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서 묻는다.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냐고, 연주자? 공연기획자? 도시재생이나 청년정책활동가? 도통 나의 정체를 모르겠다고 한다. 누군가에겐 할 일이 마땅치 않아 낄 곳과 끼지 말아야 할 곳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에서 기획자라는 이름으로 참견하는 그런 사람으로도 보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그들은 머릿속에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한 단어’로 나를 정의하려고 한다.

한때는 나 또한 한 단어로 정의될 수 있었다. 대금 연주자 김지훈이라고 말이다. 그러다 ‘기획’이라는 일반적인 단어가 덧붙었다. 하지만 그 단어만으로는 내가 하는 일을 표현할 수 없었다. 기획이란 말에 새로운 정의가 필요했다. 나는 기획을 ‘사물이나 시간, 공간의 기억을 지금의 언어로 전달하는 일’이라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것조차 부족했을까. 요즘의 나는 기획을 ‘쌀밥을 짓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대금 연주자가 쌀밥을 짓는 기획자로 변화하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해방은 어떻게 오는가

기획을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계기는 아마도 7년 전, 전주세계소리축제에서 재일 교포 2세 고정자 선생님과의 만남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선생님은 20여 명에 가까운 고령의 일본인들과 함께 전주에 들러 판소리 공연만 찾아다니셨다. 이후 2년 동안 선생님의 가이드를 했고, 그것이 인연이었던 덕분일까. 우연한 기회에 오사카에 들러 고정자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 고정자 선생님은 불현듯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지셨다. “지훈 씨는 해방이 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일본에서 태어나 오랜 시간, 고된 삶을 보내셨던 선생님은 판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신이 한국 사람임을 느낀다고 하셨다. 하지만 일본어 특유의 발음으로 인해 판소리를 받침 있게 단 한 소절도 하지 못하는 것이 평생 한이라고 안타까워하셨다. 그리고 지금 판소리를 배우고 있는 재일 교포 3세가 받침 있는 소리로 완창하는 날,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해방을 맞이할 거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들은 나는 지금 당장의 생활이 어려워 예술을 그만두려고 했던 것이 어리석었음을 깨달았고, 기획을 시작하게 되었다.

연주와 기획, 비율 바꾸기

기획을 시작하고 나서 가장 먼저, 내가 하고 있던 공연에 대해 돌아보았다. 고정된 레퍼토리는 수고스럽지 않았다. 이미 정형화된 공연이 어떤 의미를 줄 수 있을까 스스로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작지만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일을 해보고자 5년 전부터 전주 한옥마을 거리에서 무작정 대금을 불었다. 정해진 무대도 없었고, 화려한 조명이나, 양질의 음향도 받쳐주지 못했지만, 한옥마을 거리에서 마주하는 전통음악은 연주자와 관객이 서로의 표정과 감정을 동화시킬 수 있는 묘한 매력과 힘이 있었다. 거리 공연을 하는 것이 나름 즐거운 일이었지만, 한편에서는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딴따라’라는 말이 돌아왔다. 그들은 무대 위의 자신과 무대 밖의 나를 분리하며 경계를 만들고, 계급을 형성했다. 그때 단순히 버티기만 했다면, 얼마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옥마을 거리에서 비로소 전통음악을 듣게 된 사람들이 “이제야 전주에 온 것 같다”라는 말을 해주기 시작했다. 고정자 선생님이 떠오르는 말이었다. 그 말들이 힘이 되어 지역의 청년 예술가와 한옥버스킹 축제를 기획했으며, 올해에는 거리에서 일 년 동안 벌어둔 수익금을 가지고, 독일 뒤셀도르프로 향해 국악 거리 공연까지 이뤄낼 수 있었다.

독일 현지에서의 버스킹 현장 독일 현지에서의 버스킹 현장
독일 현지에서의 버스킹 현장

호혜적 관계로 주고받기

“어제 갑자기 고열이 나 새벽에 응급실에 실려 왔어. 아침에 좀 살 만해지니까 우리 손주가 생각나네.” 농촌의 쓰레기 분리수거 연극을 만들며, 나를 친손주처럼 대해 주시던 할머니의 전화였다. 왜 할머니는 그 순간 나를 먼저 떠올렸을까? 그 일이 있기 4년 전, 한 농촌에서 연극을 만들어 달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농촌 지역 어르신들에게 연극을 통해 삶의 질을 향상시키겠다는 목적은 아니었다. 그런 일이었으면 분명 내가 적임자는 아니었을 것이다. 농촌 쓰레기 문제가 심각하니,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마을 주민 주도 연극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임실 중금마을 어르신들과의 활동 임실 중금마을 어르신들과의 활동

연극을 만들어본 적은 없지만, 마침 읽고 있었던 『커뮤니티 디자인』이라는 책에서 관계의 중요성, 놀이로 합의하는 방법과 지속성이 담보되는 행위에 공감하던 차였고, 이를 문화예술 관점으로 풀어보고 싶어 거침없이 뛰어들었다. 자주 놀러가서 밥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었지만, 여든이 넘으신 할머니들이 대사와 등장, 퇴장 순서를 외우며 연극을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칫 시도만 하고 끝났을 법한 이 연극이 말 그대로 극적으로 풀린 것은 김장철에 다녀간 어르신 가족들과의 대화였다. “엄마가 고향에서 혼자 외롭게 지내서 늘 걱정했는데, 연극하면서 놀고 있으니까 너무 보기 좋더라.” 자식들에게 다시 엄마가 된 여든의 할머니. 그간 진행했던 연습 영상과 사진들을 할머니 자녀분들에게 지속적으로 보내줬고, 이는 자식들에 대한 어르신들의 자랑이 되었다. 결과는 어땠을까. 당연히 연극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할머니와의 관계가 계기가 되어 환경축제 개막식과 장관상 수상, 영화 촬영과 마을 축제를 만들었으며, 이를 계기로 그린웨이 환경축제를 맡게 되었다.

강제징용 노동자를 모티브로 한 창작극 <꼬마> 포스터 목욕탕 건물을 개조한 ‘기린토월’ 공간 전시 모습
강제징용 노동자를 모티브로 한
창작극 <꼬마> 포스터
목욕탕 건물을 개조한 ‘기린토월’ 공간 전시 모습

밥 참 잘 지었다

이렇듯 스스로를 정의 내리지 않으니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다. 사이판 여행 중 자살절벽 위 강제징용 노동자의 역사를 마주해 무대공연 작품을 기획하기도 하고, 오래된 목욕탕 건물과 농촌의 창고를 문화공간으로 바꾸는 일도 한다. 또한 고정된 시각에 의해 만들어지는 타인과 개인의 고정관념과, 장르별 경계를 허물기 위해 다양한 장르의 예술가를 어두운 방에 모아 무질서하게 음악을 섞어보기도 한다.

드라마 <대장금>에는 수라간 최고 상궁을 뽑는 장면이 있다. 최 상궁은 온갖 최고의 재료를 사용해 맛있는 밥을 지었지만, 장금이는 평범한 흰 쌀밥을 지었다. 사람들은 최상궁의 밥이 맛있다고는 했지만, 장금이의 손을 들어줬다. 최 상궁의 밥은 이채(異彩)롭긴 했지만, 장금이는 저마다의 입맛을 두루 살펴, 설익기도, 질기도, 눋기도 한 밥을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특별함이 아닌 평범한 공감의 힘이다. 기획자는 공감을 통한 관계 맺기가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밥 참 잘 지었다.” 한 프로젝트를 마쳤을 때, 내가 가장 듣고 싶은 소리다.


WHO’S NEXT?
완주문화재단 장시형 예술진흥팀장을 추천합니다. 제주도 창조적 공간 만들기 워크숍에서 처음 만났고, 이후 지역이 같아 현장에서 자주 마주쳤습니다.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에 행정의 간섭을 최소화하려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예술인마을에서 동네 잡화점 주인을 꿈꾸고 있으며, 현재는 완주를 예술 하기 좋은 도시로 만들기 위한 소박한 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 김지훈
  • 필자소개

    김지훈은 ‘주고받는 것은 같다‘라는 호혜적 관점으로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문화예술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대금 연주자로 전주 한옥마을에서 거리 공연을 시작했으며, 예술 강사와 공연기획자로 활동했다. 이후 전라북도 청년축제, 그린웨이 환경축제, 전라북도무형문화재축제, 선운문화제, 임실군 문화가 있는 날 총괄 기획을 맡았고, 지역에 맞는 문화예술홍보플랫폼을 구축하기 위해 문화통신사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또한 오래된 목욕탕을 개조해 ‘공간 기린토월’을 운영하며 지역 주민들을 위한 문화예술 프로그램도 병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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