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경제 보복으로 번진 문제가 정치적으로 확대되어 한일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양국의 지일·지한파들은 1965년 한일 국교 수립 이래 관계가 최악이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한일 역사 인식의 ‘부정(不正)의 역사’를 부정(否定)하는 일본에 책임이 큰 와중에, 양국 간 관계를 둘러싼 경제, 정치, 역사 등 모든 분야에서 교류의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다. 한편, 문화적으로는 또 다른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국가 및 지자체 주최의 한일 교류 사업 중지가 연일 이어지고 있다. 상황 해결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더 큰 문제이지만, 적어도 문화교류, 민간의 한일 교류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하다. 오히려 적극적인 문화교류는 이러한 경색된 상황을 푸는 해결의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변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부산문화재단이 추진하는 조선통신사 한일 문화교류사업이 주목을 받고 있다. 한일 간 ‘성신교린’, ‘평화교류’의 상징인 조선통신사가 전면에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2019년 조선통신사 행렬 모습

조선통신사, 21세기에 부활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에 의한 교류 단절 이후 1607년에 도쿠가와 막부는 조선과의 화평을 위해 조선통신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는 쇄국 시대의 일본에 있어 유일한 외교 사절단으로 쇼군의 계승을 축하하는 등 총 12회, 약 400~500명이 1년여에 걸쳐 에도(지금의 도쿄)까지 왕래하였다. 조선통신사는 에도로 향하는 도중 일본 각지에서는 다이묘(지방 영주)와 민중의 환대를 받으며 화려한 교류의 장을 열었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 이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묻혀 갔다.

1990년대 들어 일본에서는 한국과 우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통신사를 재인식하려는 움직임이 높아졌다. 1995년 나가사키현 이즈하마라치(현 대마도시)에서 민관 공동으로 광역 네트워크인 조선통신사연지연락협의회를 결성하게 되었고, 매년 연고지역 교류대회를 개최해 왔다. 이 교류대회에서는 쓰시마번의 유학자인 아메노모리 호슈가 호소한 “서로 속이지 말고, 싸우지 않으며, 진심으로 교류한다”라는 ‘성신교린(誠信交隣)’을 바탕으로, 조선통신사를 테마로 한 지역 만들기, 관광 진흥, 인권 계발의 심포지엄이나 행렬 재현, 정보 교환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2011년 11월에는 (재)부산문화재단과 ‘조선통신사 한일문화교류 사업 공동추진 협정서’를 체결하였다.

국내에서 이와 관련한 문화교류 사업은 2000년대 들어 부산이 중심이 되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2001년 부산 바다축제의 일환으로 부산에서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을 추진한 이래 2002년 한일 월드컵 기념행사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을 거쳐 ‘조선통신사 축제’는 매년 5월 부산에서 개최하고 있는 부산의 대표 역사문화 축제로 자리 잡았다. 또한, 부산문화재단은 대마도, 시모노세키, 시즈오카, 카와고에 등 일본 각지에서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에 매년 참가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한일 공동 등재

2012년 5월, 부산의 조선통신사 축제 기간 중 일본의 조선통신사 연고도시 전국교류대회가 부산에서 열렸다. 부산문화재단은 축제 만찬회에서 조선통신사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한일 공동 등재를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일본의 조선통신사연지연락협의회가 화답하면서 유네스코 한일 공동 등재를 위한 여정에 오르게 된다. 조선통신사가 임진왜란 이후 12번 ‘평화의 길’을 떠났던 것처럼 공동 등재를 위한 학술회의도 한일 양국을 왕래하며 12번 개최되었다. 등재 목록 선정부터 신청서 내용을 구성하기까지 한일 양국은 때로는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때마다 한일 학술위원, 실무진 사이의 깊은 신뢰 ‘상호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조선통신사의 정신이 한층 빛을 발휘하게 되었다. 한일 양국에 산재해 있는 조선통신사 관련 기록물 중 세계기록유산 등재 원칙에 맞는 자료를 정하기 위해 양국은 의견을 모으기 시작했다. 최종적으로 ‘외교 기록’ ‘여정 기록’ ‘문화교류 기록’의 3가지 관점으로 등재 목록을 구성하여 한일 양국 111건 333점으로 최종 등재를 신청하게 된다. 2016년 3월 30일에 유네스코 사무국에 신청서를 제출하고, 국제자문위원회의(IAC)를 거쳐 2017년 10월 31일에 등재가 확정되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공동 등재기념식 패널 토론회(좌) 및 특별공연(우) 모습
출처: 조선통신사역사관 홈페이지

조선통신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한일 공동 등재는 한일 양국이 민간 주도로 이루어낸 성취이자, 지역문화의 저력을 과시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조선통신사는 일본의 침략 전쟁으로 단절된 한일 양국의 외교 관계를 회복하고 대등한 교류를 통해 상호인식의 폭을 넓힘으로써 양국은 물론 동아시아의 평화 구축에 크게 기여했다. 따라서 조선통신사 관련 기록물은 한일 양국이 대립과 갈등을 넘어 평화 구축을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세계에서 그 유례가 드문 만큼 인류가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기록유산이라 할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로 인해 부산문화재단에 대한 국내외 언론의 관심이 높아졌으며, 2018년에는 국내 문화 분야 중 가장 권위 있는 대통령상인 세종문화상을 수상하였다.

한일 문화예술교류 플랫폼, 신(新)조선통신사

부산문화재단은 과거 조선통신사 문화교류의 의미를 살려, 일본의 연고지역 문화예술 교류 기관과의 연계를 통해 부산 지역 예술가들의 일본 진출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이른바 문화예술 신(新)조선통신사이다. 공연예술, 시각예술, 거리예술,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일 문화예술 교류의 플랫폼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국내에 잘 알려진 일본의 예술 기관, 예술 축제와의 교류를 적극 활용하여 부산의 문화예술인들이 세계로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중 시각예술 교류가 가장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조선통신사 사업을 통해 오랫동안 교류를 지속해온 요코하마의 뱅크아트 스튜디오(BankART Studio)와는 MOU 체결을 통해 매년 양쪽 도시 예술가들의 레지던스 교류를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뱅크아트의 이케다 오사무 대표는 조선통신사 문화사업에 지대한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는데, 그를 통해 부산문화재단은 일본의 대표적인 문화예술 기관과 축제의 네트워크 확장을 이룰 수 있었다. 올해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세토우치 국제예술제에 한국의 대표로 부산문화재단이 참가하여 조선통신사 사업 소개와 함께, 신(新)조선통신사 한일 문화예술교류 플랫폼 구상을 발표하여 일본뿐만 아니라 아시아 각국에서 참가한 다양한 관계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세토우치 국제예술제의 키타가와 후라무 총괄 디렉터는 3년 뒤에는 부산의 작가들도 꼭 참가하기를 희망하였다.

부산-시즈오카 간 거리예술 교류 역시 결실을 맺고 있다. 부산-시즈오카는 2016년 도쿠가와 이에야스 사후 4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을 메인 프로그램으로 구성하였고, 부산문화재단은 공식 초청되었다. 일회성 교류로 끝내기를 너무도 아쉬워한 시즈오카시의 요청으로 현재까지도 지속적 교류를 이어오고 있다. 시즈오카시의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리예술 콘텐츠 ‘시즈오카 다이도게이 월드컵‘에도 부산의 거리예술 단체 3팀이 올 11월 공식 초청을 받아 참가한다. 이들은 행사 기간 중 전 세계 거리예술가들과 교류하며, 해외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하게 될 것이다. 부산문화재단-시즈오카시는 양 도시 간 거리예술을 중심으로 향후 공동으로 에든버러 축제 진출을 계획하고 있다.

조선통신사, 관계 개선의 실마리 될까

지난 7월 일본의 일방적인 경제 보복 조치로 인해 조선통신사 한일문화교류 사업 역시 부침을 겪었다. 일본에 대한 국민적 감정이 악화되면서 교류사업을 계속해야 하는지에 대한 격론도 있었다. 실제로 8월 4일에 개최된 대마도 이즈하라항 축제에서는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복원한 조선통신사복원선의 ‘13차 조선통신사 항해‘가 중지되었다. 부산문화재단,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대마도 3자가 2년간 야심 차게 준비한 기획이 한일 관계 악화로 인해 행사가 축소된 것이다. 지역 내 여론과 문화예술계의 적극적인 후원과 응원으로 부산문화재단은 예년 수준의 규모로 대마도 행사에 참가하였다. 그동안 15년 이상의 교류를 통해 쌓아온 신뢰와 평화의 상징인 조선통신사의 의미를 양국 관계자들은 재차 실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통신사가 힘들게 와 줘서 너무 고맙다’라는 일본 시민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조선통신사를 통한 교류가 한일 관계 개선의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라는 기대감 역시 가지게 되었다.

긍정의 역사와 기억으로

지금과 같이 경색된 한일 관계에서 조선통신사라는 긍정의 역사와 기억을 복기할 필요가 있다. 한일 양국 국민들의 인식이 이를 잘 대변해준다. 부산문화재단은 조선통신사 세계기록유산 등재 1주년을 기념하여 한일 양국 시민을 대상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한일 공동 등재에 대한 인식조사’를 2018년 5월부터 9월까지 조선통신사 한일 행사 일정에 맞춰 5차례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한일 공동 등재로 인한 한일 관계 개선의 영향에 대해서 한국 83.1%, 일본 응답자 90.9%가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한일 양국 최초로 실시한 이번 인식 조사를 통해 두 나라 국민들이 한일 관계에서 ‘긍정의 기억’ ‘긍정의 역사’인 조선통신사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일 양국은 문화적으로 동북아 평화 공존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긍정의 기억’ ‘긍정의 역사’인 조선통신사 한일 문화교류에 대한 조명을 통해 ‘과거를 통해 함께 미래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한일 관계가 어렵고 힘들어도 조선통신사의 숭고한 ‘성신교린’이 더욱 빛을 발휘할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 조정윤
  • 필자소개

    조정윤은 한일간 예술경영, 문화정책을 주로 연구하고 있다. 부천문화재단 문화사업팀, 고양시 문화예술 전문위원으로 재직하였으며,일본국제교류기금 연구펠로우로 선정되어 요코하마에서 2년간 일본 지역문화재단 조직운영, 일본 공립문화시설을 연구, 조사하였다. 마포문화재단 공연전시사업팀장을 거처, 부산문화재단에서 UNESCO 세계기록유산인 ‘조선통신사’ 한일 문화교류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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