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청인사들의 면면이나 전체 프로그램, 공연의 경향 등을 볼 때 그루지아 쇼케이스는 구체적인 공연의 거래보다는 그루지아 연극을 소개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쇼케이스 초청인사들은 축제나 극장의 프로그램 디렉터가 주를 이루었지만 저널리스트, 비평가의 비중도 적지 않았다. 또 쇼케이스의 주요 프로그램이 매일 7~8개의 전막공연으로 진행되었던 점에서도 그러하다.

지난 10월 9일부터 12일까지 트빌리시국제연극제 일환으로 그루지아 쇼케이스가 개최되었다. 트빌리시국제연극제는 올해 처음 시작된 연극제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네크로슈스, 필립 장띠 등의 공연과 함께 사다리움직임연구소의 <보이첵>과 남정호&크누아안무그룹의 <빨래>가 공연되기도 했다.

서쪽으로는 흑해에 닿아있고 러시아, 터키,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젠과 접해 있는 그루지아는 우리에게 낯선 나라이다. 우리에게 만이 아니라 쇼케이스에서 만난 각국의 공연예술 관계자들에게도 그루지아, 그루지아 연극이 낯익은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러시아의 영향 하에 있었던 데다가 동구와 달리 지리적으로 유럽과 거리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있었던 러시아와의 분쟁에서 볼 수 있듯이 현재는 친서방 성향을 보이고 있지만 러시아의 영향은 여전하다. 예를 들면 지금은 서유럽 연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연극학교에서도 서유럽 연극사를 가르치고 있는데, 연극사 교과서의 저자는 러시아 학자라고 한다. 극장에서 만난 사람들 대부분은 (짧은 일정에 그루지아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들이 전부인데) 러시아어에 훨씬 익숙하게 했다.

하지만 트빌리시국제연극제나 그루지아 쇼케이스의 분위기를 볼 때 서방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것이 쉽게 눈에 띤다. 트빌리시국제연극제는 규모가 큰 연극제는 아니지만 프로그램의 구성에서 서유럽을 중심으로 한 국제공연예술계의 주요 작가 주요 작품을 소개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트빌리시국제연극제는 문화부의 전격적인 지원으로 만들어진 행사라고 한다. 쇼케이스 중에는 김윤철 국제평론가협회 회장 등 주요인사와 문화부 장관의 면담이 진행되기도 했다. 정책적으로 공연예술 국제교류에 큰 관심을 쏟고 있는 것이다.

국립연극학교, 리버티극장



아직은 낯선 그루지아 연극

쇼케이스는 오전 9시부터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빽빽한 일정이었지만 프로그램은 매우 단순하게 짜여 있었다. 오전 9시부터 한 시간 가량 쇼케이스 참가자들의 숙소인 쉐라톤 메데치의 홀에서는 쇼케이스 공연작품들에 대한 부스 전시가 열렸다. 아침 식사 장소 바로 옆이다 보니 동선이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작은 홀에 간단한 차가 준비되어 아담하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그루지아 연극들은 모두 극장에서 제작되기 때문에 쇼케이스 부스들도 단체가 아닌 극장이 참여한다. 각 부스에서는 쇼케이스에서 공연되는 작품들 외에도 각 극장의 주요 레퍼토리와 극장에 대한 정보를 함께 전시하고 있었다.

첫날 부스 전시의 활기에 비하면 이후에는 부스 전시장이 한산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부스가 많았던 것도 아니고, 부스 전시에서 매일 새롭게 업데이트되는 프로그램이 없었던 것. 그날 공연되는 작품이나 전 날 공연 작품에 대한 집중 조명 같은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쇼케이스에 참여한 해외 인사들에게 그루지아 연극은 낯익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 만큼 개별 작품에 대한 정보만이 아니라 그루지아 연극계에 대한 정보에 목말라했는데 부스 전시와 공연 관람 이외에는 별도의 프로그램이나 자료가 제공되지 않았다. 또 공연스케줄은 매우 빡빡했던 반면 축제 관계자들을 제외하고 공연 전후 작가 연출가들과의 짧은 인사 외에는 그루지아 연극계 인사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도 아쉬웠다.

초청인사들의 면면이나 전체 프로그램, 공연의 경향 등을 볼 때 제1회 그루지아 쇼케이스는 구체적인 공연의 거래보다는 그루지아 연극을 소개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있어 아쉬움은 컸다. 쇼케이스 초청인사들은 축제나 극장의 프로그램 디렉터가 주를 이루었지만 저널리스트들도 자주 눈에 띠었다. 트빌리시국제연극제 프로그램으로 비평프로그램을 배치하고 국제평론가협회의 주요 인사들을 초청했다. 또 쇼케이스의 주요 프로그램이 매일 7~8개의 전막공연으로 진행되었던 점에서도 그러하다. 이번 쇼케이스에서는 총 29편의 작품이 공연되었다. 물론 자국 작가들의 작품보다는 셰익스피어, 괴테, 체호프, 막스 프리쉬 등 서구 고전이 주를 이루고 있다거나, 그림자극 팬터마임 인형극 등이 공연 프로그램의 적지 않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국제교류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확고한 연극의 위상 그리고 거장 스트루아

러시아의 오랜 영향은 극장과 연극의 사회적 위상에서 금방 확인된다. 러시아를 비롯해 옛 공산권 국가들을 방문하면 모두 놀라는 것이 연극의 사회적 위상이다. 그루지아 역시 변화의 와중에 있다고 하지만 그러한 저변은 여전히 확고해 보였다. 그루지아의 수도인 트빌리시에만 20여 개에 이르는 극장들이 있다. 규모는 모두 다르지만 대학로 소극장들처럼 상업건물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공공극장만이 아니라 소규모 민간극장들도 단독건물들이다.

트빌리시국제연극제의 주요 공연장인 루스타빌리(Rustaveli) 국립극장은 시내 명품점들이 즐비한 가장 번화한 거리에 위치해 있다. 극장의 규모도 상당해서, 천석 규모의 대극장과 4백석 정도의 소극장 그리고 비슷한 규모의 실험극장이 있고 이외에도 무대제작소에서부터 의상과 가발 신발을 만드는 제작실까지 모두 갖추고 있었다. 루스타빌리 국립극장 건물 바로 옆에 국립연극학교가 있다. 가장 번화한 거리 한 가운데에 극장과 연극학교가 있다는 것은 우리 공연계를 생각하면 인상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비단 건물에서만이 아니라 오전 11시건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건 쇼케이스 공연이 벌어지는 공연장 어디에나 관객들이 성황을 이루고 매 공연 기립박수가 터져 나오는 장면 역시 이 사회에서 연극의 위상을 느끼게 한다.

루스타빌리 국립극장 무대제작실, 의상제작실, 작화실(왼쪽부터)

쇼케이스를 통해 접한 그루지아 연극은 매우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형적인 19세기 스타일의 부르주아 희극 공연에서부터 텍스트에 내재된 시청각적 이미지를 극대화하는 최근의 공연예술 경향까지를 망라하고 있었다. 하지만 객석의 반응은 멜로드라마적 라인을 중심으로 한 드라마 중심의 작품들에 더 뜨거웠다. (생각해보면 한국연극 역시 마찬가지이다.) 무리를 감수하고 비교하자면 여주인공의 불행한 삶을 중심으로 한 시골마을에서 벌어지는 무지와 편견의 폭력을 그린 <도스토예프스키.루>가 강력한 멜로드라마적 라인을 보여주지만 공간의 구성 등 연출 컨셉이 혼란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열띤 반응을 보였던 반면 그루지아 연극의 대부라 할 스트루아의 <햄릿>은 매우 분명한 해석과 그것을 무대화하는 정돈된 연출 컨셉을 보여줌에도 관객 반응의 열도는 다소 떨어졌다.

그루지아 연극에서 스트루아는 독보적인 연출가인데, 이미 80년대부터 그는 서방에도 널리 알려질 만큼 독특한 미학을 보여주었다. 그루지아 내에서도 그의 영향력은 상당해서, 쇼케이스의 주요 작품의 연출자들은 거의 모두 스트루아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한 영향은 공연에서도 확인된다. 이번 쇼케이스에서 스트루아는 <비더만과 화이어 라이저>(Bidermann and Fire Raisers, 막스 프리쉬)와 <햄릿> 두 편을 공연했다. <햄릿>에서 스트루아는 셰익스피어, 엘리자베스 여왕 등 셰익스피어 시대와 그 시대의 연극을 떠올리는 이미지들을 그린 큰 판넬을 무대 후면에 배치하고 철제 사다리 거대한 인형 등을 무대 중간중간 그리고 허공에 배치했다. 사건의 장소를 지시하는 것도 그렇다고 움직임을 위한 기능성을 갖는 것도 아닌 이러한 무대의 구성은, 마치 샤갈의 몽환적 그림을 보는 듯한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한편 흥미로운 것은 잘 생긴 유약한 왕자님이라기보다는 무기력한 중년처럼 코끝에 안경을 걸치고 있는 햄릿은 스트루아 자신의 분신으로 다가왔다. 무대 후면의 판넬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막강한 고전의 위력에 짓눌려 있으면서도 그것을 뚫고 세상과 대면하려는 안간힘이 느껴진다.

스트루아<햄릿>



트빌리시국제연극제의 가능성

텍스트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텍스트의 다양한 층위의 균열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그것을 시청각적 이미지로 무대화하는 스트루아의 해석적 연출의 막강한 전통은 젊은 연출가들이 최근의 국제적 공연예술의 경향과 접속하는 매우 유효한 자양분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쇼케이스에서 주목받았던 <코카서스의 백묵원>(아브토 바르시마쉬빌리 Avto Varsimashvili 연출)이나 <맥베스>(데이비드 도이아쉬빌리 David Doiashvili 연출) 등은 스트루아의 접근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적극적인 무대 기술의 활용을 바탕으로 더욱 강렬한 이미지를 구축하면서 인상적인 무대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과도한 이미지의 집착과 통일적인 연출 컨셉의 부재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도 있었다. 이러한 엇갈리는 반응은 몇몇 주목되는 작품에서 공통된 것이었다.
어쨌든 지금 그루지아의 젊은 연극들이 자국의 연극전통을 뛰어넘어 국제적 경향성을 흠뻑 빨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모두 동의하는 바였다. 절제된 움직임과 통일성 있는 컨셉으로 강렬한 이미지를 구축하는 <보이첵>에 대한 뜨거운 반응이나 이번 연극제에서 유일한 현대무용 공연이었던 <빨래>에 대한 호기심 등도 새로운 경향에 대한 높은 관심의 반영일 것이다. 탄탄한 연극전통과 여전히 막강한 연극의 사회적 위상을 생각할 때 그루지아 연극의 변화는 매우 빠르게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역시 탄탄한 연극전통에서 비롯되는 배우들의 연기 역시 그루지아 연극의 미래를 긍정하게 하는 자양분이 아닐 수 없다.

의욕적으로 추진된 트빌리시국제연극제와 쇼케이스는 다양한 권역의 공연예술관계자들을 초청했지만 아무래도 지리적 위치 등으로 유럽권역의 공연예술관계자들이 많이 참석했다. 폴란드, 헝가리, 크로아티아, 리투아니아 등 아직은 우리와 교류가 활발하지 않은 동구권역 등의 공연예술관계자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비록 이제 막 시작된 연극제와 쇼케이스이지만 그루지아 정부나 축제 관계자들의 의욕에 비추어, 그리고 국제공연예술계에 접속하려는 그루지아 연극계의 내적 동기가 맞물려 앞으로의 변화에 관심을 갖게 한다.





김소연

필자소개
김소연 편집장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다원예술소위 위원, [컬처뉴스] 편집장을 지냈다. 무대가 어떻게 세상과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으로 연극평론을 쓰고 있다. &lsquo;상업지구 대학로를 다시 생각하다&rsquo;&lsquo;이 철없는 아비를 어찌할까&rsquo; 등의 비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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