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에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고등학교 시절에 글 쓰는 것을 좋아해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사람에게 글과 조명은 결코 다르지 않고 여러 가지가 닮았다. 무대라는 하얀 캔버스를 내려다보며 어둠과 밝음 사이의 세밀한 농도로 관객의 눈을 이끄는 사람이다. 스물한 살부터 외길을 걸어온 탁형선 조명감독을, 하루에도 수십 편의 공연이 올라가는 공연의 마을 대학로에서 만났다.

조명은 글쓰기와 같다

탁형선 조명감독은 빈 종이에 끄적끄적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공상하고 시나 소설을 쓸 때 제일 행복했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되려고 했으나 고등학교 때 연극하는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서 “시와 소설이 연극과 접목되면 좋겠다”라는 꿈을 가졌다. ‘인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나름의 철학으로 사색하고 두 편의 희곡도 썼다. 그리고 연극과에 입학하게 됐다.

대학 생활은 어땠나요? 입학하고 보니 그곳은 끼를 가진 아이들로 똘똘 뭉친 별천지였어요. 저는 글을 쓰던 사람이라 내향적이었는데 외향적인 분위기에 기가 죽더라고요. 아웃사이더로 겉돌던 저를 잡아 준 곳은 ‘극장관리단’이라는 동아리였어요. 학교 내 공연장(소극장)의 조명·음향·무대를 맡아서 관리하는 곳이었는데 이때 처음으로 조명이라는 것을 만나게 되었죠. 학교를 다니면서 이전처럼 희곡을 쓰고 무대에서 조명도 만지고, 연기를 하는 기회도 주어졌어요. 연극 전공이라 다양한 환경에 노출된 것은 일을 하면서 큰 장점으로 작용했어요. 그리고 동아리 활동에서 벗어나 프리랜서로 아르바이트 조명 일을 맡기도 했고, 중간에 아르코극장에서 조명 스태프 인턴도 했었죠. 스물하나에 조명을 알았을 때부터 서른일곱이 된 지금까지 18년 동안 오직 한길만 걸어온 것 같아요. 여자가 조명을 하면 힘들 것이라는 편견이 있는데 저는 제가 여자라는 사실에 크게 신경 써 본 일이 없었어요.

조명계에서 일하는 여자 분들이 많은가요? 조명계의 성비를 보면 여자가 더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제가 지금까지 경험했던 곳에서는 대부분 여자들이 조명을 맡았어요. 학교 선배들 중 조명을 하는 이는 모두 여자였고, 지금 아르코예술극장의 조명 인턴들도 모두 여자예요. 조명을 하는 데 남녀가 구분되지 않아요. 혹시 여자라서 기계를 다루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면 기우입니다. ‘이 작품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라는 욕심이 들면 ‘저 콘솔을 마스터해야겠다’라는 마음이 절로 생기니까요.

글을 쓰다가 조명을 하셨는데, 어떤 점이 성향에 잘 맞으셨나요? 조명이 빛을 주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아요. 글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명도 맥락이 있어요. 글이 잉크로 쓰는 거라면 조명은 빛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작가가 등장인물을 바라보듯 조명을 하면 공연의 큰 그림으로 무대를 볼 수 있어요. 글에 서론, 본론, 결론이 있듯 조명도 모든 상황의 앞뒤 맥락을 해석하며 빛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 있어요.

그의 말처럼 조명에는 밝음과 어둠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연출한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서서히 물들어가는 노을처럼 모르는 사이에 극 안으로 빠져들어 간다. 같은 붉은색이라도 관객은 빛의 농도에 따라서 심상이 변해 가고 이야기를 느끼는 감정의 온도가 달라진다. “연극 무대라는 특정한 공간에서 빛의 조율을 통해서 사람들의 눈을 이끌고 서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다”라는 그의 말처럼, 세밀한 빛의 농담(濃淡)을 표현하기 위해 시를 썼던 때처럼 섬세하게 극을 분석하고 표현법을 연구한다. 조명 콘솔은 큰 붓펜이다.

공간을 노래하는 사람

탁 감독은 대학을 졸업한 2006년부터 2010년까지 프리랜서로 활동했다. 외국에는 조명 라이센스가 있어야 하지만 한국의 경우 도제식으로 교육을 받고 인맥을 통해 작품의 스태프로 들어가서 일을 계속하게 된다. 그만큼 냉정한 현장에서 실력을 보이지 못한다면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 그는 강동아트센터의 조명감독으로 3년을 일한 뒤, 2013년부터 한국공연예술센터 무대예술부의 조명감독으로 근무하고 있다.

지금까지 올린 공연들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지금까지 무용과 연극 등 다양한 공연을 해 왔어요. 주요 작품으로는 무용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나>, <음형공간>, <비행>, <영광주택마동 201호>, 연극 <하카나>, <팬티입은 소년> 등이 있어요. 그리고 다원 예술인 <거문고스페이스>도 맡았었죠.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센터는 조명디자이너로서의 역량을 펼칠 수 있는 곳이라 그곳에서 제가 한 단계 도약할 수 있었죠. 첫 번째 연출작은 스물일곱에 맡은 작은 무용 공연이었어요. 업계로 치면 나이가 어린 편에 속했어요. 하고 싶은 게 많았는데 기술적으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라서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나요. 그래도 가장 힘들었던 것은 소통의 부재였어요. “연출가가 의도한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작가는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가”를 묻고 답하며 소통하는 시간이 부족했어요. 어떤 누구도 질문을 하거나 대화를 하지 않았어요. 그때는 연출자와 조명감독이 예술가와 기술자로 분리되어 있어 서로가 그리는 것이 다른 듯 느껴질 때가 많았어요. 그래서 저부터 바꾸기로 마음먹었어요.

일하면서 겪는 어려움을 어떻게 타개했나요? 조명 디자인을 시작하고 나서 가장 큰 난제는 다른 예술인들과의 대화에서 겪는 어려움이었어요.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우리 세대에게 다른 예술가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나의 철학을 갖고 심도 깊은 대화를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공연을 하면 연습실을 찾아다니며 대화를 시도했어요. 처음에는 어색해했죠. 연출가와 대화하면서 끊임없이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내가 틀린 게 아니었을까?’, ‘이게 맞을까?’ 하는 불안감이 자연스럽게 해소되었어요. 지금도 같이 일하는 스태프들과 끝없이 이야기하면서 합을 찾아가고 있어요.

깊이 연구하고 새로움에 눈떠라

첫 번째 고민이 소통에 대한 것이었다면 두 번째 고민은 상상력이었다. “예전에는 클라이맥스니까 빛을 세게 해서 강조해야 한다는 정해진 공식 같은 것이 있었어요. 그런데 하면 할수록 이런 게 맞을까 고민하게 됐어요.” 탁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주입식 교육을 받아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 조명으로 그림을 그리려고 하니 한계에 봉착한 것이다.

선입견에 번번이 가로막히니, 자유롭게 상상하고 그것을 무대에 그려 내어 관객의 마음까지 움직이게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서른다섯에 들어간 대학원에서 예술적 감각과 경험을 확장하는 시간을 찾을 수 있었다. 학교에서 미학, 심리학, 예술학 등 동시대의 문화를 관통하는 지식을 공부하면서 생각하는 방식을 재정립하고, 공연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을 세우고 있다. ‘정말 아름답다는 것은 뭘까?’, ‘A는 맞고 B도 맞는 것이 존재할까?’ 같은 질문을 하며 본질을 찾아가고 있다. 그리고 궁극은 ‘인간의 다양함과 다름을 얼마나 이해하느냐’로 귀결된다는 걸 깨닫고 있다.

연극학과를 졸업한 것이 지금 일을 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었나요? 모름지기 연극학과를 구성하는 것은 개성 넘치는 사람들이죠.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연극학과에 가라는 말을 하고 싶을 정도로 다양한 인간 군상이 존재하고 교류의 폭이 넓은 곳입니다. 극과 극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들은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 내죠. 현장에서 수많은 스태프와 대화하고 캐릭터를 이해해야 할 때, 연극학과를 졸업해서 인간에 대한 이해의 깊이가 깊어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언젠가 자신이 조명 디자인한 공연을 객석에 앉아서 볼 때가 있었다. 객석에 앉으면 보통의 경우 부족한 점, 아쉬운 점만 눈에 띄어서 극에 전혀 몰입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날은 객석에 앉아서 완전히 작품에 몰입하며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조명이 극에 녹아들어 이야기와 함께 흐르고 있었다. ‘내가 만든 공연을 즐기고 있구나.’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기쁨으로 차오르는 그 순간, 인생이란 무대에서 ‘탁형선’이라는 주인공을 향해 핀 조명이 켜졌다.

인생UP데이트

가끔 조명을 하겠다거나 직업을 구하는 일에 힘들어하는 어린 친구들이 찾아와 조언을 구할 때가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제가 처음 묻는 질문은 “그걸 하면 네가 정말 행복하겠니?”입니다. 대부분의 사람한테는 돈을 버는 일과 자신이 행복해하며 즐기는 일이 서로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돈을 버는 일은 수단이므로 행복까지 얻으려고 하는 것은 욕심이라는 것이죠. 하지만 예술 현장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그 두 가지가 일치한다고 생각해요. 이 일로 자신이 행복할 수 있는지가 무척 중요해요. 자신에게 한번 물어보세요.

탁형선 프로필
학력
- 상명대학교 연극과 졸업
- 성균관대학교 예술학협동과정 재학 중

주요 경력
- 前 강동아트센터 조명감독
- 現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대학로 예술극장 무대예술부 조명감독

주요 활동
- 다원 <거문고스페이스>
- 무용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나>, <음형공간>, <비행>, <영광주택 마동 201호>,
- 연극 <하카나>, <팬티입은 소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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