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실의 이동 경로와 공간에 얽힌 이야기


나의 작업실 변천사
1985년 첫 작업실 – 서울 혜화동 작업실 1년
졸업과 동시에
작업실 겸 화실 문을 연다.
집에서 결혼 자금을 미리? 받아 내
보증금 300만 원에 월세 30만 원
그 첫 달, 낮과 밤을 가르쳐
총수입 30만 원을 그대로
집주인께 바치고......

『나의 작업실 변천사 1985~2017』의 첫 페이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작업실을 갖기 시작한 1985년부터 2017년까지 전전해 온 작업실의 이동 경로와 공간에 얽힌 이야기이다. 서울에서 시작해 지역으로 33년 동안 15번의 작업실 이주 과정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했다. 작가의 가장 구체적 현장인 작업실을 통해 작가의 일상과 작업의 발생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다.

이 작업은 2005년 오아시스 프로젝트와 ‘스쾃(Squat)’* 활동을 같이하면서 시작되었다. 동숭동에 있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소속 어느 빈 건물 한 칸을 한 달 동안 점거해 다양한 문화 활동을 실험하였다. 처음에는 청소부터 시작했다가 그 후 참여 작가들이 연극, 퍼포먼스, 전시, 강연 등 십시일반 행사들을 펼쳐 나갔다. 나도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작업한 지 20년이 되는 시간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결국 자신의 공간 하나를 얻기 위해 노심초사한 과정과 다름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해인 1985년부터 매해 그 작업실에서 일어난 핵심적인 일을 한 장의 드로잉으로 완성, 벽에 붙여 나갔다. 반투명지에 그리게 된 것은 한 장씩 벽에 붙여 나갈 때 스쾃 장소의 현장성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때 이후 매년 한 장씩 더해져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다. 15번의 이사 과정은 대부분 작가의 창작 동기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러한 작업실 이동 경로 속에서는 자본의 공간 독점, 사회와 관계 맺기, 창작자의 고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작가의 작업실이 개인 언어의 산실에 머무르지 않고 광장의 언어와 충돌, 교환하면서 어떻게 새로운 창작 에너지가 생성될 수 있는지도 탐색해 볼 수 있다.

1987 1999 2000 2014
나의 작업실 변천사 1987, 1999, 2000, 2013년 작품

1년을 한 장으로 압축한 35장의 드로잉을 따라가다 보면 한 젊은 여성 예술가가 한국 사회 속에서 어떻게 고군분투하며 작업을 이어 갔는지 추적할 수 있다. 그곳에서 발생한 삶과 예술의 관계, 한국 사회 속에서의 예술가의 위치를 가늠해 본다.

2018년 청주시립미술관에서 ‘부드러운 권력’전을 준비하면서 사전 미팅 때 멋진 작업실을 핑계 삼아 보여 준 것이 계기가 되어 전시도 진행하게 되었다. 일기 쓰듯 기록하고 묵혀 두었던 작업이 시간의 힘으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특별한 개인의 얘기가 아니라 대동소이한 한국 사회 속 예술가의 현실이 보였기 때문이리라. 한국의 작가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작업의 존폐 여부에도 결정적 영향을 준 사연들을 하나쯤 갖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전시 과정에서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작업실 고군분투기를 이야기하며 공감을 표시하였다. 춘천 이상원미술관의 개인전에서는 대중 프로그램과 함께하였다. 드로잉에 쓰였던 똑같은 재질의 트레싱지를 비치하고 펜으로 자신들의 집 이야기, 이사한 경로, 춘천에 정착한 사연들을 들려 달라고 했다. 두 달 넘게 진행된 이 프로그램에 축적된 사연들을 살펴보면 춘천이 보이고 숨겨 두었던 옛 기억이 소환된다. 장소의 기억으로 시간을 불러낸다. 인간이 기거해 온 공간은 시간의 집이다.

연대순에 따른 작업실 지도를 통해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 본다.

1985년 서울 혜화동 그림터 화실
- 독립, 두렁의 작업실과 병행, 20대에 의한 ‘힘’전 사태의 진원지가 됐다.
1986년 서울 서대문구 그림터 작업실
- 작업실도 수색의 대상, 경찰의 작은 방문으로 이사
1987년 인천시 산곡동 부평공단
- 캔버스가 깃발에 되던 시대, 두렁과 함께 이주, 공장 생활, ‘일손나눔’ 활동
1988년 서울 답십리 옥탑방 작업실
- 집 떠난 지 4년 만에 집으로 복귀, 인천을 오가며 작품 활동
1989년~1990년 인천시 부평구 청천동 19평 아파트 1칸
- 결혼과 함께 탁아소가 있고 집세가 싼 인천시 부평구에 정착
1991년 인천 주안동, 인천지역 미술패 ‘갯꽃’과 병행
- 집, 탁아소, 공동 작업실 사이를 동분서주
1992년 인천시 부평구 백운 작업실
- 지역 문화팀들이 돈을 합쳐 지하 공간을 빌린다. 한쪽을 막아 공동 작업실, 전시회도 연다.
지하에 꽃핀 문화. 자금난으로 1년 만에 문을 닫음
1993년~1995년 인천시 부개동 2인 공동 작업실
- 친구와 2인 작업실을 연다. 반을 나눠 쓴다. 작업실 출퇴근으로 작업이 쌓인다.
졸업 후 10년 만에 첫 개인전
1996년 부천시 괴안동 아파트 상가 반지하 작업실
- 반지하 작업실 1년 만에 무릎이 상한다
1997년~2003년 부천시 괴안동 세탁소 2층 작업실
- 우여곡절 끝에 천만 원을 구해 햇빛 잘 드는 2층 작업실로 이사
2000년 ‘입김’의 ‘아방궁 종묘 점거 프로젝트’를 위한 작품. 소품 제작 장소로 애용됨.
밀레니엄의 해 가부장제의 한복판에 서다
2002년 작업실 뒤편으로 대단지 아파트 들어섬. 집주인 월세를 10만 원 올린다.
2004년 강원도 홍천 후배 작업실에 작품 보관
2004년~2008년 부천시 괴안동 15평 연립 주택 작업실
- 부천시 역곡 괴안동 재개발 발표, 작업실 공매 – 전세금은 보호
2009년~2010년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농가 작업실
- 도시 생활 청산, 3000만 원 보증금에 10만 원 월세, 텃밭이 있는 작업실
2011년~ 안성시 미리내 작업장
- 월세 20만 원으로 올려 이사 결정. 상대적으로 땅값이 싼 안성으로 이주. 미리내 작업장
주인, 자신이 공들여 지은 작업장을 있는 돈 지불하고 나머지는 살면서 갚으라는 제안을
함. 그리하여 이사 15번 만에 ‘초현실적 작업장’에 정착
2018년 안성시 미리내 작업장 앞에 골프장이 들어섰다. 넓은 시야와 계절의 시간을 알려 주던 앞산.
밤이면 짙은 어둠이 평화를 주던 앞산에 불이 켜진다. 날씨가 좋으면 골프장은 야간에도 영업을 한다. 밤 11시까지 휘황한 불빛을 보고 있으면 눈부신 무력감을 느낀다.

삶의 공간도 적절한 노력으로 선택할 수 있어야

침묵이 흐르는 공간에 혼자 있을 때 순간 막연함과 막막함이 엄습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시간에 자신을 놓아두고 있으면 지구와 독대하고 있는 듯 자부심이 슬며시 자리한다. 고독할 자유와 실패할 여유는 머뭇거릴 수 있는 공간에서 주어진다.
작가는 많은 관계망을 유보하는 대신 자기만의 시간표로 공간을 점유한다. 그 시간들이 모여 자본의 욕망과 속도에 구멍을 낼 수 있다. 아니 누구나 자기만의 삶을, 자기만의 시간표를 가질 권리가 있다. 공간의 독점, 내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고 있는 환경의 침해, 파괴는 예술의 창작뿐 아니라 삶의 방식도 불가능하게 한다. 자기 삶을 선택하듯 삶의 공간도 적절한 노력으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나의 선택이 어떠한 이유 없이 침해당할 때 시간에 대한 믿음은 사라진다.

*스쾃(Squat)은 불법 점거를 일컫는 말로서, 유럽, 특히 프랑스에서 작가들이 철거 직전의 건물 등을 작업실, 공연장으로 사용하는 것을 일컫는다. 이 용어는 본래 1835년께 오스트리아의 목동들이 허가 없이 남의 초지에 들어가서 양을 먹이던 행위에서 유래됐다. 나중에 이것이 주택 점거 운동, 주거권 운동 등 계급 투쟁의 목적으로 사용되었다가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빈 공간을 강제 점거 후 예술 공간으로 바꿔 버리는 예술 운동의 한 경향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본격적인 스쾃은 1990년대 말 프랑스 파리의 한 건물을 예술가들이 불법 점거하면서 비롯되었다. 스쾃은 '무단 점거'이기 때문에 경찰이 출동하고, 퇴거 명령과 재점거를 되풀이하면서 충돌을 빚기도 한다. 하지만 스쾃은 소외되고 우범화한 장소를 예술가의 집단 창작촌으로 만들어 에너지 넘치는 예술 중심지로 탈바꿈시키는 새로운 문화적 도전이기도 하다. 국내에서는 2004년 7월, 방치되고 있던 서울 목동 예술인회관을 가난한 예술가들의 작업 공간인 스쾃으로 만들자는 운동이 한 예술 단체 오아시스에 의해 벌어졌다.

  • 정정엽
  • 필자소개

    정정엽은 17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기획전을 통해 거대 담론과 미시 담론을 아우르는 다양한 작품과 예술적 실천을 보여 주고 있는 화가이다. 두렁, 입김 등 그룹 활동을 병행하며 예술가인 자신의 정체성이 전체 세계 속에서 어떤 의미로 존재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져 왔다. 1998년 처음 붉은팥과 곡식 작업들을 선보였다. 2006년 아르코미술관 ‘지워지다’, 2013년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아시아 여성미술제’ 2016년 ‘벌레’전 등을 통해 인간과 공존하고 있는 생명의 문제, 보이지 않은 여성 노동을 작업하고 있다. 2018년 제4회 이응로미술상을 수상했다. 이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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