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그리고 신생공간

마포구 성산동에 위치한 취미가(趣味家, Tastehouse)에서는 기획전 <숏서킷>(2021.1.28.~2.28)이 열리고 있었다. 전시는 곽이브, 김동희, 돈선필, 정유진 작가의 구작들로 꾸려졌다. 전시장 내에는 네 작가의 작품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돈선필의 <사족보행택배상자>는 가상의 피규어 상점의 상품을 운반하는 개체이며, 정유진의 돌무늬 종이로 만든 벽돌 모양의 곽 <폭삭벽>은 쌓는 순간 무너지게 되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김동희는 전시가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가벽 또는 구조물을 만들거나 변용해 작업으로 제시하며, 곽이브는 예전에 구입해둔 물감을 캔버스에 펴 바른 그림들을 걸었다. 네 작가가 쌓아 올린 시간은 꽤 두껍고 무겁게 전시장에 내려앉아 있었다. 기획의 글은 “기금 행정에 맞추어, 한 해의 작업 사이클을 조정하고 (...) 수많은 짧은 서킷에 각자의 몸을 싣고 달리기를 반복”하고 있다고 적었는데, 이는 젊은 작가와 공간 운영자의 현실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쉬지 않고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지만 상황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고, 눈앞에 펼쳐진 해야 하는 일들에 매몰되어 소진되지 않기 위해 지난 궤적을 돌아보고 정리한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지난 시도의 의미가 더 명확해지기도 하는 법이다. 2016년부터 현재까지 쉴 틈 없이 달려온 운영진의 솔직한 고민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취미가(趣味家, Tastehouse) 숏서킷 전시 전경 취미가(趣味家, Tastehouse) 숏서킷 전시 전경
취미가(趣味家, Tastehouse) <숏서킷> 전시 전경
*사진제공: 최정윤

신생공간이 뭘까?

‘신생공간’이란 무엇일까? 단어만 뜯어본다면 생긴 지 얼마 안 된 곳이라는 의미일 텐데, 그렇다면 생긴 지 얼마큼이 지났어야 ‘신생’으로 구분할 수 있는 걸까? 신생공간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미술계 내의 맥락을 조금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용어를 정확하게 정의하기는 힘들지만, 신생공간은 2010년 이후 생긴 공간들로, 작가, 기획자, 콜렉티브 등 미술계의 구성원이 조직하고 운영하는 공간을 일컫는다. 이런 공간은 홍대나 인사동과 같은 미술공간이 밀집한 곳이 아닌, 미개발지역, 재래시장, 낡은 상가 등 월세가 비교적 저렴한 지역에 위치하는 경우가 많다. 이름과 로고, SNS 계정으로 작동하며, 전시장 오픈 시간도 제각각으로 불친절하고, 예약제로만 관람할 수 있는 곳도 많다. 접근성이 좋지 않아 미술 관계자의 방문이 주를 이루지만, 점차 일반 관객도 늘고 있다.
신생공간을 운영하는 이들은 1세대 대안공간처럼 ‘대안’을 제시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단순하게는, 운영진이 해보고 싶은 것들을 자유롭게 해보는 기회로 삼는다. 운영진은 1980년대 이후 출생의 미술인이 많은데, 이들은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며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헌신하지 말자, 재미있게 놀자” 등을 모토로 내세운다. 신생공간이 수익 사업을 하는 곳인지 혹은 비영리 공간인지 구분하는 것도 어렵다. 이윤 창출만이 목적은 아니지만, 공간 운영과 전시 지원을 위해 판매나 중개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소규모 굿즈나 에디션, 식음료를 판매하거나 입장료를 받기도 한다. 다시 말해, ‘신생공간’으로 불리는 공간들에서 균질성이나 통일성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각각의 다양성에 더 집중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2010년 이후 자생적인 독립 공간들은 꾸준히 있었지만, ‘신생공간’이라는 이름으로 호명되며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아마도 몇 가지 사건이 벌어진 2013~2015년이다. 시청각과 커먼센터의 개관, 미술생산자모임, 공장미술제 공개토론회, <청춘과 잉여>전(2014)과 좌담회 <안녕 2014, 2015 안녕>, 청년관을 위한 예술행동, <굿-즈>(2015)와 <서울바벨>전(2016)까지. 아트인컬처나 미술세계 등 미술 월간지에서도 신생공간들을 소개하기도 했는데, 자료를 살펴보면 매체에 따라 그 대상 공간 목록이 매번 다르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이는 모두가 동의하는 명확한 신생공간의 정의나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방증한다. 최근에는 2019년 3월 플랫폼엘의 〈Take me Home〉전, 2020년 4월 대림미술관의 <이 공간, 그 장소: 헤테로토피아>전에서 신생공간 혹은 독립예술공간을 소개했다.

Life goes on: 계속 이어져 나가는 흐름

앞서 언급한 <굿-즈>나 <서울 바벨>전에 참여했던 신생공간들은 두세 곳을 제외하고는 현재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다. 운영 기간은 짧게는 1년부터 길게는 6~7년까지 다양하며, 폐관의 이유는 각기 다르겠지만, 재정적 어려움, 공간계약 기간 만료 등으로 추정된다.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활동을 이어나가는 공간들도 있다.
먼저 2015년 2월 개관한 마포구 서교동의 합정지구는 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작가, 비평가, 기획자를 소개하는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2021년에는 4회의 기획전과 안혜상, 정여름, 안데스, 이형주의 개인전을 선보일 예정이다. 2016년 4월 관악구 신림동에 개관한 산수문화는 김지평 작가가 운영하는 공간으로, 동아시아 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다층적으로 모색한다. 올해 상반기에는 이제와 문영민 작가의 개인전이 열린다. 2016년 10월 개관한 종로구 혜화동의 아웃사이트는 김상진 작가가 운영하는 공간이다. 올해 아웃사이트에서는 남진우, 최모민의 개인전과, 두 개의 기획전을 만나볼 수 있다. 2017년 11월 개관한 마포구 서교동의 전시공간은 박상아 김용관 작가가 운영하는 공간으로, 3월에는 기획전 <비명횡사: 사라지는 것들>을 통해 일러스트와 만화를 기반으로 하는 작가들을 선보이며, 5월에는 소규모출판사들의 서적에 관한 전시를 준비 중이다.
2017년 3월 을지로에서 문을 연 소쇼룸은 2019년 종로구 계동으로 확장 이전하며 이름을 소쇼(SOSHO)로 변경했다. 인스타그램을 기반으로 자료를 아카이빙하고 홍보하며, 관객과는 DM으로 직접 소통한다. 공간을 운영하는 기획자 황아람과 작가 김민경은, 소쇼가 전시를 선보이는 장소로서의 공간을 넘어서,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는 하나의 브랜드가 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지난 5년여간 전시기록을 위한 도록이나 출판물은 만들지 않았으며, 최근에는 유튜브 채널을 만들었다. 멤버십으로 운영하는 아트클럽(토크, 세미나, 렉처 등)도 구상 중이다. 2013년 11월 종로구 통인동에서 문을 연 시청각은 2019년 10월 그 공간에서의 활동을 마무리하고, 2020년 4월 용산구 용문동에서 오피스 개념의 전시 공간인 시청각 랩(AVP lab)을 열었다. 2017년 겨울 창간한 동시대미술을 포함한 시각문화를 다루는 시각문화 비평지 [계간 시청각]은 4호까지 발간됐다.
이외에도, 다 언급하지 못했지만 탈영역 우정국, 공간사일삼, spacexx 등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공간들이 많다.

소쇼(SOSHO)에서 열린 엄유정 작가의 전시 FEUILLES (2021) 소쇼(SOSHO)에서 열린 엄유정 작가의 전시 FEUILLES (2021)
소쇼(SOSHO)에서 열린 엄유정 작가의 전시〈FEUILLES〉(2021)
*사진제공: 소쇼(SOSHO)

새롭게 문을 연 공간들

몇몇 공간들이 문을 닫은 데에 대한 아쉬움도 잠시, 최근 2~3년 사이 새로 문을 연 공간들이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중에서도 가장 최근에 문을 연 곳부터 몇 곳을 소개하고자 한다. 2021년 2월 작가 문보람, 정명우, 조익정이 운영하는 퍼포먼스 공간 윈드밀(WINDMILL)이 용산구 청암동에 문을 열었다. 윈드밀은 힙합 댄스 동작의 이름이자 풍차, 방앗간을 의미하는 단어로, 동적인 에너지를 강조하며 이곳이 움직임을 위한 공간임을 보여준다. 2021년에는 퍼포먼스 공연, 퍼포먼스 영상 스크리닝, 워크숍, 독서 모임 등을 기획하고 있다.

취미가(趣味家, Tastehouse) <숏서킷> 전시 전경 취미가(趣味家, Tastehouse) <숏서킷> 전시 전경
윈드밀에서 열린 〈Windmill Screening vol.1 Stand by〉 전경
문보람 작가의 <당신의 본드 옆에>(2020), 남화연 작가의 <습작>(2020)
*사진제공: 윈드밀(WINDMILL)

2021년 1월 성북구 길음동에 개관한 사가(SAGA)는 지역 활성화와 젊은 창작자 지원을 위해 성북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마련된 전시공간이다. ‘사가’는 이야기를 뜻하는 용어로, 역사와 같이 규모가 큰 이야기를 보존하는 서사 형식을 부르는 이름이자 RPG 게임에서 판타지, 전설, 모험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 공간에서는 ‘에피소드’, ‘레슨’, ‘이벤트’ 세 프로그램이 운영되는데, 에피소드는 전시, 레슨은 소규모 워크숍, 이벤트는 일시적인 지식생산 행사를 뜻한다. 2021년에는 강유진(울산시립미술관 학예사), 권태현(독립 큐레이터), 박성환(아마도예술공간 책임 큐레이터)가 운영 전반을 맡는다.

왼쪽: 사가 전시장 전경, 오른쪽: <매킨토시 킨트> 전시 전경 왼쪽: 사가 전시장 전경, 오른쪽: <매킨토시 킨트> 전시 전경
사가(SAGA) 전시장 전경(왼쪽)과 전시 <매킨토시 킨트> 전경
*사진제공: 사가(SAGA) *촬영: 성의석

2020년 12월 개관한 뮤지엄헤드(MUSEUMHEAD)는 종로구 계동에 문을 연 비영리 전시공간으로, 공간명 뮤지엄헤드는 ‘미술(관)에 광적인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큐레이터 권혁규가 전시를 기획하며, 개관전 <나메>에 이어 동시대 조각을 다루는 두 번째 기획전 <인저리 타임>이 열리고 있다. 올해에는 자체 기획전 위주로 소개할 예정이며, 2층에는 프리미엄 티 브랜드 델픽(Delphic)이 있다.
2020년 11월 관악구 봉천동에 개관한 실린더(CYLINDER)는 작가 노두용이 운영한다. 공간명 실린더는 펌프의 핵심 동작 부분으로, 피스톤이 움직이는 공간에서 가져왔다. 엔진과 같이 추진력을 내거나 혹은 그것을 지지해준다는 의미에서다. 공간의 성격을 확실시하는 첫해인 만큼 기획전을 다수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는 대관을 통해서만 수익이 발생하지만, 추후에는 운영비 구축을 위해 작품 중개도 염두에 두고 있다.
2020년 8월 성북구 삼선동, (구)명성교회 건물에 다목적 공간, 디스이즈낫어처치(THIS IS NOT A CHURCH)가 개관했다. 작가 이정형, 이예승, 정기훈이 운영하는 공간으로, 전시, 공연, 행사, 촬영 등 다양한 활동들이 벌어질 예정이다. 교회였던 공간을 리모델링하여, 층고가 높은 것이 특징이다. 벽도 많지 않고 조명도 충분치 않지만, 제약적인 환경 속에서 이 공간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일들을 기대하게 된다. 대부분의 행사는 대관으로 이루어진다.

<뉴노멀: 적정거리> 전경 <뉴노멀: 적정거리> 전경
디스이즈낫어쳐치에서 열린 <뉴노멀: 적정거리>, <수행하는 회화> 전경
*사진제공: 디스이즈낫어처치(THIS IS NOT A CHURCH)
*촬영: 박종명(왼쪽), 이의록(오른쪽)

2019년 10월 성북구 삼선동에 11명의 큐레이터(장혜정, 송고은, 김정현, 김성우, 김선옥, 권혁규, 맹지영, 박수지, 신지현, 이성휘, 최희승)가 공동 운영하는 프로젝트이자 공간, 웨스(WESS)가 개관했다. 공동운영자가 공간유지비용을 나누어 내며, 각자의 활동을 지속하기 위한 물리적 工간의 확보한다. 2021년에는 맹지영, 송고은, 권혁규, 장혜정, 김선옥의 기획전을 준비하고 있다. 미술계로 막 진입한 작가들의 작업을 리서치할 수 있는 〈WESS 포트폴리오 아카이브〉, 미술과 출판, 도록을 공유하는 플랫폼인 〈WESS 전시후도록〉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따듯해져 가는 날씨와 함께 2021년 신생공간들의 전시계획과 새롭게 시작하는 공간들에 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본고에서 미처 다 다루지 못한 공간들이 더 많다. 트위터에서 엮는자(@herbererr)라는 이름으로 신생공간을 매핑하고 신규 소식을 모아서 업데이트하는 역할을 자처했던 장영주는 서울아트가이드에 ‘신생공간탐방’이라는 연재칼럼을 기고하고 있다. 이 칼럼에서는 서울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에 있는 공간들도 소개한다.
신생공간에서의 전시들은 대체로 작은 규모이지만, 더 거침없고 야생적인 시도가 가능하다. 의사결정이 빠르게 이루어지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전시장의 규모가 미술관에 비해 비교적 작기 때문에 개인전이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아직 전시 경력이 많지 않은 신진작가의 개인전뿐만 아니라 40-50대 중견작가의 개인전도 만나볼 수 있다. 일부 공간에서는 공간의 성격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준비한 기획전을 위주로 선보이기도 한다. 대부분 개인이 운영하다보니, 운영진의 개인적 취향이나 관심사가 전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한번 방문한 전시공간을 재방문하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신생공간들에게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아마도 관객들의 발길일 것이다. 을지로 OF의 운영자 오웅진은 “공간을 찾는 모든 관객에게 동일하게 전시에 관한 설명을 한다”고 말했다. 미술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늘리고자 하는 작은 노력이다.

  • 최정윤
  • 필자소개

    최정윤은 독립 큐레이터로, 동시대 미술과 연관된 주제로 글을 쓰고 전시를 기획한다. 부산비엔날레(2012), 아트인컬처(2012~2014), 광주 아시아문화개발원(2014), 스페이스윌링앤딜링(2017-2019) 등에서 동시대 미술현장을 두루 경험했다. 공동기획한 전시로는 <청춘과 잉여>(2014), <사물들: 조각적 시도>(2017)가 있으며, 기획한 전시로 〈Rules〉(2016), 〈Painting network〉(2019)가 있다. 현재 네이버 블로그 미술가이드 미술랭을 2명의 동료와 공동 운영하며, 더 많은 사람이 쉽게 읽을 수 있는 미술에 관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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