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0일과 21일 양일동안 미국 로스 앤젤레스에 위치한 한 미술관에서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심포지움 <전후 한국 현대미술(1953년부터 현재까지): 충돌, 혁신, 그리고 상호작용(From Postwar to Contemporary Korean Art [1953-Present]: Conflicts, Innovations and Interactions)>이 개최되었다. 라크마 박물관 (LACMA: 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으로도 알려져 있는 본 미술관은 미국 남서부 및 세계의 현대미술을 움직이는 주요한 북아메리카의 허브이다. 1961년에 독립적인 기관으로 시작한 라크마 박물관은 미국 서부에서는 가장 큰 미술 중심의 박물관 규모를 자랑한다. 또한 북미에서는 한국미술에 대한 예외적인 관심과 투자를 바탕으로 다양한 실험적 시도를 해오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예술경영지원센터, 그리고 라크마 박물관과 벽산장학문화재단의 후원으로 추진된 본 심포지움은, 지난 60여년 동안 전개된 한국 현대미술의 다양한 전개양상을 깊이 있는 학술적 시각으로 접근하는 거의 최초의 영문 학술서적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1) 일본과 중국의 현대미술에 대한 연구가 상대적으로 탄탄한 학문적 기반을 구축해오며 또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아오고 있는 상황과는 달리, 영어권 학계에서의 한국 현대미술 연구는 상대적으로 미약한 것이 현실이다. 영어권 대학 수업에서의 한국 현대미술은 비서구 혹은 아시아 미술의 일부로서 짧게 소개되거나, 혹은 21세기의 변화하는 상황에 대한 충분한 학술적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특정 미술사조나 시기에 국한하지 않는 한국 근현대미술에 대한 균형 있는 관점을 제시하는 교과서나 연구서적은 거의 부재한 상황이다. 한국전쟁 후의 한국미술이 회화와 조각, 아방가르드 영화와 퍼포먼스, 그리고 확장하는 매체 기반의 설치미술과 인터넷 미술 등 매우 다양하고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오고 있는 것에 반해, 한국미술에 대한 외부적 시선은 한국의 지리와 정치, 그리고 일상생활과 그 문화적 층위에 대한 충분히 균형 잡힌 시각이 부재한 까닭에 여전히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 정연심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교수),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관장), Keith B. Wagner (University College London 영화학 교수), 그리고 Kimberly Mee Chung (홍익대학교 예술학과 교수)의 공동 편집에 의해 추진된 이번 심포지움은 이러한 상황을 의식하며, 한국미술에 대한 단순한 소개를 넘어서 깊이와 다양성을 수반하는 일련의 사례연구들을 통해 새로운 학술적 플랫폼을 제시하는데 주목한다.

1)본 심포지움은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해외 출판을 준비 중인 한국미술 영문 개론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필자와 연구자들이 심포지엄에 발제자로 참여하였다.

한국의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 그리고 모더니티

행사의 첫째 날은 1953년에서 1987년까지의 한국의 아방가르드와 모더니즘, 그리고 모더니티의 주제 아래 진행되었다. 이날의 구체적인 발표주제는 다음과 같다 (본 순서는 당일 행사의 발표순서와 동일하다): 1) 이중섭과 박수근을 포함한 한국전쟁 이후 미술가들의 작품 분석을 통한 한국미술의 전환점 탐구 (박계리); 2) 1953년부터 1988년까지의 건축과 도시의 발전과정, 그리고 한국건축의 근대성 (우동선); 3) 곽인식과 이우환 등 전후 일본에서 활동한 한국인 출신 미술가들의 작업, 그리고 ‘정체성 위기’에서의 새로운 미술의 등장 (이미나); 4) 신체와 젠더, 언어와 환경 등의 주제들에 주목한 전후 아방가르드 미술의 역사화 (정연심); 5) 백남준의 초기 비디오 작업 분석을 통한 미디어 포퓰리즘 시대의 참여의 문제 (William Kaizen); 6) 그룹 ‘현실과 발언’의 작업 분석을 통한 1980년대 이후의 민중미술, 그리고 변화하는 도시공간과 시각문화의 탐구 (신정훈); 7) 역사적 기록 이상의 수행적 매체로서의 한국의 실험사진 (이영준); 8) 1950년대부터 1970년대의 ‘황금기’ 한국영화의 사례분석과 맥락화 (Michelle Cho); 9) 정신분석학과 프랑스 영화이론을 바탕으로 하는 차학경의 1970년대와 80년대의 비디오 및 설치작업 분석, 그리고 이를 통한 망명과 귀향의 주제 탐구 (Lawrence R. Rinder); 10) 한국미술의 전환기로서의 1990년대를 구성하는 일련의 미술실천의 소개와 분석 (김선정).

윌리엄 카이젠(William Kaizen)_독립큐레이터 윌리엄 카이젠(William Kaizen)_독립큐레이터 로렌스 린더(Lawrence Rinder)_UC 버클리대학교 미술관 관장 로렌스 린더(Lawrence Rinder)_UC 버클리대학교 미술관 관장

첫째 날의 발표는 근현대 한국미술의 지배적인 흐름인 단색화와 민중미술과 같은 비교적 잘 알려진 미술사조들을 포함하는 한편, 나아가 전후 한국의 상황 아래에서 전개되는 독특한 전위예술, 그리고 국가주의나 민족 정체성, 혹은 규범적 젠더의 프레임에 한정하지 않는 영화와 사진, 그리고 설치와 퍼포먼스 등을 포함한 사례들을 소개한다. 또한 미술과 건축, 그리고 시각문화의 교차연구는 본 프로젝트에서 주목할 또 다른 지점이다. 일본과 유럽을 거쳐 유입된 서양 근대건축의 언어를 통해 전개되는 한국 근대건축의 계보는 전통과 근대, 그리고 미적이고 윤리적인 갈등과 상호작용, 혹은 그것의 부재를 도시적인 스케일에서 탐구할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이다. 또한 1988년 이후의 건축은 지구화와 매체의 확장에 따른 공간의 실천과 경험이라는 측면에서, 미술과 건축, 그리고 시각문화의 접점을 탐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한국미술의 포스트모더니즘과 동시대성

전날에 이어, 둘째 날의 발표는 1988년부터 현재에 이르는 한국미술의 흐름을 ‘포스트모더니즘’과 ‘동시대성’이라는 두 주제어를 통해 접근한다. 이 날의 발표주제는 다음과 같다: 11) 여성의 신체를 주요한 정체성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한국 페미니즘 미술의 소개와 관련하는 주요 이슈 (고동연); 12) 매체이론과 신유물론을 기반으로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한국 매체미술 소개와 공간성 탐구 (최정은); 13) 1988년 이후의 한국건축과 시각문화의 주요사례 분석을 통한 건축과 지구화, 그리고 일상생활의 관계성 탐구 (백승한); 14) 미국 기반의 코리안-아메리칸 미술가들의 작업분석을 통한 디아스포라와 정체성 그리고 도시공간의 문제(Kimberly Mee Chung); 15) 젊은 미술가들의 매체작업 분석을 통한 포스트-인터넷 시대의 한국미술 지형도 그리기 (Christine Y. Kim).

백승한_연세대 인문학 연구원 전문연구원 백승한_연세대 인문학 연구원 전문연구원

전날의 발표 주제들이 국내에서는 어느 정도 친숙하고 정립되어 있는 미술사조라고 한다면, 둘째 날의 그것들은 상대적으로 새로운 종류이다. 매체의 확장과 유동하는 인식의 체계, 탈식민과 지구화 시대의 신체정치, 건축과 시각문화의 교차점, 21세기의 디아스포라와 미술실천, 그리고 인터넷 세대 한국미술가들의 세계인식과 작업과 같은 주제들은 여전히 논쟁적이며 이론적 정립이나 실증적 조사가 필요한 영역이지만, 그만큼 한국과 미국, 그리고 다른 세계의 일상생활과 맞닿아 있는 주제이다. 멀게는 1980년대의 페미니즘 미술에서부터, 가깝게는 2017년 한국의 넷플릭스 상용화와 그에 따른 새로운 문화실천 등의 주제를 탐구하는 둘째 날의 행사는, 때로는 기존의 미술사적 연구방법론이나 계보학으로는 충분히 파악하기 힘든 새로운 흐름과 그 열린 의미를 추적하고 생각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기회였다.

이번 심포지움에는 주로 LA에 위치한 대학과 미술관, 그리고 갤러리 등에 관계되는 한국미술 전문가 혹은 한국의 현대미술과 대중문화에 관심을 가지는 많은 이들이 방문하였다. K-POP이나 먹방,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과 또 다른 스펙터클로서의 한국의 도시경관, 혹은 북한의 프로파갠더 미술과 디아스포라 미술과 같은 경험을 통해 한국미술 (그리고 넓게는 21세기 한국이라는 동아시아적 현상 자체)에 관심을 가지게 된 많은 이들이 LA에서,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 등지에서 긴 주말의 시간동안 라크마 박물관을 방문하였으며, 이는 한국미술에 대한 폭넓은 관심과 체계적인 소개에 대한 필요를 반증한다. 본 행사에 참여한 필자 역시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갈증과 수요를 몸소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심포지움 참여자들 심포지움 참여자들

끝으로 이번 심포지움의 참석을 통해, 필자는 대상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그것에 대한 미적 차원을 탐구하기를 제시하는 칸트의 무관심성, 그리고 영화를 통해 건축의 물질성을 보다 잘 탐험할 수 있다는 발터 벤야민의 매체 논의는 어쩌면 먼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근현대 한국미술에 대한 기존의 연구성과와 한국이라는 지리적 조건에 대한 인식을 견고한 성으로 간주하거나 혹은 당연시하는 태도에서부터 어느 정도는, 일시적으로나마 거리를 둔 채, 그 현상 자체를 새로운 시각으로서 받아들이고 이를 면밀히 탐구하며, 때로는 이질적인 대화의 환경에서 보다 활발한 소통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 ‘지금 여기’에서 마주하는 한국의 미술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아닐까? 이번 LA 심포지움이 그러한 기회였으면 하는 바람을 스스로 해 보면서, 본 미흡한 후기를 마치고자 한다.

  • 백승한
  • 필자소개

    백승한은 연세대학교 인문학연구원의 연구원으로 활동중이다.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를, 그리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미술사학 박사를 취득하였으며 그 후 예일대학교 동아시아학 센터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근무하였다. 주요 연구분야는 근현대 미술과 건축, 도시론, 일상생활의 철학적 담론, 분위기와 정동이론, 그리고 공동체와 공공 공간 탐구이다. 최근 연구는 Korea Journal와 Positions: Asia Critique을 포함한 다수의 논문집에 게재되었다. 또한 정림건축의 공간지 특별호인 <일상감각: 정림건축 50년>을 총괄 기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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