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남북정상회담을 시작으로 올해 상반기까지 남북 관계에 많은 변화가 있어왔습니다. 편집부에서는 언젠가 문화예술계가 남북 간의 예술 ‘교류’ 그 이상을 준비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나누었고, 90년대 통일을 겪은 독일의 사례가 궁금해졌습니다. 때마침 2018년 부산비엔날레에서 설치미술로 통일 후의 독일 모습을 보여줬던 헨리케 나우만(Henrike Naumaan)에게 관련 글을 요청했습니다. 펫샵보이즈(Pet Shop Boys)의 ‘Go West’를 제목으로 전해 온 동독 예술의 인정 문제에 관한 글을 이번 칼럼으로 게재합니다.

-웹진≪예술경영≫ 편집팀 주


나는 1984년 구동독 작센 주에 있는 츠비카우(Zwickau)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학업과 시민운동으로 바빴던 탓에, 어렸을 때 조부모님의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당시 시민운동 활동이 동독의 종말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나는 조부모님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아주 좋아했는데 할머니는 내가 텔레비전 보는 걸 허락했고, 좋아하는 요리를 해주곤 하셨다. 할아버지는 내가 아틀리에에서 종이를 가져다가 그림 그리는 걸 허락하셨다. 할아버지 카를 하인츠 야콥은 동독에서 아주 유명한 미술가였다. 많은 전시회를 열었고,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셨다. 동독이 사라지고 난 다음 할아버지는 동독에 충실했던 미술가로 간주되어 그 이후에는 거의 전시회를 열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내가 그림과 스케치에 관심 보이는 건 기뻐했지만, 한 가지 그림만 그리는 것 때문에 곤혹스러워하셨다. 나는 미키 마우스만 그렸다. 내가 나이를 먹고, 할아버지의 삶이 상당 부분 사회주의에 헌신한 것이었으며, 특히 이런 배경에서 자신의 손녀가 탐욕스럽게 미국 대중문화의 아이콘인 미키 마우스만을 그렸다는 것이 실망스러웠으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분은 더 이상 살아 계시지 않았고, 손녀와 그 문제에 대해 토론도 할 수 없게 되었다.

1987년 츠비카우(Zwickau)에서의 헨리케 나우만Ⓒ넬레 야콥 1987년 츠비카우(Zwickau)에서의 헨리케 나우만
Ⓒ넬레 야콥
2019년 베를린에서의 헨리케 나우만 2019년 베를린에서의 헨리케 나우만

동∙서독 장벽이 무너진 1989년 이후 30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동독 미술을 분류하기 위해 주로 두 가지 범주가 사용되었다. 국가와 재야 세력이 그것이었다. 이런 대립항만으로 이 복잡한 역사를 이야기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앞선 할아버지의 삶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범주로는 서쪽의 시각 중 하나를 제대로 그려내기에도 충분하지 않다. 할아버지는 정보기관인 국가안전부 ‘슈타지(Staatssicherheitsdienst)’에 협력하지도 않았고, 당에 가입한 적도 없었다. 나의 고조부는 광부였고, 할아버지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어려서 제3제국인 히틀러 정권의 여러 모습을 경험한 후 ‘노동자와 농민의 국가’인 동독에서 미술을 하는 것이 의미 있고 올바른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분은 광부들을 위해 스케치 수업을 했고, 노동자는 언제나 그림에서 중요한 소재였다. 그림 속에 묘사된 노동자의 모습이 “충분히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할아버지는 국가와 갈등을 겪곤 했다. 사회주의에서는 행복한 노동자만 존재해야 한다고 했으니까. 1989년 불만을 느끼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할아버지도 변화가 시급하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셨다.

1961년 독일 동부 캠니츠(Chemnitz)에서의 카를 하인츠 야콥 1961년 독일 동부 캠니츠(Chemnitz)에서의 카를 하인츠 야콥

할아버지를 생각할 때면 역사가 흑백사진처럼 그려질 수 없음을 분명하게 의식하게 된다. 역사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회색조의 색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회색은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했던 색이었는데, ‘아주 아름다운 회색’을 꾸준히, 그리고 열정적으로 찬양하셨다. 1989년 이후 할아버지의 창작 활동은 국가와의 관련 속에서만 고려되었는데, 그 사실은 미술가인 내게 많은 질문을 던졌다. 나는 사회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사회∙정치적으로 다양한 연관 관계와 유리된 채 “그냥 미술만 하는 것”이 미술가인 내게 가능한 일인가? 내 작업은 정치적인가? 그 작업은 충분히 정치적인가? 등등의 질문들이었다.

2018년 <동독 누아르(DDR Noir)> 설치작업Ⓒ 에릭 체르노우 2018년 <동독 누아르(DDR Noir)> 설치작업Ⓒ 에릭 체르노우

설치작업 <동독 누아르(DDR Noir)>를 만들기 위해 다락방에서 할아버지의 그림들을 끄집어내 나의 가구 설치 작업과 결합시켰다. 그렇게 서로 모순되는 것, 즉 사회주의 리얼리즘 회화와 통독 이후에 널리 퍼졌던 서독의 포스트모더니즘 가구가 하나로 통합되었다. 나라는 개인의 사례를 통해서 동독 미술의 역사가 스스로의 발전에서 차지하는 몫이 얼마만큼인지를 탐구하고, 통합된 독일 미술 역사에서 동독 미술 역사가 합당한 자리를 받을 수 있도록 사람들을 자극하는 것이 내게는 중요한 일이 되었다.

현재 독일에서는 동독 미술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 중이다. 많은 동독 미술가들이 작품 전시회가 열리기를 바라고 있으며, 최소한 작품들이 차분하게 검토될 수 있도록 싸우고 있다. 이들은 전체주의 체제하에서 작업을 해왔지만, 서독 작가와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색채와 형태를 가지고 실험적 작업을 해왔음을 주장하고 있다. 내 생각에 이런 논쟁은 ‘미술 이상의 것’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에 감정적인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동독 시절에 자신들이 달성했거나 힘들게 작업해서 이룬 것이 통일된 독일에서 전혀 인정받고 있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

2018년 압타이 베르크 뮌헨글라트바흐 미술관 <2000년> 설치작업 Ⓒ아킴 쿠쿠리스 2018년 압타이 베르크 뮌헨글라트바흐 미술관 <2000년> 설치작업 Ⓒ아킴 쿠쿠리스
2018년 압타이 베르크 뮌헨글라트바흐 미술관 <2000년> 설치작업
Ⓒ아킴 쿠쿠리스

지난 선거에서 우파 정당들은 바로 이 주제를 정치적 의제로 삼아 구동독 지역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승리했다. ‘서독의 특권층’에 반대하는 투쟁에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동독 탈주민과 이민자들이 적과 경쟁자로 언급되었다. 2018년 가을, 한국에서 개최된 ‘부산비엔날레’의 일부분으로 전시되었던 설치작업 <2000년>은 이 주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은 1989년, 1990년의 미학적 급변을 다루고 있기도 하다. 이런 급격한 변화는 각 가정의 거실에서 완성되었는데, 이때 동독의 실내 가구가 서독의 가구와 결합됨으로써 아주 제멋대로이기는 하지만 새로운 미학이 생겨났다. 이 작품은 한 국가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새로운 체제에서 다시 적응하는 법을 배워야 했던 경험, 인종주의적 세계관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상황, 그리고 상당수의 국민이 점진적으로 우익 세력에 떠밀려 가고 있는 모습 역시 다루고 있다.

<2000년>의 설치작업에서 나는 바닥에 깐 양탄자를 이용해 서독과 동독의 윤곽을 그렸고, 상징적으로 이 윤곽을 다시 나누었다. 방문자들은 또다시 분단된 독일의 지도를 가로질러 움직여야만 한다. 작품을 관람하는 일은 이케아 가구 전시장을 둘러보는 것 같지만, 배치된 여러 가구에는 항상 거슬리는 음향 작업이나 영상 작업이 놓여 있었다. 그것은 나의 개인적이고 극단적인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작업을 통해 나는 1989년, 1990년에 급격한 통일 과정에서 생겨났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충분하게 논의되지 않고 남겨져 있는 것을 논쟁의 주제로 삼으려 했다. 상징적으로 독일을 다시 분할함으로써 시간을 되돌리고, 속도를 줄여서 여러 관계들을 새롭게 생각해보도록 하고 싶었다. 동시에 현재 독일 사회에서 강하게 감지할 수 있는, 서로 멀어져 간다는 감정과 동독과 서독의 차이가 고착되고 있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이처럼 복잡한 문제를 놀이처럼 여기도록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기억과 연상 작용을 일으키는 가구와 사물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것을 통해 정치적 논의를 하도록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부산비엔날레는 그 자체로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 <2000년>에 관람객들은 많은 관심을 보였고, 내가 작품으로 제기한 문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하고자 했다. 작품을 구성한 사물과 가구들은 미학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한국 관객과 소통했고, 작업은 수많은 인스타그램의 배경 사진이 되었다. 비엔날레 체류 기간 중 부산 지역 일간지와의 대담에서는 “독일 통일이 이루어진 당시에 사람들이 놓친 것은 무엇인지”, “한국이 통일될 경우 신중히 고려할 사항들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기도 했다. 처음에는 이 질문들에 약간 압도당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한 명의 미술가인 내가 그처럼 광범위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 논평한다는 게 과연 어울리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답을 고민하다가 나의 할아버지와, 사회 안의 미술가로서의 나의 역할에 대해 생각이 미치게 되었고, 그러자 대답이 한결 쉬워졌다. 누군가의 경험이 다른 경험보다 더 가치 있거나 더 올바르다고 함부로 생각하지 않는 사고가 중요하다. 독일 국민들은 지역이 서독과 동독으로 분리된 채 수십 년간을 살아왔고, 그 안에서 독특한 경험들을 했다. 한 사회의 기억과 경험의 가치를 또 다른 한 사회의 그것과 동등하게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면, 한번 갈라진 틈은 경우에 따라 영원히 메워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2018년 부산비엔날레에서의 <2000년> 인스타그램 사진 출처: 인스타그램 @afterkixx 22018년 부산비엔날레에서의 <2000년> 인스타그램 사진
출처: 인스타그램 @afterkixx
  • 헨레케 나우만
  • 필자소개

    헨리케 나우만은 독일 설치미술 작가로, 동독에서 자라는 동안 1990년대 청년 문화로 극우 이데올로기를 경험했다. 비디오와 음향을 입체적으로 활용해 공간 배경과 결합하는 방식으로 몰입감이 강한 설치 작업을 하고 있다. 급진주의의 메커니즘과 개인적 경험, 청소년 문화의 연관성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최근에는 여러 청년 문화의 세계적 연계성과 문화적 우월주의의 복귀 현상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2018년 부산 비엔날레에서 작품 <2000년>과 <독일 통일을 애도하는 제단>을 선보인 바 있다.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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