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 최초의 아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이었던 쌈지스페이스가 문을 닫았다. 비록 쌈지는 이제 없지만, 창동/고양스튜디오, 난지스튜디오, 금천예술공장 등 레지던시 개관이 이어지더니 그 정점에서 경기창작센터가 문을 열었다.

쌈지스페이스를 성공적으로 운영해왔던 김홍희 경기도미술관 관장의 내공에 대한 기대가 아니더라도, 경기창작센터의 개관은 여러 면에서 주목받았다. 우선 경기도립직업전문학교를 리모델링한 경기창작센터는 규모면에서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뿐만 아니라, 창작공간 제공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작가와 큐레이터, 미술이론가들을 초청하는 멘토링 프로그램은 물론 다양한 국제교류 프로그램까지 준비되어 있다고 하니 무척 기대된다.

다만 서울에서 차로 무려 2시간 넘게 걸리는 오지(?)에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약점이긴 하다. 하지만, 일단 도착하기만 하면 탁 트인 자연경관과 훌륭한 시설, 최고의 프로그램이 기다리고 있다면야 그깟 2시간이야 감수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훌륭한 계획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뒤통수에서는 작가들의 볼멘소리가 윙윙거리는 것은 무엇일까. 과연 경기창작센터는 새로운 아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의 지평을 열어줄 수 있을까.

경기창작센터의 개관식이 있던 즈음, 최근 창작센터의 성공적인 사례로 자주 거론되는 바르셀로나의 앙가(Hangar)를 찾았다. 앙가는 바르셀로나 중심에서 꽤 떨어진 시 외곽 재개발지역에 있다. 안내 표지판은커녕 들어가는 입구에도 그럴듯한 간판이나 가로등조차 없었다. 허름한 공장 건물을 그대로 두고, 내부만 적당히, 그러나 실용적으로, 고쳐 사용하고 있는 듯 했다. 건물의 2층은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활용하고 있었고, 1층에는 사무실과 공동 작업실, 그리고 미디어랩이 포함된 다목적 공간이 있었다. 각각의 공간은 프로그램에 따라 다양하게 운영되는 듯 했다.

바르셀로나의 앙가 Hangar 내부 모습

마침 앙가를 찾았을 때, 다목적 공간에서는 오픈 소스와 P2P등에 관한 이슈로 워크숍이 진행 중이었다. 정치, 경제, 저작권 등에 관한 소주제로 팀을 짜서 토론하고 있었는데, 워크숍 자체가 개방되어 있었기 때문에 방문객들도 편하게 워크숍의 진행과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 외부에 보여주기 위한 행사가 아닌,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행사답게 늦은 저녁시간임에도 불구하고, 60여 명 되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자유롭게 토론하는 모습은 앙가의 건물 외관보다 훨씬 강렬하고도 깊게 인상에 남았다.

사실 앙가는 다른 여느 레지던시 프로그램들 달리 작가들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시작되었다. 우리로 치자면 미술인협회정도 되는 ';예술인협회'; 소속 작가들이 도시 외곽 버려진 공장건물을 점거하여 스튜디오로 사용하였고, 그 과정에서 실질적으로 작가들에게 필요한 프로그램들을 개발하였다. 말 그대로 작가들이 직접 작가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어간 것이다. 그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프로덕션 지원인데, 프리 소프트웨어, 비디오 편집 등 작가들에게 필요한 다양한 기술들을 작가들에게 재교육하기도 하고, 작가들을 위해서 직접적인 제작 지원을 한다. 이러한 서비스들은 앙가의 운영을 위해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작가들에게 제공된다. 또한 앙가의 서비스는 배타적이지 않아서, 레지던시 작가가 아니더라도, 협회 소속 작가가 아니어도 앙가에서 장비를 임대하거나 빌려 사용할 수 있다.

최근 정부의 지원이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자립적 운영 기반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로 바삐 움직일 뿐 아니라, 최근에는 앙가를 브랜드화 하여 해외에 수출할 계획까지 가지고 있다. 이 모든 일들은 누군가에게 성과를 보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움직이는 조직이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비록 외관은 허름하지만, 의욕적이고 내실 있게 운영되고 있는 앙가의 모습은 전문가도 없이 그저 건물만 번드르하게 지어놓고 유행처럼 레지던시를 만들어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것이었다.

바르셀로나의 앙가 Hangar 내부 모습

물론 창작센터와 레지던시 공간이 부쩍 늘어간다는 것은 그나마 작가들에게 다행인 일이다. 하지만 차별화된 프로그램이나 목적의식이 분명하지 않은 채 그저 전시행정의 일환으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레지던시는 작가들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 뜨내기 철새처럼 한 레지던시에서 다른 레지던시로 3개월, 6개월마다 짐을 싸서 옮겨 다니다가 정작 작업은 제대로 못하는 작가들도 보아왔다. 개인 작업실에만 있으면 큐레이터나 미술평론가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다며, 버젓한 작업실을 가지고도 레지던시의 문을 두드리기도 한다. 새로운 창작센터가 생기면 인지도를 얻기 위해 어느 정도 알려진 작가들을 뽑아 홍보에 도움을 받는 경우도 있다. 기껏해야 1년, 작가도 기관도 무엇인가 해보기 위해 충분한 시간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이유는 분명하다. 보다 많은 작가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하여!

하지만, 그저 작업실 하나 주는 것으로, 큐레이터 한 명 소개하는 것으로 너무 생색내기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작가들을 지원하고 싶다는 마음보다 밖으로 뭔가 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닌지, 작가들은 너무 의존적이 되는 것은 아닌지 가끔 궁금해진다.

작가에게서 전화가 왔다. “OO 스튜디오 돼서, 오늘 이사했어요. 나중에 한번 오세요.” 그곳은 유독 스튜디오가 좁은데, 그 좁아터진 방구석에서 어떤 작업을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나마 작업실을 구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머지않아 다시 짐을 싸고 있을 그의 모습이 보이기에, 진심어린 축하의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신보슬

필자소개
신보슬은 이화여자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미학을 전공했다. 아트센터 나비 큐레이터, 서울국제미디어아트 비엔날레 전시팀장을 거쳐 현재 토탈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활동 중이다. 미디어아트 전시인《Digital Playground》를 비롯한 다양한 미디어아트 전시 및 워크숍을 기획했으며, 최근 독일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과의 교류전을 기획 중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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