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티켓은 다 팔렸으니 내일 다시 오세요”라는 비석이 홍콩 컨벤션센터 입구에 세워졌다. 입장권을 구하지 못한 이들은 몇 시간의 기다림에도 허탕을 치고 돌아가야 했다. 입장권 가격은 약 470 홍콩 달러(약 7만원). VIP가 아닌 일반 입장권이다. 인터넷 판매량은 오픈 2시간 만에 매진, 거리엔 암표를 파는 이들도 간간이 보였다. 줄을 서는 건 일반 관람객만이 아니다. 슈퍼콜렉터들도 전시장에 들어오려면 수십 미터의 줄을 서야 했다. 5일간 방문객 8만 8000명, 매출 1조 원을 자랑하는 아트바젤 홍콩의 현장이다.

홍콩 아트바젤 전경(좌)과 현장 발매 티켓 완판을 알리는 안내문 홍콩 아트바젤 전경(좌)과 현장 발매 티켓 완판을 알리는 안내문
홍콩 아트바젤 전경(좌)과 현장 발매 티켓 완판을 알리는 안내문

7년간의 성장사, 그 배경엔

아트바젤 홍콩은 올해로 7회째다. 홍콩국제아트페어가 아트바젤에 인수된 것이 2012년이다. 1회 때부터 왔다는 미술계 관계자는 “이렇게 성장할 줄 몰랐다. 첫 회 땐 규모나 시스템 모든 면에서 KIAF(키아프ㆍ한국국제화랑)보다 못했다. 아트바젤이 실패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라고 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7년 사이 아트바젤 홍콩은 아시아 최대 아트페어로 등극했고, 전 세계 아트페어 중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트페어가 성공하려면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컬렉터’다. 큰 작품을 구매할 큰손들이 있어야 한다. 아트바젤 홍콩은 글로벌 금융사인 UBS의 후원을 받고 있다. VIP 입장은 오후 2시부터이나 UBS에서 초청한 VIP들은 이보다 이른 12시부터 관람이 가능하다. 갤러리들도 이들의 방문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중요 작품은 개막하기 전부터 딜링에 들어간다. 일종의 VVIP를 위한 전략이다.

중국 컬렉터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것도 홍콩의 장점이다. 2019 세계미술시장 보고서(The Art Basel and UBS Global Art Market Report 2019)에 따르면 세계 시장에서 중국은 19%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에 이어 3위, 규모는 129억 달러(약 14조 6000만 원)에 달한다. 이 컬렉터들을 배후로 둔 홍콩의 성장은 예견된 일이었다. 탄탄한 컬렉터들을 보유하자, 세계 유수의 갤러리가 앞다퉈 모여들었다. 매년 아트바젤 홍콩에 참여하는 갤러리 수는 240여 개다. 행사장 규모에 따른 최대 수치다. 갤러리 수를 일정하게 유지하다 보니 여기에 참여하고자 하는 갤러리들의 경쟁도 치열하다. 가고시안, 화이트 큐브, 페로탱, 페이스, 리만 머핀, 하우저 앤 워스, 데이비드 즈워너 등 세계 유수 갤러리들이 앞다퉈 부스를 냈다. 지난해 영국 갤러리인 하우저 앤 워스의 참여로 홍콩은 바젤만큼 중요한 페어임이 입증됐다.

폭발적 성장의 마지막 방아쇠는 정부가 당겼다. 무관세를 기본으로 하는 홍콩이기에, 작품 거래에 대한 부담이 적다. 운송료만 부담하면 된다. 컬렉터들과 갤러리에는 최상의 조건이다. 여기에 더해 홍콩은 이 기간 다양한 문화 행사를 지원한다. 위성아트페어인 아트센트럴과 하버아트페어를 비롯하여 미술관과 갤러리는 주요 전시 일정을 조율하고 웰컴 파티를 진행한다. 자연스레 호텔과 주요 레스토랑은 연일 매진 행렬이다. 홍콩의 연간 미술품 거래액이 약 4조 원으로 추정되는데, 이 중 1조 원 정도가 아트바젤 홍콩 기간에 거래된다. 아트바젤을 필두로 홍콩 섬 전체가 들썩이는 셈이다.

올해의 아트페어 트렌드는 ‘여성ㆍ회화’

올해 아트바젤 홍콩은 ‘골디락스’를 맞이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2016년 매출 3조 원을 기록한 데 이어 2018년에는 유명 작가들이 행사장을 찾았다. 전 세계에서 가장 핫한 현대미술가로 거론되는 제프 쿤스가 행사장에 나타나 관객과 셀피를 찍었고, 안토니 곰리(영국), 라이언 갠더(영국), 장샤오강(중국)을 비롯해 이우환, 김구림, 박서보 등 한국 작가들도 자리를 빛냈다. 올해는 폭발적 매출도 눈에 띄는 유명 작가도 없었지만 유력 갤러리들의 세일즈는 평균 이상을 기록했다.

데이비드 즈워너 갤러리는 VIP 오픈 첫날 부스 전체를 완판시켰고, 가고시안 갤러리도 개막 1시간 만에 독일 표현주의 화가인 게오르그 바셀리츠의 대형 회화 작품을 판매하는 데 성공했다. 화이트큐브 갤러리의 앤디 워홀 작품은 285만 달러(32억 원)에 새 주인을 만났다. 페이스갤러리를 비롯한 페로탕, 가고시안 갤러리도 매일매일 작품을 바꿔 걸었다. (전문용어로 ‘벽을 바꾼다’고 하는데, 작품이 다 팔려서 새로운 작품을 거는 것을 말한다.) 뿐만이랴, 부스 전체를 완판시키고도 작품을 구매하려는 컬렉터들을 위해 부스 안 프라이빗 공간에선 작가 도록을 놓고 선판매를 이어 갔다. 갤러리스트들은 작품 가격을 물어보는 컬렉터들에게 “우리에게 다른 좋은 작품이 더 있다”라며 이메일로 아트바젤 홍콩 특별가를 보내느라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질 못했다.

게오르그 바실리츠 대형 회화 판매에 성공한 가고시안 갤러리 게오르그 바실리츠 대형 회화 판매에 성공한 가고시안 갤러리

치열한 판매전이 벌어지는 가운데 올해 미술 시장은 아시아 여성 작가와 회화 작품을 위주로 트렌드가 형성될 것임이 명확하게 보였다. 아트바젤의 이러한 시각이 드러난 건 엔카운터즈 섹션(판매와 관계없이 작가의 대작을 집중 조명하는 코너) 전면에 배치된 여성 작가의 작품들이었다. 한국 작가 이불의 은빛 비행선인 ‘Willing To Be Vulnerable-Metalized Ballon(취약할 의향)’은 엔카운터즈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1층 전시장 한가운데 놓여 관객을 맞았다. 지난해 영국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와 독일 그로피우스 바우에서 열린 회고전에서 선보인 시리즈다. 3층 전시장 한가운데엔 일본의 치하루 시오타의 설치작 ‘어디로 가나요?(Where are we going?)’가 자리 잡았다. 시오타는 실을 이용한 대형 설치를 주로 선보이는 작가로, 2015년 베니스비엔날레 일본관 작가로 선정됐다. 실을 매듭짓고 얽히고 풀어내는 섬세한 작업으로 여성적 감성을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미술계 관계자들은 여성 작가가 지금까지 그 중요성에 비해 저평가된 데다 미투(me, too) 움직임까지 겹쳐 당분간 주목을 받을 것으로 예상했다. 전시장에서 만난 한 미술품 딜러는 “여성 작가 작업은 가격이 매력적이다. 게다가 전 세계 주요 미술관 소장품의 85%가 남성 작가 작품이다. 다양성 차원에서라도 여성 작가 작품이 재조명될 것”이라고 봤다. 아트바젤 홍콩이 기민하게 움직였다는 평가다.

회화 작품이 전면에 등장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지난해까지 많이 보였던 설치 작업들이 상당히 줄었고 대부분 갤러리들이 회화 작업에 방점을 찍었다. 가고시안 갤러리는 페더빌딩의 가고시안 홍콩 전시장에서 ‘세잔, 모란디 그리고 산유’ 전시를 진행했다. 중국 유명 작가 쩡판즈가 큐레이팅한 전시로 “회화는 사물을 언어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눈과 마음으로 관찰하는 것”이라는 기획자의 의도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세계 최고 갤러리의 일성인 셈이다.

엔카운터즈 섹션에 선정된 이불 작가의 <To Be Vulnerable> 엔카운터즈 섹션에 선정된 이불 작가의

정글에 던져진 한국 갤러리들

올해 아트바젤에 참여한 한국 갤러리는 총 10곳이다. 메인 전시인 ‘갤러리즈’ 섹터에는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학고재, 리안, PKM, 아라리오, 원앤제이, 국제 등 6개 화랑이 참여했다. 1명의 작가를 집중적으로 소개하는 ‘인사이트’에서는 313아트프로젝트(이완), 갤러리바톤(지니 서), 조현화랑(김종학), 우손갤러리(최병소)가 부스를 차려 호응을 얻었다.

지난 수년간 ‘단색화’를 필두로 모노크롬 페인팅을 선보였던 한국 화랑들에 올해 페어는 일종의 시험대였다. 미술시장의 트렌드가 모노크롬에서 벗어난 지 오래이기에, ‘다음 타자’를 물색해야 하는 마지막 시기였다.

민중 미술을 주로 소개한 학고재 갤러리는 아시아 페미니즘의 대모로 불리는 윤석남의 핑크빛 대형 심장 조형물 ‘김만덕의 심장은 눈물이고 사랑이다’로 눈길을 끌었다. 신학철과 강요배의 작업은 첫날 판매가 완료됐다. 리안 갤러리는 한국 전위 미술의 선구자 이건용의 작품을 전면에 내세워 좋은 평가를 받았다. PKM 갤러리는 올해 엔카운터즈 섹션에 은색 비행선 출품으로 관심을 받은 이불 작가의 작업을 선보였다. 아라리오 갤러리는 아시아 작가들을 집중적으로 소개하며 서구 미술관의 관심을 끌었다.

다만 매년 세일즈가 대형 갤러리 위주로 편중되는 현상은 올해도 이어져, 글로벌 아트페어의 한계로 지적됐다. 부스비와 운송료 등을 더해 참가비로 사용하는 비용이 적게는 6,000만 원 많게는 2억 원 가까이 소요되기에 중소형 갤러리에게는 부담으로 작용한다. 국내 한 화랑 대표는 “한국 작가들 작업 자체가 저평가돼 있기에, 전체를 다 판다고 해도 큰 수익을 기대하긴 어렵다. 홍보를 위해 나오지만 외국 대형 갤러리의 들러리를 서기 위해 홍콩에 오나 하는 자조감도 든다“라며 씁쓸해했다.

그럼에도 한국 작가 프로모션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했다. 엔카운터즈에서 집중 조명된 이불 작가의 경우 국내 PKM 갤러리뿐만 아니라 타대우스 로팍, 리만 머핀과 함께 프로모션해 홍콩에서 가장 ‘핫’한 작가로 등극했다. 타이퀀 중국 도서관에서 열린 VIP 파티엔 전 세계 미술 관계자들이 작가와 만나 이야기하기 위해 긴 줄을 서는 장관을 연출하기도 했다. 세계적 작가를 키워 내기 위해선 국내 갤러리 한 곳의 역량으론 부족하고 다른 갤러리와 연합해야 한다는 것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국내 갤러리들에 던지는 메시지가 가볍지 않다.

  • 이한빛
  • 필자소개

    이한빛은 헤럴드경제 신문에서 시각예술 분야 담당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거의 매일 해당 분야 기사를 생산하고 있지만, 엄연히 미술계 머글(비전공자)이다. 일반인의 눈으로 미술계 소식을 전달하려 노력하고 있다. 학부에선 언론정보학을 전공했으며 뒤늦게 MBA과정을 밟고 있다. 시장을 맹신해서도 안 되지만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긍정적 시장주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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