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에서는 거주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거주공간이 무너지면서 방은 집의 경계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방의 홍수는 한국 문화의 특색이자 개방된 공간인 광장을 압도하면서, 방은 궁극적으로 소통과 관계의 단절을 촉진시킨다.

예술경영지원센터 문화예술기획경영아카데미에서 주최하는 ‘산책 : 무한상상의 길을 걷다’(이하 ‘산책’)는 문화예술의 테두리 밖으로 눈을 돌려 우리의 상상력에 새로운 자극과 영감을 얻는 기회를 갖고자 기획되었다. 지난 6월부터 ‘과학, 음식, 공간’이라는 주제로 구성된 ‘산책’이 지난 8월 27일 목요일 조성룡 건축가와 함께 ‘공간’에 대한 마지막 산책을 진행하였다.

예술경영지원센터 문화예술기획경영아카데미 <산책 : 무한상상의 길을 걷다>에서 강의중인 건축가 조성룡
조성룡 건축가는 1983년 &lsquo;서울아시아경기대회 선수촌 및 기념공원 국제설계경기&rsquo;에서 1등 당선하면서 건축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7년 서울시 건축상, 1993년과 2003년 한국건축가협회상과 김수근문화상을 수상하였고, 의재미술관, 소마미술관, 한강 선유도공원과 최근의 지앤아트스페이스까지 조성룡 건축가의 공간과 건축에는 한결같이 사람과 자연이 담겨 있다. 현재 그는 조성룡도시건축의 대표이자, 성균관대학교 디자인대학원 건축도시학전공 교수를 맡고 있다.

조성룡 건축가는 건축가와 공연기획자, 이렇게 전혀 다른 분야에서 종사하는 이들이 만나서 잘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할 뿐이라며 서로 소통하며 건축에 대한 가벼운 산책을 제안하면서 몇 가지 키워드 중심으로 문화예술 종사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건축가 자신의 철학이 담겨있는 이야기들을 잔뜩 풀어놓았다. 그날 &lsquo;산책&rsquo;의 몇몇 키워드를 공유해본다.


거주

집은 가족의 연극이 펼쳐지는 공간이며 삶을 위한 무대이다. 가족구성원은 연극속의 등장인물이 되고 집은 사람이 태어나고 성장하며 살아가다 죽는 서사드라마가 펼쳐지는 장이다. 가족이 살아가고 사랑하고 갈등하며 보호받는 장소인 집에 이러한 낭만적인 의미가 들어갈 때 우리는 집을 일컬어 &lsquo;가정home';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는 공간형식은 ';가옥house';가 된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거주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서 하루 종일을 밖에서 보내고 밤늦게 집에 들어가 겨우 잠만 자는 장소인 집. &lsquo;방&rsquo;이라는 구별된 공간을 통해 가족 간에도 사생활을 지키고 서로 얼굴을 보며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는 오늘날의 집이라는 공간이 사람이 보호받고 안정을 취하는 장소로서 위험과 안전의 경계에 위치했던 집이라는 예전의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조성룡 건축가는 현대 거주의 개념을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도그빌>(Dogville)에서 묘사된 집의 형태에 비유한다. 영화에서 집은 단지 무대 위의 선으로 구역이 나눠져 있을 뿐이다. 하얀 테두리와 &lsquo;○○의 집(○○&rsquo;s house)라고만 표시되어 구분되어진 집을 예로 들며 우리의 집의 개념도 그 정도로 도식화되어 다를 바 없다고 한다. 오히려 영화 속의 집처럼 &lsquo;~의 집&rsquo;조차도 되지 못하고 &lsquo;몇 동 몇 호&rsquo;라고 숫자로 불리는 한국의 집은 그 처지가 더 처량하다.

영화 <도그빌>에서 묘사된 집



방의 도시

거주공간이 무너지면서 방은 집의 경계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노래방, PC방, 비디오방, 찜질방. 그 역할에 따라 다양하게 존재하는 한국의 방들, 그리고 다른 세계와 만나고(internet), 걸어 다니며 이용하는(mobile) 최신식 방까지 한국의 도시는 방들로 넘쳐난다. 이러한 방의 홍수는 한국 문화의 특색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문제는 내부와 외부의 단절, 내부 공간의 구성을 목적으로 하는 방이 도시에 넘실대면서 대두되는 광장의 부재이다. 소통이 가능한 개방된 공간인 광장을 압도할 정도로 막강한 힘을 지닌 방은 궁극적으로 소통과 관계의 단절을 촉진시켰다. (&lsquo;방의 도시(City of Bang)&rsquo;는 한국의 방(BANG)들에 대한 건축가 정기용의 전시 타이틀이다.)


풍경 끌어들이기

21세기는 다양한 인류학적 가치들이 회복되는 시기이다. 그리고 그 가치는 일상 속에서 맺는 관계를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공간의 경계의 와해로 인한 소통과 관계의 단절을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조성룡 건축가는 그 답을 풍경을 끌어들이는 것으로 제시한다. 그렇다면 풍경은 무엇인가. 집 앞뒤에 산이 있고 강이 흐른다면 그것은 거기 그 공간에 있는 자연이다. 이 자연을 보고 내가 좋다 싫다 감정을 섞을 때, 자연과 내가 관계를 맺을 때, 자연은 풍경이 된다. 그리고 건축에서 주변 자연과 나의 관계를 매개해주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 창문이다. 창문을 통하여 우리는 주변의 경치(환경)을 우리 안에, 그리고 집 안으로 끌어들인다. 이렇게 안에서 밖의 풍경을 끌어들여 관계 맺는 것을 &lsquo;차경(借景)&rsquo;이라고 한다.

소마미술관 내부, 의재미술관 내부



도시와 기억, 길은 도로가 아니다

도시는 자연적인 현상이 아닌 역사적인 조건과 상황의 산물이다. 조선 초기 한양을 도읍지로 정했을 때 태조는 정권의 정통성을 기리기 위하여 초기 중국에서 도시를 건설하는데 이용하는 방식으로 한양을 건설한다. 시대에 따라, 정치적&middot;사회적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형되고 발전하는 도시는 그러나 그 재편성이 서서히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은 변화에 무감각하게 순응한다. 아무것도 없던 거리에 건물이 들어서고 있던 건축물이 사라지고 다시 생겨도 사람들은 그저 &lsquo;언제 여기에 이런 게 있었지?&rsquo; 하고 잠깐 고개를 갸우뚱 하고는 이미 관심을 잃는다. 그러나 도시가 모습을 바꿔가는 것은 변형이고 변화이지 어제까지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 뚝딱 하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도시는 변화와 발전의 기억, 사람들의 생활의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이다.

길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여기서 길은 도로가 아니다. 길은 사람이 다니는 통로이며 도로는 자동차가 다니는 통로이다. 사람이 다니는 길은 삶의 흔적과 자취가 배어 있는 역사이다, 예부터 길은 물이 있는 주변에 물의 흐름에 따라 조성되어 왔다. 그리고 흘러가는 물처럼 길은 이어져가며 도시와 같이 기억을 쌓아간다.

예술경영지원센터 문화예술기획경영아카데미 <산책 : 무한상상의 길을 걷다> 현장



매체로서의 건축

빅토르 위고는 &lsquo;이것이 저것을 죽이리라&rsquo;라고 하였다. 여기서 &lsquo;이것&rsquo;은 문자로 쓰인 책이며 &lsquo;저것&rsquo;은 돌로 된 책, 즉 건축이다. 문자를 통한 인쇄매체를 시작으로 오늘날 더욱 발달된 매체들로 우리는 완전한 소통이 가능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인터넷, 휴대전화 등 어디든지 파고드는 매체는 예전의 경계(낮/밤, 내/외, 공/사 등)는 사라지거나 붕괴된다. 경계를 붕괴시키는 매체들이 다문화적 양상과 혼재되어 건축 역시 하나의 매체로 존재하게 되면서 그 역할과 목적이 달라진다. 영화 <터미널>에서 입국불가 판정을 받은 빅터(톰 행크스 분)는 공항터미널에서 &lsquo;거주&rsquo;하게 된다. 공항은 이동의 공간이며 사람들이 스쳐가는 장소이다. 그러나 빅터에게 공항은 그가 먹고 자고 씻는 거주의 장소가 된다. 이것은 더 이상 영화에서나 가능할 법한 이야기가 아니다. 온갖 쇼핑이 가능하고 식당, 호텔, 찜질방, 병원, 아울렛, 인터넷까지 이용이 가능한 우리나라의 공항이 배경이었다면 빅터는 좀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변계훈

필자소개
변계훈은 대학에서 영상학 전공, 공연예술협동과정을 마치고 현재 예술경영지원센터 지원컨설팅팀에서 문화예술분야 일자리 지원교육과 문화예술 기획경영 아카데미의 기획&middot;운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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