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기세가 좀 수그러들었지만 한때 돌풍처럼 한국 사회를 휩쓴 것이 ‘인문학 열풍’이다. 강연 제목이나 책 표제에 ‘인문학~’이라는 표현을 붙이는 시류가 봇물을 이뤘다. 몇 년 지나자 인문이라는 말이 그저 상표로, 유행으로 나부낀다는 인상이 짙었다. 인문학이 상품가치로 소모된다는 반성이 늦게나마 인 것은 다행이었다.

제4차 산업혁명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태도도 이에 비견할 수 있다는 우려가 들던 차에 예술경영지원센터가 기획한 ‘예술+α : 4차 산업혁명과 문화예술’에 사회자로 참여하게 되었다. 강의를 모두 들어보니 시의적절 했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2회 차 프로그램인 이상욱 한양대 철학과 교수의 ‘낯선 기계 지능과 함께 살아가기’는 4차 산업혁명과 기계지능에 대한 배경부터 현장까지 다양한 관점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문화예술 종사자에게 유익한 강연이었다고 평가한다.

인공지능이 문제 아니라 인간지능이 문제

이상욱 교수는 강연 제목 ‘낯선, 기계 지능과, 함께 살아가기’에 이미 우리 사회가 오독하고 있는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문제의식을 명확하고 적절하게 드러냈다. 4차 산업혁명시대의 열풍은 실제보다 부풀려진 일종의 광고성이라는 것이다. 2016년 다보스포럼의 의제로 논의된 4차 산업혁명은 제안자라 할 클라우스 슈밥조차 자신의 책에서 그 불확실성을 언급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미 역사적으로 또는 산업사적으로 학계와 전문가 그룹에서 인정하고 규정한 1차, 2차, 3차 산업혁명과 확연히 다른 4차 산업혁명이란 개념의 한계를 일깨워주었다. 미래 전망의 하나이자 비즈니스 세일즈의 지류일 뿐이라는 전제는 이후 논의 방향의 기초가 되었다.

슈밥은 저서에서 “4차 산업혁명의 파급 효과는 불확실하며 인간이 대응하고 느끼고 반응하는 곳으로 간다”는 사실을 전문가 설문으로 부언했는데 그 부분에 대한 주목도가 낮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점진적으로 사회적, 제도적 노력을 펼쳐 더 바람직한 틀을 만든다면 지금 우리가 우려하는 많은 문제점이 해결될 것이라는 예견이다.

이상욱 교수는 인공지능보다는 ‘기계지능’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더 적확한 정의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데이비드 코프가 만든 작곡 프로그램 ‘EMI’ 프로젝트를 예를 들며 인공이 아니라 기계, 즉 사람과는 다른 틀, 우리에게는 낯선 의식과 구조를 지닌 로봇이 지금 우리 삶에 함께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통찰력 있는 언어 정의다. 바둑의 제왕이었던 이세돌, 커제가 대결했던 알파고가 보여주듯 그들은 인류가 이제껏 만나지 못했던 다른 종류의 마음과 체계를 지닌 기계 지능인 것이다. 여태까지 우리와 비등한 지능체와 산 적이 없었던 인간이 모든 다른 체계를 늘 우리 위계 밑으로 척도화 하는 오랜 습속으로 이들을 평가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러면서 이상욱 교수는 ‘보스턴 다이나믹스’사가 만든 군사용 운송로봇의 안정성 테스트 동영상을 제시했다. 이 대목에서 많은 수강생이 놀람과 깨달음을 얻었다. 강연 뒤 토론시간에 나온 질문에도 이 부분이 언급됐다. 단지 그 뛰어난 기능을 과시하고 선전하기 위해 만든 동영상이 결국 ‘로봇 학대’로 인식되는 아이러니는 지금 우리가 대면하고 하는 기계 지능에 대한 혼란과 불편함, 감정의 착잡함을 함축한다. 한 수강생은 “노인 돌보미 로봇이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자 그를 일으켜 세우는 할머니의 영상을 보고 앞으로 로봇과 함께 사는 일에 대한 몇 가지 인식을 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이 교수 또한 이 의견에 공감을 표했다.

미래 직업에 대한 전망과 현실

이번 강연을 들으러 온 이들 중에 꽤 다수가 학부형이었던 것 또한 흥미로운 일이었다. 아이를 가진 부모로서 그들에게 적절한 교육을 받게 하고 미래 직업을 선택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통찰을 얻기 위해 참여했다는 발언은 꽤 현실적이었다. 기계 지능이 더 광범위하게 우리 삶에 침투하면 과연 어떤 직업이 사라지고 또 어떤 직종이 각광받을 것인가,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상욱 교수는 ‘인공지능이 전문직을 모두 대체할 것인가’란 질문을 던지고는 “아마도 자본주의에서 돈이 되는 것부터, 즉 수지타산이 맞는 일자리부터 서서히 인공지능으로 바꾸어 갈 것”이라고 진단했다. 결국 경제적, 제도적 측면의 고려가 핵심 변수가 될 것이라는 얘기다. 맥킨지가 갈파했듯 직업의 대체가능성이 아니라 직능의 대체가능성을 가늠해야 한다. 그렇다면 한마디로 돈 많은 자는 더 벌게 되고, 돈 없는 자는 더 가난해질 것인가, 사회 양극화가 더 심화될 것인가란 질문에 이 교수는 수긍의 뜻을 내비쳤다. 다만 이제까지 개발된 인공지능은 모두 특수한 목적을 위해 한정된 기능을 수행하도록 설계된 것이 대부분이므로 인간의 모든 기능을 대체할 수는 없을 것이란 의견이다. 인간의 지능은 미리 확정되지 않은 기능을 상황에 따라 적절하고 유연하며 순발력 있게 수행할 수 있는 보편지능을 지녔기에 이 기능까지를 따라잡을 수 있는 로봇 개발은 어렵다는 것이다.

문화예술에 끼치게 될 인공지능의 영향력

이번 프로그램이 주 대상으로 했던 청중은 문화예술계 종사자다. 이 교수는 예술적 아름다움의 정의를 ‘잘 만들어진 인공물이 지닌 높은 수준의 완성도’로 잡았다. 이 기준으로 보면 인공지능이 구현할 수 있는 높은 기예적 측면은 예술가에게 위협이 될 수도 있다. 또 기예의 측면이 기계지능에 의해 높은 수준에 오를수록 인간이 창조하는 예술의 독창성(오리지널리티) 또는 메시지에 집착하려는 흐름이 생긴다면 그런 작품에 몰두하는 예술가와 대중 사이에 더 큰 이질감이 생겨 예술의 소외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이를테면 현대예술로 올수록 전문가 그룹끼리만 놀고 이해하는 현상이 심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예술가 그룹과 대중 사이에 더 많은 공유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상욱 교수는 ‘로봇의 마음을 이해해 보자’고 제안했다. 로봇의 진화와 기술 낙관론의 대표작이라 할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 『아이, 로봇』을 예로 들었다. 다만 인간 지능의 발달 단계나 경로를 인공 지능이 그대로 따라갈 것이라는 가설은 한계와 오류가 있다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기계가 반드시 인간적이어야 할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감정 로봇’이라는 것이 있다 해도 그 감정은 인간의 감정을 흉내 내 표현하는 것이지 진정한 인간의 감정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낯선’ 기계지능과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할까. 이상욱 교수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다양한 종류의 마음이 공존한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들 나름의 체계와 구조를 존중하면서 보듬고 가는 ‘마음 다원주의’가 최선이다. 인간 지능과 다르지만 나름 놀라운 ‘다른’ 지능을 지닌 것들과 어우러지는 것이다. 인간 지능은 이 우주에 존재하는 다양한 마음 중 하나일 뿐이다. 그들에 비추어 ‘나는 누구인가’를 더 천착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닌가.

  • 정재숙
  • 필자소개

    정재숙은 고려대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성신여대대학원 미술사학과를 수료한 뒤 잡지사와 출판사를 거쳐 1987년부터 신문기자로 일해 왔다. 현재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로 재직하며 문화 울타리로 묶이는 다양한 영역의 취재와 글쓰기를 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열화당 사진문고 『전몽각』, 엮은 책으로 중앙북스의 『나를 흔든 시 한 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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