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과 연출의 경계’에 대한 고민

‘나는 기획자인가’ 종종 자문한다. ‘나는 누구인가’ 틈틈이 자기 정체성을 찾고 싶은 이유가 ‘삶’뿐만 아니라 ‘업’에도 스며 있다. 질문에 대한 답은 늘 명쾌하지 않기에 ‘인간은 된 존재가 아니라, 되어 가는 존재’임을 상기한다. 그래서 자문을 구체화시키며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진다.

2005년 축제에서 우연히 ‘기획’을 처음 알게 되었다. 한동안 ‘기획’의 경험을 쌓아 갔다. 그리고 2013년 ‘당신이 생각하는 축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만났다. ‘나는 어떠한 기획자인가’ 지난 경험을 되돌아보았다. 내가 중요하게 여긴 가치가 무엇인가를 살폈다. 마침내 발견한 것은 ‘사람과 사람’, 즉 ‘인간관계’였다. ‘사람과 사람이 축제다’라는 자기 명제를 과거 궤적에서 건져 올렸다. 2014년 자기 기획으로 시작된 프로젝트 <후즈 페스티벌(Whose Festival)>은 일상을 향해 있었다. 소소한 욕망으로부터 출발해 소풍, 여행, 파티, 생일 등의 소재를 자기 방식으로 계획하고 실행했다. 2016년, 프로젝트 연장선상에서 기획된 <후즈 웨딩(Whose Wedding)>은 ‘거리 예술가의 거리 결혼식(신부: 오선아, 신랑: 유영봉)’이라는 콘셉트와 ‘결혼은 인생 최고의 축제다’라는 슬로건으로 열렸다. 준비와 진행에 있어서 총체적인 진단과 판단이 요구되었다. 그런 까닭에, 형식과 내용 면에서 ‘기획과 연출의 경계’가 나에게만큼은 확실치 않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철저한 기획’과 더불어 병행해야 할 ‘느슨한 연출’이라는 발상은 명확한 콘셉트에 토대한 하나의 판(세계관)을 마련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머시브 시어터’에서 찾은 실마리

201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aPD 과정에 참여했다. 자기 주제를 가지고 프로젝트와 연구 실행이 가능했다. 나의 연구 주제는 ‘기획과 연출의 경계’였다. 마지막 연구 과정으로 ‘뉴욕(New York)’을 방문했다. ‘기획과 연출의 경계’를 넘나들 수 있다는 확신의 증거가 내게 필요했다. 그래서 장르를 막론하고 동시대 공연예술과 시각예술의 양상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이때, 지인의 추천으로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 공연을 보았다. 공연 관람 후, 온갖 영감이 들끓었다. 이 작품은 영국 극단 ‘펀치드렁크(Punch Drunk)’가 2003년 런던에서 초연 후, 2009년 보스턴에 위치한 ‘아메리칸 레퍼토리 시어터’가 공동 제작에 참여해 보스턴 근교에 위치한 낡은 학교에서 공연되었다. 그리고 호평을 받아 2011년 조너선 호크월드와 랜디 위너, 아서 카파티가 ‘이머시브(Emursive)’라는 이름의 제작사를 만들어 뉴욕 맨해튼 첼시의 하이라인 공원 근처에 위치한 '매키트릭 호텔(McKittrick Hotel)'을 공연장으로 사용해 지금까지 연일 성황리에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관객이 3시간 동안 호텔 1층에서 5층까지의 전 공간을 (일부 공간은 제한되어 있으나)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하나의 이야기(세계)의 파편화된 조각(일부분의 이야기)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개인의 삶과 무척 닮아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더욱 흥미로웠다. 하나의 이야기가 각자의 선택을 통해 서로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획과 연출의 경계’가 허물어질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 그러한 특성을 망라한 이름은 ’이머시브 시어터(Immersive Theatre)‘였다.

내게 ‘이머시브 시어터’는 세 가지 매력으로 반짝였다. 첫째,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배우와 관객을 구분할 수 있으나 관람에서는 배우와 관객이 혼재되어 있다. (심지어 관객 또는 공간만 경험할 수 있다.) 둘째, 관객은 자기 선택을 통해 자신만의 경험을 얻는다. 조각난 이야기의 퍼즐 맞추기를 통한 자기 감상은 관객 수만큼 다양하다. (만약 관객이 이동하지 않고, 한자리에만 머물러 관람한다면, 그것 역시 자신의 선택에 따른 감상이다.) 셋째, 한정된 시공간 내 연출되어진 하나의 세계관이 존재한다. (선택된 이야기에 따라 여러 가지 표현 방식이 가능하다. <슬립 노 모어>는 셰익스피어의 원작 맥베스를 줄거리로 하며,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스릴러 장르 스타일을 모티프로 표현했다.) 위 세 가지 매력이 긴밀하게 어우러지면서 하나의 세계관으로 연출되어진 시공간이 펼쳐지고, 관객은 시공간을 돌아다니면서 3인칭 관찰자가 아니라 1인칭 주인공 또는 관찰자의 시선을 지니게 된다. 그래서 그 누구도 모든 사건을 전지적 시점에서 목격할 수 없다는 것이 마치 ‘삶’과 같은 묘한 몰입을 선사했다. 창작에서 내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관객에게 평면의 연속된 장면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입체의 공간으로 열어 놓고 관객으로 하여금 그 세계를 탐험케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까닭에 기획과 동시에 연출이 병행되어져야 할 것이라 생각했다.

<행화탕 장례날>의 기획과 연출

그러나 ‘이머시브 시어터’를 대표하는 공연 중 하나인 <슬립 노 모어>와 같은 작품을 단번에 만들어 내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실제 <슬립 노 모어> 작품 역시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압도적인 규모와 디테일한 표현, 다양한 캐릭터의 출연 등 제작 시 소요되는 예산과 일정은 여타 공연과는 궤를 달리 한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내게 첫걸음으로서 시도할 수 있을 ’소규모 이머시브 시어터‘ 창작 방향을 구상했다. 이를 위해 ‘공간과 이야기’, ‘관객과 관람 방식’, ‘제작진과 제작 방법’ 등의 세 가지 요소를 주안점으로 두고 내 여건에 적합한 현실적 방법을 모색했다.

첫째, ‘공간과 이야기’에서 선행된 사항은 공간이었다. 대관 비용의 절감과 공간 특성의 충분한 이해가 제작 여건상 중요했다. 그러한 점을 감안해 볼 때, 현재 직접 운영하고 있는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을 떠올린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지난 3년간 공간의 구조에 대한 이해와 역사에 대한 조사가 충분히 축적되어 있었다. 순수 창작보다는 각색을 염두에 두고 공간의 구조를 고려했을 때, 어느 날 ‘가면무도회’와 ‘발코니’ 장면이 상상되었는데, 이때 떠올린 이야기가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이었다. 무엇보다도 ‘사랑’과 ‘죽음’이라는 사건이 공간과 결합된다는 상상만으로, 온갖 낯선 장면들이 그려졌다. 둘째, ‘관객과 관람 방식’에서 최근 관객 성향을 고려했다. 이는 요즘 성행하는 경험 소비 트렌트와 맞닿아 있다. 관객은 자신이 직접 선택하고 특별한 경험을 하기 원한다. 그래서 관람 방식에서 중요한 것은 관객이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자기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원작에서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를 각색하여 드러내면서 관객이 두 남녀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각자 나름의 결론을 찾을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이러한 점에서 ‘게임’의 요소를 접목해야겠다는 방향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관객이 자기 경험에 의한 자기 결말을 구할 수 있도록 공연 중 자유롭게 이동하며 경험할 수 있는 설정을 했다. 셋째, ‘제작진과 제작 방법’에서 제작진은 과거 활동에서 협업의 경험이 있는 사람을 우선하여 구성했다. 제작 여건상 소통의 시행착오를 최대한 줄일 필요가 있었다. 더불어 새로운 영역에 대한 시도를 선호하는지 여부 확인도 중요했다. 제작 방법에 있어서 기존 공연 제작 방식과는 달리 낯선 장르라서 해당 장르에 대한 공동 연구가 필요했다. 각자의 역할에 대한 이해와 존중 그리고 상호 협력이 매우 중요했다.

<행화탕 장례날> 포스터 ⓒ 후즈살롱 디자인: 김보휘 <행화탕 장례날> 포스터 ⓒ 후즈살롱
디자인: 김보휘

‘기획과 연출의 경계’를 오가며 제작한 <행화탕 장례날>은 장소 특정성을 반영한 ‘이머시브 시어터’와 게임의 속성이 반영된 AR(증강현실) 기술이 결합된 초연작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하고 한양대학교 산학협력단이 주관한 <2018 디지털 기술 및 온라인/모바일 공간활용 공연예술 Art & Digital Technology 지원사업>에 선정되고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다. <행화탕 장례날>은 부제인 ‘1958년 행화동, 목욕탕집 딸과 쌀집 아들의 사랑과 죽음에 얽힌 세 가지 기억’에서 쉬이 떠올릴 수 있는 의문을 가지고, 관객이 모바일 디지털 기술 AR 장치를 활용하여 각자 주체적 관찰 행동에 따라 적극적으로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폐업을 앞둔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의 마지막 행사인 <행화탕 장례날>이라는 설정을 두고, 관객은 입장과 함께 펼쳐지는 2019년의 (지역 재개발로 인한) ‘행화탕 장례날’에서 1959년의 (두 남녀의 죽음으로 인한) ‘행화탕 장례날’의 시간 사이를 넘나들며 세 가지 시선의 이야기들을 시청각적 요소를 중심으로 선택적 경험을 통해 자기만의 결말을 찾아갈 수 있었을까.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라는 생각에 지난 과정을 위로하기보다는 약 100여 명 관객들의 관람 모습과 관람 후 건넨 반응과 경험담에 귀를 기울여 본다. ‘스스로를 낮추되 비하하지 말고, 스스로를 높이되 자만하지 말자’라는 태도로 경청하고 반성한다. 이번 여정에서 함께 작품을 제작한 동료와 그 과정 선상에 이해와 배려를 해준 동료들 한 사람 한 사람과 함께했던 순간들이 고마움으로 남아 있다. 내가 기획과 연출의 경계에서 동료들과 함께 이 작업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세상에서 읽어 낸 생각에 예술적 상상을 더해 하나의 세계관을 만드는 일, 또 이를 연출해 관객이 스스로의 선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는 일, 이 모든 과정과 가능성에 느꼈던 흥미 덕분이지 않을까.

<행화탕 장례날> 진행사진 ⓒ 후즈살롱 촬영: 송광찬 <행화탕 장례날> 진행사진 ⓒ 후즈살롱 촬영: 송광찬
<행화탕 장례날> 진행사진 ⓒ 후즈살롱 촬영: 송광찬 <행화탕 장례날> 진행사진 ⓒ 후즈살롱 촬영: 송광찬
<행화탕 장례날> 진행사진 ⓒ 후즈살롱
촬영: 송광찬

시행착오를 통해 만난 새로운 경계

‘행화탕 장례날’ 제작에서 여러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가장 큰 교훈은 작품을 만드는 모든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협업 과정에서 상호 이해와 배려 그리고 긴밀한 대화가 바탕이 되어 한뜻으로 모이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대부분의 일이란 ‘사람과 사람의 일’이다. 사람 때문에 힘들기도 하지만, 사람 때문에 헤쳐 나갈 수도 있다. 양날의 검이다. 그러나 공연예술의 특성 상 혼자 할 수 없고 함께 만들어가야 하기에 속마음은 살얼음을 디디듯 떨리고 무거울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긴장감을 혼자가 아니라 함께 이겨내는 과정 속에 하나의 세계는 하나의 마음으로 만들어진다.

여전히, 기획자로서의 정체성을 찾고 있다. 그리고 연출가로서의 가능성을 두드리고 있다. 기획과 연출의 경계를 오가는 것이 내 ‘삶’의 ‘업’이 되기를 꿈꾸고 있다. 2019년 9월, 뉴욕을 다시 방문할 예정이다. 동료들과 함께 다양한 ‘이머시브 시어터’ 작품들을 둘러볼 계획이다. 이를 통해 2020년, 오픈 레지던시 또는 워크숍 방식 등을 추진하여 두 번째 걸음을 좀 더 굳건히 내딛고자 한다.


WHO’S NEXT?
'문화예술커뮤니티 동네형들'에서 활동하고 있는 박도빈 공동대표를 추천합니다. 활동가이자 기획자이며, 청년문화와 문화예술교육 등 전방위 활동에서 전천후의 활약을 하고 있습니다. 직간접적으로 활동상을 보고 들으면서 그의 진정성 가득한 열정에 대해 때론 감탄하고 응원하고 있습니다. 특히 소소한 일상 속에서 섬세한 관찰과 발상으로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면모, 프로그램에 설득력과 공감대를 부여하는 능력, 그리고 추진력과 실행력 등의 역량은 기획자로서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료에 대한 배려뿐만 아니라, 후배 세대에 대한 관심과 선배 세대와 신뢰가 높은 점들을 두루 살펴볼 때, 앞으로의 활동들이 기대되는 동료 기획자입니다.

  • 서상혁
  • 필자소개

    서상혁은 2005년 축제 분야에서 ‘기획’을 처음 경험했다. 2014년 분야와 장르의 경계 없이 ‘자기 기획’을 통해 삶을 주체적으로 관찰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소재와 형식으로 ‘후즈 페스티벌(Whose Festival)’을 진행하고 있다. 2016년부터 ‘기획과 연출의 경계’를 서성이다가 최근 ‘이머시브 시어터’ 창작 활동에서 경계를 넘나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유형의 예술 창작을 탐구하고 시도하는 ‘후즈살롱’의 대표(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이며 현재 서울시 마포구 아현동에 위치한 복합문화예술공간 행화탕을 운영하고 있는 문화예술콘텐츠랩 축제행성의 대표(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다. '지구에 소풍 온 우주 보헤미안’이라는 관점으로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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