폭력적으로 짓밟아도 된다고 믿는 자들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적들입니다. 일베보다 더 무서운 게 이런 짓 하는 놈들입니다”라고 말한 진중권의 경우는 그 상투적 사례다. 공공미술에서 절대적인 표현의 자유 주장은 공공미술에 대한 무지의 산물이다.

'도시가 작품이다. 삶이 예술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서울시가 도시갤러리 프로젝트를 시작한 게 2007년이다. 모뉴먼트 성격의 천편일률적인 공공미술을 벗어난 다양한 실험을 위해, 그 공익적 기능과 커뮤니티 아트 등 비물질적 공공미술 프로젝트 지원을 위해 의욕적으로 32억 원의 예산을 들여 시작되었다. 하지만 많은 예술행정 프로젝트가 그러했듯 예산의 대폭 삭감과 행정제도의 개편 속에 사라졌다. 결과물로 서울 곳곳에 설치된 공공미술작품들은 관리 소홀로 철거되거나 파손된 상태로 남아 있을 뿐이다. 도시갤러리 프로젝트가 경계했던, 건축비의 1% 법 때문에 설치되는 공공조형물들은 여전히 막강한 시스템 안에서 많은 ‘예술 업자’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

여전히 공공미술의 정체와 경계는 불분명하고 공공미술의 소통에 관한 깊이 있는 논의도 부족하다. 비평적 검토 작업 없이 일방적인 찬사 위주로 공공미술을 이야기하는 낭만적 옹호론을 넘어서야 한다. 맹목적인 ‘표현의 자유’ 옹호가 아닌, 공공미술에서 ‘공공’이 갖는 의미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반달리즘을 의도적으로 불러일으켜 작가 개인의 홍보 마케팅으로 사용하는 행위에 대한 냉정한 견제와 함께, ‘공공’과의 미적 조율을 위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공공미술을 훼손하는 행위에 대한 무작정한 비난 대신, 생각의 차이들을 나누는 공론장을 만들어야 한다. 1989년 3월, 뉴욕 맨해튼의 연방청사에서 근무하는 이들의 보행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리처드 세라의 <기울어진 호>가 철거되었다. 시민들은 예술가가 갖는 표현의 자유보다, 그 작품으로 인해 삶의 불편을 겪어야 하는 사람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철거 캠페인과 청문회까지 자그마치 8년이 걸렸다.



리처드 세라, <기울어진 호>, 1981, ⓒ앤 쇼벳 ▲ 리처드 세라, <기울어진 호>, 1981, ⓒ앤 쇼벳

공공 미술의 사회적 책임이 본격적으로 공론화하게 된 건 1990년대 수잔 레이시가 ‘새 장르 공공미술’을 주장하면서였다. 새 장르 공공미술은 일상과 미학이 공존하며, 예술을 만든 이와 사용하는 이가 소통하여 예술과 삶을 잇는 새로운 세계를 열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는 과거 공공미술이라 여겨졌던 천편일률적인 기념비 조각과 위인 조각상에 대한 비평이며, 미술관 안 미술이 사회적 책임을 외면한 채 표현의 자유를 낭만적으로 구가하는 행위에 대한 비평이며, 현대 예술이 특정 계층의 이데올로기를 만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현실에 대한 비평이다. 예술이 추구하는 순수한 미학 외의 사회적 가치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느냐 하는 문제를 충분히 고려하자는 게 ‘새 장르 공공미술’의 목표였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예술은 집단 최면 상황 또는 파시스트 사회가 아닌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공공장소에 예술을 끼워 넣는 일이 ‘공공미술’은 아니며, 공공과 소통하고 조율해 가는 공론의 장까지도 공공미술의 영역이다. 일베 조각상을 둘러싼 논란은 물론, 파손 행위와 철거까지도 공공미술의 영역에 속한다고 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공공미술에서 소통은 무엇보다 중요한 공공적 작업이다. 소수만이 미술을 즐기는 것이 아닌 더 많은 사람들이 미술을 향유할 수 있는 공공미술은 한 사회에 실재하는 미감들을 대변하기에, 늘 논쟁적인 상황에 놓일 수 있고 또 놓여야 한다. 보존의 문제, 소통의 문제, 공공 영역의 문제 등 공공미술에 대한 논의의 업그레이드가 절실하다.

양지윤필자소개
양지윤은 코너아트스페이스의 디렉터이자 미메시스 아트 뮤지엄의 수석 큐레이터다. 암스테르담 데아펠 아트센터에서 큐레이터 과정에 참여했다. 주요한 기획 전시로는 2007년부터 디렉팅한 <사운드이펙트서울: 서울 국제 사운드아트 페스티벌(공동 감독: 바르흐 고틀립)>과, 2015년 광주 국립 아시아문화전당의 개관 전시 <플라스틱 신화들>이 있다. 기존 현대미술의 범주를 확장한 시각문화의 쟁점들을 천착하며, 이를 라디오, 인터넷, SNS를 활용한 공공적 소통으로 구현하는 작업에 꾸준한 관심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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