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극장에서 예술가와 관객의 자리는 무대와 객석으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극장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 사람들이 좀 더 친근하게 극장을 드나들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고안하거나 양질의 콘텐츠를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예술가, 새로운 작업을 발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극장은 공연예술 생태계의 거점이자 사회적 소통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weekly@예술경영]은 공연예술 생태계의 거점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가는 극장의 운영사례를 싣는다.
콜롬비아에는 기업이 출원한 '비영리 복지후생 기금을 운영하는 조직'(Caja Compensacion Familiar)이 50여 개에 이른다. 이들은 '빈부차는 생계지원만으로 극복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저소득측에 대한 주택 문제와 생계지원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 참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콜숩시디오 극장의 모기업인 골숩시디오사도 비영리 복지후생 기금 운용 회사이다.

콜숩시디오 극장(Teatro Colsubsidio Roberto Arias Pérez)은 보고타 시가 직접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호르헤 가이탄 극장(Teatro Jorge Eliécer Gaitán), 1892년 개장 이래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꼴론 극장(el Teatro Colón)과 함께 콜롬비아를 대표하는 3대 극장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콜숩시디오에 대한 특별한 기억

콜숩시디오 극장 외관
필자와 콜숩시디오 극장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지난 2002년 아시아-이베로문화재단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국립극장의 <우루왕>(김명곤 연출)을 이베로아메리카 국제 연극제에 초청하는 작업을 맡았는데, <우루왕>이 바로 이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당시 연극제에서는 피터 브룩이 연출을 맡은 프랑스의 테아트르 데 부프 뒤 노르(Th&eacute;&acirc;tre des Bouffes du Nord)와 에이문타스 네크로슈스(Eimuntas Nekrosius)가 이끄는 리투아니아의 극단 메노포르타스(Meno Fortas) 등 세계적인 공연 단체들이 참여하고 있어 더욱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느라 밤늦게까지 극장에 남아 극장의 인프라와 음향시설을 익히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어느 이른 새벽, 미처 불이 켜지지 않은 극장 안에 들어서던 순간 받았던 느낌은 아직까지 잊을 수가 없다. 최소한의 소음도 차단된, 그리고 필자의 조그마한 움직임에서 비롯된 잔향에도 반응하는 듯한 콜숩시디오 극장의 완벽한 음향 조건을 몸소 체험할 수 있었던 귀한 시간이었다. 콜숩시디오 극장은 다양한 공연의 요구에 따라 잔향을 조절할 수 있는 음향시설을 갖춘 중남미의 최고의 극장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국립극장의 <우루왕>은 라틴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한국적 예술 양식으로 무대에 올려 콜롬비아 관객은 물론 언론의 뜨거운 호평을 받았다. 김명곤 연출의 <우루왕>은 아시아의 대규모 종합공연예술을 처음 접한 콜롬비아인들에게 센세이션 그 자체였던 것이다. 모니카 토로(M&oacute;nica Toro) 극장장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인터뷰를 하러 가는 도중 필자는 2002년 <우루왕> 공연의 전회 매진 소식에 극장도 페스티벌도 함께 기뻐하던 기억이 떠올라 보고타의 맑은 날씨만큼이나 상쾌한 기분으로 교통체증마저 잊고 있었다.

모니카 토로 신임 극장장은 극장의 모기업에서 오랫동안 문화 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중, 금년 1월 극장경영을 맡게 되었다. 필자는 지난 10월 19일 콜숩시디오 극장장실에서 그녀를 만나 보았다.


극장의 모기업, 노동자 복지후생기금 운영회사 콜숩시디오

모니카 토로 극장장
콜숩시디오 극장과 모기업과의 관계가 한국에서는 매우 생소한 개념일 것으로 생각되어, 인터뷰의 첫 질문으로 &lsquo;콜숩시디오 기업&rsquo;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부탁하였다. 모니카 토로 극장장은 이미 준비해 두었던 자료를 제시하면서 구체적인 설명을 시작해 나갔다.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콜롬비아에는 콜숩시디오를 비롯한 비영리 기업의 복지후생 기금을 운영하는 회사가 50여 개나 된다. 1954년 콜롬비아의 주요 생산기지인 안티오키아(Antioquia)주 출신의 기업인들은 당시 지속되던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실질 임금 하락과 사회적 불안으로 인한 노동자들의 사기 문제 및 이들의 복지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기업인들은 솔선수범하여 자신이 경영하는 회사의 전 종업원 월급의 4%에 해당하는 금액을 출자하여 종업원들의 복지후생 사업을 위한 기금을 조성하는 데에 뜻을 모았다. 그리고 이들 기업에 의해 출원된 &lsquo;비영리 복지후생 기금 운용 회사&rsquo;(Caja Compensaci&oacute;n Familiar, 직역하면 가족을 보장해주는 금고-편집자주)라는 새로운 개념의 회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기업인들은 이 회사에 자금을 출원한 기업과 무관한 전문 경영인이 독립적인 경영권을 행사할 수 있는 법률적인 제도장치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환경에서 콜숩시디오가 1981년 탄생하였다.

&lsquo;빈부차는 생계지원만으로 극복될 수 없다&rsquo;는 신념을 가진 콜롬비아의 양심적 기업인들은 진정한 양극화 극복을 위해서는 저소득층의 문화적 소양 기반이 뒤따라야 한다는 주장을 실천에 옮겼다. 콜롬비아는 저소득층에 대한 주택문제와 생계지원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 참여 프로그램이 잘 운영되고 있는 나라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콜롬비아에 와서 공연을 하는 외국의 유명 단체들은 영미 기준에 비해 부족한 사회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수준 높은 일반관객들의 반응에 놀라곤 한다. 이는 어릴 때부터 다양한 문화예술을 접할 수 있는 독특한 환경을 가진 콜롬비아만의 저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콜숩시디오와 같은 50여개의 비영리 복지후생 기금 운용 회사는 콜롬비아 시민들의 문화적 소양 및 삶의 질을 향상시킨다는 설립 이념 아래 문화 예술 갤러리, 도서관 네트워크, 공연장 등을 운영하고 하고 있다. 이뿐 아니라, 회원 기업의 종업원들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줄 수 있는 대형할인매장 운영과 국민주택사업, 휴가를 위한 콘도 사업 등이 전문 경영인들에 의해 탄탄하게 운영되고 있다. 예를 들어, 콜숩시디오에는 2만 3천여 기업의 50여 만 종사자가 가입되어 있다. 콜숩시디오는 극장 외에도 3개의 초&middot;중&middot;고등학교와 15개 도서관, 하루에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3개의 호텔과 콘도, 그리고 14개의 진료시설, 20개의 대형할인매장, 53개의 약국 체인을 운영하고 있고 또 회원들에게 장기 저리 주택 제공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음악 전문 공연장으로 개관

콜숩시디오 극장 내부

콜숩시디오 극장은 모기업으로부터 연간 한화 10억 원의 예산을 지원받고 있다. 극장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극장장은 18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는 행정부서, 기술/물류 부서, 프로그래밍 부서, 티켓 관리 부서를 직권 총괄하고 있다.

콜숩시디오 극장이 개관한 1981년 당시, 콜롬비아에는 음악 공연을 위한 전문적 공연장이 없었다. 클래식 오케스트라 공연을 위해서는 종합운동장의 홀을 사용하는 정도였다. 그러한 당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여 콜숩시디오 극장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극장은 파리와 이태리, 그리고 미국의 주요 공연장 조사를 바탕으로 설계되어 최고의 음향 시설과 현대적 설비를 갖추었다. 당연히 콜숩시디오 극장의 개관으로 말미암아 콜롬비아의 공연예술 수준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다. 개관 당시만 해도 콜숩시디오 극장은 특별히 클래식 공연과 심포니 콘서트를 위하여 설계된 음악 공연장이었다. 섬유 유리와 목재 층을 활용한 극장 내부는 외부의 소리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다양한 악기의 작은 소리까지도 민감하게 잡아내는 음향 시설을 자랑한다. 이후 극장은 지속적인 보수 공사를 통해 대형무대공연을 위한 종합예술공연장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콜숩시디오 극장은 총 944석으로 지층, 1층, 2층 발코니로 구성되어 있다.


다양한 장르의 축제들 그리고 관객 대화 프로그램 콘베르사토리오

콜숩시디오 극장의 연간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크게 다음과 같은 특징이 두드러진다.

'페스티벌 신포니코' 포스터첫째, 콜숩시디오 극장은 단순 대관 사업에 그치지 않고 페스티벌이나 시즌 프로그램의 제작 및 후원에 적극 참여한다. 동 극장에서는 모든 장르의 예술 작품이 상연되고 있지만 특별히 음악 장르의 공연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제작 사업 중 주목할 만한 프로그램에는 콜롬비아 내셔널 심포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개최하는 국제 음악 행사, &lsquo;템포라다 신포니카(temporada sinf&oacute;nica, 교향악 시즌)&rsquo;와 &lsquo;페스티벌 신포니코(festival sinf&oacute;nico, 교향악 페스티벌)&rsquo;이 있다. 매년 2월 열리는 &lsquo;템포라다 신포니카&rsquo;는 음악 전문가들과 클래식 마니아층을 대상으로 한 아카데믹한 프로그램 구성으로 콜롬비아 클래식 음악의 발전에 긍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한편 매년 6월에 열리는 &lsquo;페스티벌 신포니코&rsquo;는 이와 달리, 일반 시민들이 클래식 음악을 친숙하게 접할 수 있도록 보다 대중적인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밖에도 라틴아메리카의 민속 오페라를 선보이는 사르수엘라(zarzuela) 시즌, 칼리국제발레축제와 함께 여는 발레 축제, 콜롬비아의 민속 예술을 장려하는 포크로릭(folclor) 시즌 등 연중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다양한 계층의 관객으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페스티벌 신포니코' 공연
둘째, 콜롬비아의 예술가를 발굴하는 사업이 눈에 띈다. 극장은 콜롬비아의 새로운 음악 장르의 발전과 신진 뮤지션을 발굴하는 행사에 주력하고 있다. 콜롬비아 문화부와 공동으로 개최하는 &lsquo;신경향 페스티벌&lsquo;(festival nuevas tendencies)은 라틴 아메리카 주요 극장의 벤치마킹 모델이 되고 있다. 이 페스티벌에는 콜롬비아를 끼고 있는 대서양과 태평양 문화권의 전통 음악은 물론 대중음악과 같은 지역적 특성을 잘 나타낼 수 있는 장르의 음악이 소개된다. 콜롬비아의 젊은 뮤지션들은 이와 같은 뮤직 페스티벌을 통해 기존의 장르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는 기회를 갖게 된다. 금년의 경우, 18개 팀을 선발하여 페스티벌에 선보일 예정이다. 그런데 행사 날짜가 공고되기도 전에 이미 무려 350여 개의 단체가 참가를 신청하여 현재 90개 팀이 예선을 통과한 상태라고 한다. 샤키라를 비롯한 수많은 콜롬비아 출신 팝 뮤지션들이 라틴권은 물론 미주, 유럽권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배경에는 콜숩시디오 극장이 자리 잡고 있다.

셋째, 콜숩시디오 극장은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을 통해 콜롬비아 시민들의 예술 교육 사업에 기여하고 있다. 극장이 단순히 공연을 선보이는 장소라는 기존 개념에서 탈피하여 공연과 함께 시민들에게 수준 높은 예술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공연예술 교육을 통하여 관객들이 다양한 예술 장르에 관심을 갖도록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결국은 그들이 극장의 주 관객이 된다는 윈윈 마케팅 전략으로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예술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극장에서는 공연 전 약 한 시간 가량을 관객과의 대화 시간인 콘베르사토리오(conversatorio) 프로그램에 할애하고 있다. 굳이 공연 입장권을 사지 않았더라도 공연예술에 관심이 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해당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관객들은 극장 프로그램에 초청된 국제적 명성의 피아니스트가 쉽게 풀어나가는 악기에 대한 설명을 듣고 클래식 음악 및 악기와 친근해 질 수 있다. 그리고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가스펠 가수와 같은 특별 장르의 예술인들을 초청하여 해당 분야 예술에 대한 친근감을 갖게 하는 시간을 마련하고 있다. 콜숩시디오 극장의 프로그램을 통해 시민들은 다양한 예술 분야에 대한 소양을 갖게 되고 엘리트의 전유물이라고 여겼던 예술 공연에 재미를 붙여 나갈 수가 있다.

장시간 계속 설명을 해 나가던 모니카 토로 극장장은 이런 행사를 통해 콜숩시디오 극장과 기업 브랜드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도가 높아지고 있으며, 극장 측이 꼭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티켓 판매율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며 웃음을 짓는다.


이베로아메리카노 국제연극제와의 협력

콜롬비아 극단의 <사르수엘라>, 일본 시즈오카 예술극장의 <메데아> 콜숩시디오 극장 초청공연 작품

또한 이런 맥락에서 콜숩시디오 극장은 라틴아메리카 최대 공연예술축제인 이베로아메리카노 국제연극제에 상업성을 떠나서 전략적 동반 관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고 한다. 극장 측은 축제에 무대를 제공함으로써 보고타 시민들이 최고 수준의 공연을 저렴한 가격에 관람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 콜숩시디오 극장은 수년 동안 상징적인 대관비만을 받고 축제 측에 극장 공간을 제공해 왔고, 이에 대해 축제 측은 극장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수준 높은 공연을 우선적으로 콜숩시디오 극장에서 소개한다는 것이다.

이 밖에 어린이 공연장 견학 프로그램, 노인과 학생, 콜숩시디오사(社) 가입 기업체 및 종사자에 대한 30% 티켓 할인 정책, 기업체를 찾아가는 공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다. 시민들의 생활 속에 공연 예술이 있고, 그 가운데 콜숩시디오 극장의 프로그램이 있다는 자부심과 긍지가 대단하다.

하지만 콜숩시디오 극장이 무지개빛 환상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극장 바로 앞을 통과하는 곡철 버스 운행을 위한 대형 도로 공사가 한창이고 차량 운행 제한법의 확대 실시로 관객확보에 예상치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 모니카 토로 극장장의 설명이다. 이러한 외부적 환경이 개선될 때까지 콜숩시디오 극장은 기존에 운영되던 대관과 제작 비율이 50:50이던 것을 한시적으로 70:30으로 운영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모니카 극장장은 지상 곡철 버스 시스템이 개통되는 2011년을 기점으로 극장의 새로운 전환기를 마련하고자 구상 중이라는 개인적인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필자는 콜숩시디오 극장이 콜롬비아 문화계는 물론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의 문화교류에도 큰 기여를 하기 바란다는 부탁으로 화답을 하면서 2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마쳤다.





조정윤

필자소개
조정윤은 콜롬비아 보고타에 위치한 아시아-이베로문화재단(Fundaci&oacute;n Cultural Asia-Iberoam&eacute;rica)의 프로그래밍 디렉터로,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 대륙 간의 문화 교류 발전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기획해 오고 있다. 또한 유네스코 예술교육 세계대회 라틴아메리카 지역 본부의 공공정책위원회(Public Policy Committee)의 멤버이자, 아시안아트페스티벌인 &lsquo;HOLA ASIA&rsquo;, 이베로아메리카노 국제연극제의 아시아 대륙 담당 프로그래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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