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은 지나간 일의 돌아옴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생기는 감각이다. 그렇게 음악과 영화는 일상이 되었다. 그런데 내가 지금 듣는 음악이 내 생에 마지막 듣는 음악이라면? 어제 본 영화가 역사에 마지막 상영된 작품이라면?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이하 피스트레인)을 포함해 줄줄이 페스티벌이 취소되는 것을 보면서, 만 명 단위 이상의 사람이 모여서 떼창을 하고, 슬램(SLAM)을 하고, 터질듯한 현장의 바이브(VIBE)를 만드는 페스티벌은 어쩌면 2019년이 마지막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내 생에 설마 다시 볼 일 없겠어'하는 마음이 여전히 있지만, '이미'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니, 우리가 알 던 '그' 페스티벌은 다시 볼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

온라인 전환과 취소에 대한 소식은 이미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취소 뒤에도 남겨진 이야기는 많다. 기쁜 마음으로 나눌 거리는 아니지만, 내가 마주하는 것을 돌아보게 하고, 우리가 마주하는 것에 대해 머리를 맞대게 할 정도의 의미는 있는 얘기다.

피스트레인 취소를 결정하고

올해의 피스트레인을 취소하기로 결정한 것은 지난 6월 23일(화)이었다. 강원도청과 철원군청 담당자들, 피스트레인 총감독, 예술감독, 그리고 사무국장인 내가 모였다. 모인 사람은 많았지만, 의견은 분분하지 않았고, 취소 결정까지의 시간은 짧았다. ‘감염병 재생산지수(R)1)’가 1.75로 제시된 당시 상황의 심각성 앞에서 많은 말을 할 수 없었다.

출처: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페이스북 출처: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페이스북
출처: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페이스북

취소를 대외적으로 공지하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확인할 일이 많았다. 한꺼번에 몰리는 민원 앞에서 우물쭈물하면 모두에게 혼란과 짜증만 커질 뿐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취소 공지를 준비하는 와중에 조금 뻘쭘한 일이 있었다. 피스트레인의 자원봉사자인 피스메이커(peace maker)의 첫 화상 오리엔테이션이 6월 25일(목) 저녁에 잡혀 있었던 것이다. 페스티벌도 취소된 마당에 자원봉사자 오리엔테이션을 왜 하나 싶을 수 있지만, 피스메이커 한 명 한 명은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피스트레인에 자원해준 사람들이었다. 첫인사가 작별 인사라 할지라도 얼굴도 보지 않고 문자로 통보할 수는 없었다. 원격 오티는 예상보다 어색하지 않았고, 피스메이커들도 상황에 대한 이해와 위로의 마음을 나누어주었다.

하지만 서로를 다독이는 것 외에도 할 일은 많았다. 원격 오티 하루 전, 취소 결정의 망연자실함을 눌러두고 ‘사업종료계획서’를 작성했다. 아이러니하지만, 종료도 잘 계획하고 잘 진행해야 한다. 아래 표는 꼭 필요한 것들을 초안으로 정리해본 그때 계획서의 일부이다.

구분 할 일 비고
아티스트 • 취소 통보
• 출연계약 해지 관련 서면 확인서 상호 교환
취소 통보 완료
협력 기관 • 취소 통보 (공문) OOO 등
관객 • 홈페이지, SNS, 개별 문자를 통한 취소 공지
• 블라인드 예약자 예약금 환불
• 일반 예약자 예약 사항 취소
• 취소 공지일 기준 예약자에 대한 답례품 제작 후 발송
취소 통보 및
예약금 환불
완료
기타 관계자 • 개별 연락을 통한 취소 통보 자원봉사자
55명 등
고용 인력 • 잔존 과업별 계약 종료 기간 상호 검토 및 협의
• 계약 종료 기간에 따른 잔여 인건비 계산 등 근로계약 사항 변경 확인 및 서면 정리
-
회계 정산 • 각종 계약 등 용역 진척도에 따른 정산 작업 진행(진척도 비례 지급 후 해지)
• 각종 계약의 중도 해지에 대한 서면 확인서 상호 교환
• 보조사업 총괄 정산자료 작성
• 회계 검사 및 정산보고서, 종료보고서 제출
-
외부업체입찰 • 우선협상대상자 지위 보전 관련 협의
• 협의 결과에 대한 업체 서면 통보
-
기록 • 기획자료, 홍보자료, 기타 각종 업무 자료 중 기록/정리 대상 확정 및 정리 작업 진행
• 페스티벌 기획 및 진행 과정에 대한 기록물 정리
-

종료 계획을 문서로 쓰면서 놀랐다. ‘끝내는 것도 참 간단치 않구나!’ 이걸 다시 주간 단위 일정으로 정리했는데, 페스티벌을 제대로 진행했을 때보다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랐다. 실제로 철원군청 담당자도 “처음에 세웠던 사업 기간보다 더 걸릴 텐데요. 괜찮겠어요?”라고 말했다. 그 말이 어찌나 고맙던지. (그래도 더 끌 마음은 없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들

페스티벌 정리 과정은 개최와는 확실히 다른 ‘업무’였다. 있던 일이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일이 새롭게 생긴다. 대표적으로 개별 계약의 진척 상황에 대한 평가와 ‘계약해지합의서’ 작성이 있다. 중간에 엎어진 일을 수습해본 적은 왕왕 있다. 하지만 커다란 하나의 사업에 딸린 ‘모든’ 영역의 계약서 전체를 다 재검토하고, 평가하고, 계약 해지 합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예상치 못한 ‘많은 일’이었다. 한국행 비행기조차 타지 못했지만, 이미 계약을 체결했던 해외 뮤지션을 포함해 40여 팀의 밴드와 그 외 상당한 숫자의 개인 아티스트들, 디자인, 홍보, 현장 운영, 숙박, 교통, 개인 용역 등등, 분야별 계약을 다 모으면 백 건이 훌쩍 넘었다.

계약 내용에 대한 진척 상황을 평가하는 일은 또 다른 모호함과 어려움에 부딪혔다. 우리의 경우 여러 계약의 ‘이행’을 확인하는 ‘근거자료’는 ‘페스티벌 현장’이었다. 행사가 잘 치러지면 그것이 가장 확실한 ‘증빙’이었다. 그런데 행사가 없다! 이 경우 수차례 현장을 답사하고, 토지를 실측하고, 공간운영계획(zoning)을 만들고, 현장 운영을 책임지는 것까지를 과업으로 했던 ‘현장운영감독’의 업무는 몇 퍼센트나 진행된 것으로 봐야 할까? 실제로는 항공사진을 놓고 사무국 내에서 토의하면서 정리했던 일인데, 정산과 증빙을 위해서 별도로 보고서를 만들어야 하는 걸까? 어떤 사진 한 장에는 페스티벌의 성사를 위한 많은 ‘투명한’ 이야기들이 쌓여 있다. 그런데 행사는 없어졌고, 이제는 그것을 어느 정도(?) 투명하지 않게, 문서로 볼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흔히 뱉어온 말인 ‘행정을 위한 행정’이라고 치부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문서와 글보다 ‘현장의 언어와 습(習)’으로 말하는 일이 공연 분야의 특성이기도 해서, 자주 합리적 선에 대해 고민한다. 페스티벌 기획 작업은 단가품의 수량 공급처럼 딱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준비하는 것들

행정적 정리 외에도 진행하는 일이 몇 가지 더 있다. 매거진과 영상, 굿즈(goods)가 그것이다. 매거진은 최초 기획에서부터 취소의 순간까지를 담기 위한 책이니 일종의 백서라 할 수 있다. ‘on line’이 아닌 ‘on paper’로 우리가 그렸던 순간들, 현장들, 이야기들을 담아보고, 그것으로 다른 이들에게 올해의 피스트레인을 ‘상상’해보게 하고 싶었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페스티벌에 가는 설렘, on site(현장)의 흥분, 풍경이 주는 나른함과 아련함 등의 정서를 온전히 마음에서 그려보기를 기대하는 최초의 ‘지면 페스티벌’인 셈이다.

취소된 페스티벌을 영상으로 대체하는 작업에도 몇 가지 방식이 있다. ‘현장’을 대체해서 ‘실시간’ 온라인을 기획하기도 하고, 팀별 무대공연을 촬영해서 편집 후 유튜브 등으로 공유하기도 한다. 피스트레인은 일단 ‘취소’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서 영상이 대체해야 할 ‘현장’이 따로 있지 않았다. 대신 한 사람의 시선으로 ‘페이크 다큐멘터리(fake documentary)’를 만들기로 했다. ‘일탈’일 수 있는 페스티벌도 사실은 사람들의 지속 가능한 ‘일상’ 안에서 가능하기에, 그것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페이크 다큐로 담는 것이다. 다큐에는 올해 서기로 했던 몇몇 팀의 라이브 촬영 영상이 삽입되고, 픽션과 논픽션, 인터뷰 장면 등이 교차된다. 페이크 다큐. 거짓말 같은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 시대에 적절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그 외 날짜 변경과 기존 예매표의 일괄 취소 등의 번거로움, 개최가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피스트레인 너만큼은’이라는 마음으로 긴장 타는 시간을 함께해준 관객(예매자)들에게 소소한 답례를 위해 굿즈도 만들고 있다.

출처: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페이스북 출처: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페이스북
출처: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페이스북

힘들었던 몇 가지

혹시 다른 사례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진행하지 못한 사업의 종료 과정에 활력이 있지는 않다. 파트너들에 대한 마땅한 예의와 하지 않을 수 없는 실무가 남아 있지만, 대단한 동기부여가 될 리 없지 않겠나? 이런저런 외부 회의에서 내가 보이는 어이없는 실수들에 대해 업계 동료들은 “설 국장이 페스티벌 취소 충격이 커서 그래”라고 농담을 던진다. ‘속상함’의 질감이 느껴지지 않아서 내가 받은 충격은 별로 없나 보다 싶었는데, 실수들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 농담이 농담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렇게 기운을 내기 힘든 상황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필요한 위로를 나누고, 또 할 일을 하는 것은 참 짠하고 어렵다.

자원봉사자인 피스메이커와 가졌던 이별 같은 첫 만남 말고 어색한 일은 또 있다. 보통 페스티벌이 끝나면 성과 정리 같은 후속 작업을 하고 모든 업무를 다 함께 마치는 시점이 있다. 그간의 수고에 서로 감사하고, 내년에는 더 잘해보자는 다짐도 나누면서 파티처럼 각자의 시간으로 돌아가기 위한 의식을 치른다. 그런데 행사가 취소되면서 각자 맡은 일의 종료 시기를 맞추기가 어려워졌다. 자잘한 일들이 많아서 애초 근로계약에서 오히려 연장계약을 해야 했지만, 어쨌든 책상을 정리하는 날짜가 조금씩 어긋났다. 모두가 함께 일을 마치고 책상을 정리하는 것은 작별의 느낌이 아닌 축하에 가깝다. 하지만 올해는 7월 말부터 매주 한 번씩 작별을 한다. 그게 참 어색하다.

감사한 것

그런 씁쓸함 가운데서도 감사한 것이 있다. 불확실함을 함께 견뎌온 사무국 멤버들이나 뮤지션들, 관객들이 고마운 것도 물론 있지만, 즉각적으로 와닿았던 것은 그간의 비용 지출과 종료 과정에서의 예산 사용을 우호적으로 인정해준 강원도와 철원군의 파트너십이었다. 강원도와 철원군이 피스트레인을 사랑하는 페스티벌 덕후가 아닌 것도 알고, 지역 관광이나 경제 활성화 등을 위해 포기하기 아까운 브랜드라는 인식이 주요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지만, 그래도 고마운 것은 고마운 거다.

남겨진 일

대개 성공은 취약함을 보지 못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올해는 그 반대였다. 열지 못한 행사는 아쉬움과 계약 해지를 위한 문서들 외에 페스티벌을 만드는 ‘우리’를 돌아보게 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 놓인 관계의 모호함이나 취약함을 덮어줄(?) 페스티벌뽕, 현장뽕이 올해는 공급되지 않았다. 코로나가 금세 사라지지 않을 것 같고, 코로나 외에도 불확실함이 널린 게 페스티벌 신(scene)이다. 이런 불확실함 앞에서 서로를 원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관계가 명료하고 간단할수록 좋은 것 같다. ‘좋은 게 좋은 것’이란 말은 진짜 좋을 때 하면 된다. 이제 차근차근 관계를 직면해야 한다.

민주노총 <2020 메이데이 온라인 국제연대 콘서트> 유튜브 썸네일 출처: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페이스북

위로를 전하며

지난주에는 철원의 여러 마을이 침수된 장면을 뉴스로 봤다. 철원뿐이겠는가? 그래도 철원은 내가 한 해 동안 하는 일의 반 이상이 쌓이는 곳이라 남 일 같지 않았다. 작년 가을부터 아프리카돼지열병(ASF)으로 살얼음판 같은 경제 상황에 놓였었는데, 올해는 코로나로 겨우 서 있는 무릎이 탁 풀렸다. 거기에 홍수라니! 불안과 아픔이 쌓인 곳에 문화기획자로서, 페스티벌 기획자로서 할 일이 무엇일지도 깊게 고민해봐야겠지만, 우선은 마음을 담아 위로를 전한다. 수해를 겪어 봤기에, 뉴스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그림자가 길 것을 알기에, 그래서 힘을 잃지 않으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1) 감염병 확산에 대한 평가값으로 R이 “1” 이하이면 감소세, “1” 이상이면 확산세를 뜻한다.

  • 설동준
  • 필자소개

    설동준은 학부 때 원자핵공학을 전공한 후 아무 관련 없는 예술 분야에서 프리랜서 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서른 살에 국악 단체에서 기획 및 단체경영 업무로 예술업에 발을 들였고, 현재는 ‘DMZ 피스트레인 뮤직페스티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예술, 과학기술, 신학 등의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교육공학을 전공하면서 사람의 변화와 성장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최근에는 생활문화, 인력양성, 문화예술교육 영역에 대한 연구 및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 페이스북 바로가기
  • 트위터 바로가기
  • URL 복사하기
정보공유라이센스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