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운드 아트, 음이 아닌 소리(사운드)의 세계

미국 미니멀리즘 음악의 창시자인 라 몬테 영(La Monte Young, 1935-)은 아이다호의 산골 출신이다. 그는 어린 시절 산과 들에서 즐겨들었던 바람과 물, 나뭇가지의 소리가 주는 아름다움을 평생 잊을 수가 없었다. 커서 작곡가가 된 이후에도 그는 이 자연의 소리를 묘사하고 싶었지만, 악기로는 이를 온전히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바람이나 물소리는 연속적이면서도 일정한 높이(음정)를 지니지 않지만, 악기가 내는 음(音)은 단절적이고 일정한 높이를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음악은 사람을 포함하여 악기가 내는 음들이 일정한 질서를 이루고 있는 인위적인 체계다. 음악은 청각 예술이라고 일컫지만, 알고 보면 무질서한 소리를 배척함으로써 아주 예외적인 청각 현상에 제한된다. 음악의 ‘음’(tone)은 질서가 있는 소리다.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는 우주의 질서(코스모스)를 증명하기 위해서 음악을 증거로 제시했으며, 근대인들은 화음을 음과 무질서한 소음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20세기 들어서도 여전히 음과 소음은 물리학적으로 구분되었다. 음은 규칙적인 파동으로 이루어진 반면, 소음은 불규칙한 파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무질서한 소리는 모두 음악에서 배제되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우리의 주변을 둘러싼 거의 모든 소리는 무질서한 소음일 뿐 균제적인 음이 아니다. 음과 소음의 이 강력한 이분법은 일상의 세계에서 우리가 듣는 소리를 소음으로 배척하게 만든다. 예술을 감상할 수 있는 고상한 ‘취향’(taste)이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근대 미학적 편견은 평범한 일상의 삶을 하찮은 것으로 폄하하였다.

루솔로, 자신이 직접 만든 소음악기 (사진으로만 전해질 뿐 실제 악기는 남아있지 않음)

전통음악에 대한 현대음악의 큰 흐름 중 하나가 ‘음’에 대한 반란이다. 이러한 반란은 음과 소음의 엄격한 이분법에 대한 거부를 의미한다. 여기에는 이러한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음이든 소음이든 모두 ‘소리’다. 따라서 음악은 음이라는 협소한 소리만을 다루는 것이 아닌 모든 소리를 다루어야 한다. 사실 음과 소음이라는 구분의 기준 자체가 모호하며 역사적으로도 변하였다. 주지하다시피 고전주의 시대에 소음으로 간주되던 불협화음은 후대에 음으로 간주되었다. 심지어 20세기 초반의 이탈리아 미래파 음악가인 루솔로(Luigi Russolo,1885-1947)는 [소음의 예술](L‘arte dei rumori, 1913)이라는 선언문을 발표하여 일상 세계의 소리가 지닌 아름다움을 역설한다. 그는 시장이나 상가의 웅성대는 소리, 공사장이나 공장의 기계음과 같은 소리야말로 생기와 역동성을 지닌 것으로 간주한다. 그는 전통적인 음악에 익숙한 귀에는 이 소리가 지닌 생기와 아름다움이 느껴지지 않겠지만, 이 편견을 벗어나면 베토벤보다 더 감동적인 소리의 향연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음악을 음이 아닌 소리의 예술로 간주해야 한다는 주장은 음악에 대한 새로운 정의에서도 나타난다. 프랑스의 작곡가 에드가르 바레즈(Edgard Victor Achille Charles Varès, 1883-1965)는 “음악의 재료는 음이 아닌 소리인데, 음악을 숭배하는 사람들이나 심지어 작곡가들조차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작업을 ‘음악’이 아닌 ‘조직된 소리’(organized Sound)라고 불렀다. 음이 아닌 소리를 다루는 것이 음악의 본래 사명이라는 생각은 우리에게 [4분 33초]로도 잘 알려진 존 케이지(John Cage, 1912-1992)에게서도 발견된다. 바레즈처럼 케이지도 자신의 작업을 음악이라는 말보다는 ‘소리의 조직화’(organization of sound)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였다. 한 마디로 음악은 ‘음’이라는 한정된 현상이 아닌 일상의 소리와 기계음을 포함한 모든 소리를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운드 아트’(Sound Art)라는 말이 20세기 후반부터 알려지고 현재 하나의 새로운 예술 경향이나 장르처럼 부상하고 있지만, ‘음’으로부터 ‘소리’로 확장하고자 한 20세기 현대 음악가들의 시도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탈경계의 예술, 사운드 아트는 음악, 미술, 공연 중 어디에 포함되는 것일까?

‘사운드 아트’의 흥미로운 특징 중의 하나는 이것이 어느 예술의 장르에 속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항상 동반한다는 점이다. 사운드 아트에서 소리는 필수적인 요소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운드 아트 작업은 그림, 사진 혹은 영상과 같은 시각 이미지와 사운드가 같이 전개된다. 그리고 작업은 주로 설치나 공연의 형태로 전시된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사람들은 사운드 아트를 간혹 음악과 미술 혹은 공연이 결합된 퓨전 예술로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사운드 아트가 주로 다른 분야의 예술과 어우러져 전시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견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운드 아트를 음악과 다른 장르의 예술을 융합하는 시도로 보는 것은 다소 피상적인 이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운드 아트는 음악과 타 예술을 섞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사운드를 표현하고자 한다. 그런데 사운드 아트가 다른 예술 장르와 융합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운드 자체가 지닌 근본적인 특성에 있다.

이케다 료지, 테스트 패턴, 2022년 전시

가령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사운드 아티스트 중 한 사람인 일본의 이케다 료지(Ikeda Ryoji, 1966-)의 작업은 대부분 영상과 사운드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얼핏 보면 사운드와 영상이 일정한 리듬이나 패턴에 의해서 서로 결합된 것처럼 보인다. 가령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테스트 패턴>(Test Patterns, 2008)은 ‘험 노이즈’(Hum noise, 주파수가 안 맞을 때 라디오에서 나는 잡음과 같은 기계음)와 다양한 굵기를 지닌 흑백의 수평 바코드 무늬가 교차하는 영상이 결합되어 있다. 얼핏 보면 사운드와 영상이 일정한 기준에 의해서 서로 결합된 듯 보인다. 그러나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은 사운드와 영상이 외적인 기준에 의해서 결합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사운드 자체가 영상에서 보이는 패턴과 같은 내재적인 패턴을 지님으로써 이미 우리에게 시각적인 경험을 유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상의 패턴 또한 그 자체가 이미 리듬이라는 청각적인 경험을 촉발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애초에 소리가 시각적 경험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미지가 청각적 경험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더욱 명확한 이해를 위해서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필요가 있다. 라디오 방송국 엔지니어이자 음악가인 피에르 셰페르(Pierre Henri Marie Schaeffer, 1910-1995)는 ‘구체음악’(musique concrète)의 창시자로도 유명하다. 구체음악은 구체적인 소리, 가령 자동차 소리, 비행기 소리, 거리의 소음 등과 같은 일상 세계의 소리를 녹음하여 그것을 적절하게 변형하거나 편집하여 만든 음악이다. 여기서 구체적인 소리는 기존의 악기에서 내는 추상적인 소리에 대립한다. 왜냐하면 악기가 만들어내는 정제된 소리와 달리 일상의 소리가 구체적인 이유는 그것이 구체적인 정황이나 내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바깥의 웅성대는 소리, 자동차가 갑작스럽게 내는 굉음, 엄청난 폭발음과 같은 일상의 구체적인 소리는 그것을 들을 때 항상 시각적인 이미지나 장면을 연상하게 만든다. 누군가 바깥에서 날카로운 비명을 낸다면 무엇인가 끔찍한 일이 일어났음을 연상하고 경계할 것이다. 부엌에서 들리는 경쾌하고 빠른 칼질 소리는 배고픈 우리에게 음식의 기대감을 유발한다.

피에르 셰페르의 대표작 중 하나인 <철도연구>(Étude aux Chemin de Fer, 1948)는 실제로 기차 소리를 녹음하고, 이 소리를 분할 혹은 반복하여 편집한 곡이다. 전통적인 음악이 박자를 기준으로 마디로 나누어지는 반면, 이 곡은 시간이나 소리의 변화 등 전통적인 박자와는 전혀 상관없는 기준으로 나누어지고 편집된다. 심지어는 녹음된 테이프의 길이에 의해서 임의적으로 나누고 붙여진다. 이후 특정한 소리를 샘플링하여 이어 붙이는 작업으로 이루어진 전자음악을 ‘테이프 음악’이라고 부르는 관행이 셰페르에게서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이 곡을 듣는 어느 누구도 단번에 소리를 통해서 기차가 달리는 모습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구체적인 소리는 그 자체가 이미 다른 감각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리는 청각이라는 단일한 감각으로 경험되지 않는다. 신경생리학적으로 기차 소리는 귀를 통해 전해진 다음, 뉴런을 통해 우리의 뇌로 전달된다. 그런데 뉴런들이 임의의 복잡한 회로를 통해서 뇌에 전달될 때, 반드시 뉴런에 있는 다른 감각 정보와 같이 전달된다. 순수한 청각 경험이라든가 순수한 시각 경험은 하나의 추상일 뿐, 현실적으로는 복합적인 감각 경험만 존재할 뿐이다.

앙리 마티스, 붉은 방, 1908

전통적인 음악이 귀로 듣는 단일한 감각에 호소하는 추상적인 음에 집중하였다면, 20세기 이후 많은 음악가들은 그것이 하나의 추상이자 허구라는 사실을 자각하였다. 소리란 그 자체가 청각 현상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러한 자각은 미술에서도 똑같이 발생하였다. 그림은 시각 현상을 넘어선 것이다. 가령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는 동일한 빨간색이라도 1제곱센티미터 크기의 빨간색과 1제곱미터의 빨간색은 관람자에게 완전히 다른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을 인지하였다. 마티스의 엄청나게 큰 빨간색 화면이 관객에게 주는 심리적 압도감은 단순히 시각적인 경험으로 설명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1960년대에 오스트리아 빈 행동주의자들이 캔버스에 표현한 엄청난 크기의 거친 붉은 물감은 피를 연상시킨다. 엄청난 양의 피를 볼 때 느끼는 충격을 단순히 시각적인 경험으로 설명할 수 없다.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는 자신의 그림을 통해서 음악처럼 청각적인 경험을 유발하고자 하였다. 그는 시각적인 요소들, 즉 선과 면 그리고 색 자체가 리듬이나 멜로디와 같은 음악적인 경험을 촉발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20세기 음악이 귀를 넘어서고 있었다면, 회화는 이미 눈을 넘어서고 있었다.

사운드 아트는 바로 20세기 이후의 이러한 예술적 자각에서 탄생하였다. 소리는 단순한 청각 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소리를 다루는 사운드 아트는 단순히 음악의 하위 장르로 간주될 수 없다. 실제로 사운드 아티스트라고 불리는 예술가들의 전공(?)은 다양하다. 작곡가, 회화작가, 조각가, 설치예술가, 디자이너, 공연예술가들의 다양한 이력의 소유자들이 사운드 아티스트를 형성하고 있다. 단순히 이들이 자신의 경계를 넘나드는 융합 실험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운드 자체가 경계를 넘어선 탈경계적인 대상이기 때문이다. 사운드 아트의 탈경계성은 두 개의 이질적인 영역을 외부적으로 융합하거나 그 경계를 해체하려는 시도의 결과물이 아니다. 사운드 아트는 미술은 시각 예술이며 음악은 청각 예술이라는 관념과 이에 기초한 경계 설정 자체가 허구임을 보여준다.

사운드 아트와 기술의 접목, 서사가 아닌 우발적 사건으로서의 소리를 담다

20세기 이후 예술의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인위적인 서사로부터의 탈피일 것이다. 서사로부터의 탈피가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예술은 당연히 문학이다.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인과적인 서사가 아닌 주인공의 우발적인 기억에 의해서 사건이 전개된다. 이 소설을 읽을 때 곤란을 겪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서사에 익숙한 독자들의 습관이다. 또한 카프카의 소설 역시 독자들의 독특한 경험을 유발한다. 카프카의 소설에 서술된 사건들은 그것들을 하나의 통합된 서사로 엮으려는 순간, 논리적으로 불일치하거나 부조리에 빠지고 만다. 얼핏 보면 이러한 소설들이 허구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정반대이다. 사실은 우리에게 익숙한 서사가 인위적인 허구이며, 실상 소설 속의 서사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은 서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각 독립적인 사건으로서 파편적으로 존재할 따름이다.

음악에서도 마찬가지의 현상이 나타난다. 20세기 이후, 멜로디나 화음의 전개와 같은 전통적인 서사를 제거한 음악들이 등장하였다. 전통적인 음악에서 사건은 매 순간의 소리가 아닌 그러한 소리(음)가 모여서 만들어진 멜로디나 화음 같은 통합적인 서사다. 따라서 멜로디나 화음과 같은 서사를 제거한다는 것은 매 순간의 여러 소리가 하나의 독립적인 사건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자연스럽게 음악적 관심을 멜로디나 화음의 거시적인 차원으로부터 한순간의 소리라는 미시적인 차원으로 옮겨놓는다. 가령 피아노로 ‘미’(E) 음을 낼 경우, 거시적인 차원에서는 그 음의 이전과 이후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도’(C) 음이 선행하고 ‘솔’(G) 음이 따라 나온다면, 도미솔이라는 멜로디가 전개된다. 그리고 이는 화음으로서는 ‘C’화음이다. 여기서 ‘미’(E) 음은 멜로디나 화음이라는 서사의 구성요소로서 존재한다.
여기서 멜로디나 화음과 같은 음악적 서사를 제거하면 어떻게 될까? ‘미’라는 하나의 소리는 그저 그 자체가 소리 현상일 뿐이다. 그런데 잘 들어보면 서사구조 때문에 느끼지 못했던 무한한 소리가 이 속에 포함되어 있다. 루마니아 태생의 그리스 음악가 크세나키스(Iannis Xenakis, 1922-2001)는 하나의 음(정확히는 소리)은 무수히 많은 미립자(particles)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였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하나의 소리는 무한히 작은 무수한 소리 알갱이들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소리는 제각기 무수히 많은 알갱이로 이루어진 고유한 소리로서 고유한 사건이다. 실제로 우리는 컴퓨터로 한순간의 소리를 무수히 많은 소리 알갱이(입자, granular)로 분해할 수 있다. 하나의 소리를 무수히 많은 소리로 분해하여 그것을 하나의 곡으로 만든 ‘그래뉼러 음악’(granular music)이 실제로 전자음악의 하위 장르로 존재한다. 매 순간 발생하는 현실의 사건들이 소설의 서사라는 허구에 갇힐 수 없듯이, 음악적 사건으로서의 소리도 미리 정해진 서사로 가둘 수는 없다.

소리의 세계는 무한히 풍부하다. 소리의 풍부함은 청각 현상이라는 단일한 감각에 제한하거나 거대한 서사에 가둘 경우 사라지고 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추상적인 음을 다루는 전통적인 음악이 사라져야 한다거나 제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디지털 악기는 전통적인 악기가 낼 수 있는 추상적인 음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디지털 악기가 지닌 미덕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악기로는 소리 자체가 지닌 풍부함이 제한되기 때문이다. 가령 파열음, 잡음 등 기계적 소음을 활용한 글리치(Glitch) 사운드는 전통적인 악기로서는 표현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기준으로서도 용납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발(Oval)과 같은 사운드 아티스트 그룹은 이러한 글리치 사운드만으로도 완성도 있는 음악을 만들었다. 사운드 아트가 새로운 기술과 연관이 되는 것은 단순히 음악가들의 기술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 아니다. 사운드 아트가 새로운 기술을 끊임없이 수용하는 것은 그것이 전통적인 음악적 관행, 나아가 예술 일반의 관행을 벗어나 소리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 필자 소개

    박영욱 교수는 고려대학교 철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한양대 대학원 작곡과 강사, 홍익대 대학원 미술학과 강사, 연세대 미디어아트 연구소 HK 교수를 거쳤으며, 2010년부터 숙명여대 기초교양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매체, 매체예술, 그리고 철학>(향연출판사), <필로아키텍처-현대건축과 공간, 그리고 철학적 담론>(향연출판사), <데리다&들뢰즈: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에서>(김영사),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바다출판사), <철학으로 현대음악 읽기>(바다출판사) 외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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