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극장에서 예술가와 관객의 자리는 무대와 객석으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극장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 사람들이 좀 더 친근하게 극장을 드나들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고안하거나 양질의 콘텐츠를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예술가, 새로운 작업을 발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극장은 공연예술 생태계의 거점이자 사회적 소통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weekly@예술경영]은 공연예술 생태계의 거점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가는 극장의 운영사례를 싣는다.

대리석 거리, 눈부시도록 하얀 안달루시아풍 건물, 오묘한 색을 자랑하는 모스크가 어우러져 이슬람문화와 기독교문명의 묘한 조화를 만들어내 더욱 매력적인 스페인.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기 때문인지, 태양의 열기만큼 다혈질인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인지 스페인의 거리는 현란한 색을 자랑한다. 안토니오 가우디의 역작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정교함과 구엘 공원의 섬세함은 엄청난 내공을 뽐낸다. 어느 도시에나 돈을 구걸하는 사람은 으레 있게 마련이지만 관광지로 유명한 람블라스 거리에서는 구걸도 예술적이다. 숲, 천사, 마리오네트 등 갖가지 아이템으로 분장한 행위예술가들은 돈을 주지 않으면 절대 사진을 찍도록 내버려두지 않으니 말이다.

매년 수 만 명의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바르셀로나. 지역색이 유난히 강한 카탈루냐 지방 바르셀로나주(州)의 주도 바르셀로나시의 또 한 가지 자랑거리는 ‘씨어터시티’(Ciutat del Teatre, City of Theatre)다.

람블라스의 거리 예술가들



문화로 유혹하는 태양의 도시, 바르셀로나

올림픽 주경기장과 에스파냐 성(Plaça d';Espanya)이 위치한 몬주익 언덕(Montjuïc hill)에 씨어터시티를 이루는 극장들이 있다.

1929년 국제 박람회를 위해 바르셀로나 시는 중세 고전주의를 리바이벌한 누센티즘(Noucentisme) 양식으로 라그리쿨트라(Palau de l';Agricultura)를 지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이와 조화를 이루는 건물 메르캇 드 레스 플로르스(Mercat de les Flors)를 세웠다. 꽃시장이라는 의미의 메르캇 데 레스 플로르스(Mercat de les Flors)는 이후 바르셀로나 공연문화를 상징하며 혁신적이고 실험적인 현대무용 및 무브먼트 아트의 허브로서 씨어터시티의 맏형 역할을 하게 되었다.

1976년 연극인들이 텍스트를 기본으로 하는 순수연극을 활성화하기 위해 일종의 소극장 연합체로 출발한 테아터 루레(Teatre Lliure)는 1989년 정식으로 오픈하여 지금은 연극과 전시를 중심으로 하되 음악, 무용 등 공연예술을 폭넓게 소개하고 있다. 테아터 그렉(Teatre Grec)은 과거 채석장이었던 곳에 그리스 원형경기장을 본떠 만든 야외공연장으로 다양한 공연과 콘서트를 선보인다. 한편 1913년 바르셀로나시가 건립해 지금은 시 산하 독립기관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드라마 스쿨이 발전한 것으로 공연예술 전반에 관한 교육 및 축제, 전시, 학술행사 등을 통해 공연문화 프로모션 활동을 하고 있는 씨어터 인스티튜트(Institut del Teatre), 그리고 경기장을 개조해 뮤지컬 전용극장으로 사용하는 비티엠(Barcelona Teatre Musical) 등이 씨어터시티를 이루며 바르셀로나 예술을 대표하고 있다.

극장 외관, 로비, 공연장 내부



씨어터시티 중심의 ‘꽃시장’

그 누구건 한발 앞서 미래를 개척하고자 하는 개인의 열정은 많은 것을 이뤄낸다. 더구나 매우 보수적인 스페인이니 개인의 노력은 아마 더욱 고단한 일이었을 것이다. 1929년 국제박람회를 위해 세운 메르캇 데 레스 플로르스는 박람회 이후 이름 그대로 꽃시장이 되었다가 1983년 작가이며 교육자로 당시 문화정책을 담당했던 마리아 오렐리아 캄마니(Maria Aur&egrave;lia Capmany)와 시장 파스칼 마라갈(Pasqual Maragall)의 노력으로 카탈루냐 도립극장(스페인의 경우 지역 자치권이 워낙 강해 카탈루냐 국립극장이라 불러도 무방하다)이 되었다. 이후 1985년 피터 브룩이 <마하바라타>(Mahabharata)를 공연하기 위해 개축한 후 3개의 공연장을 가진 극장으로 음악, 연극, 무용, 전시 등 다양한 예술을 선보였다. 근래 2006년부터는 무용에 집중해 국내외 유수의 무용공연을 소개하고 테크놀로지나 음악 등 인접 분야와의 접목이 두드러진 실험적인 작품과 젊은 예술가들을 지원 발굴하며 바르셀로나 현대무용의 허브로 자리 잡았다.

카롤린 카를송 공연 포스터카탈루냐 주정부와 바르셀로나시가 스페인 중앙정부의 지원으로 운영하는 메르캇 데 레스 플로르스는 화가 미구엘 바르셀로(Miquel Barcel&oacute;)의 작품인 12미터에 이르는 돔과 아름다운 로비, 그리고 3개 극장 중 마리아 오렐리아 깜마니 극장(Sala Maria Aur&egrave;lia Capmany)이 바르셀로나의 상징적인 관광명소로 소개될 만큼 미관상으로도 매우 뛰어나다. 4년 계획으로 무용에 집중 투자하고 있는 극장은 나초 두아토, 로사스, 아크람 칸 무용단, 호페쉬, 루베 국립 카롤린 카를송 무용단 등 세계적으로 이미 명성 높은 무용단뿐만 아니라 자국 예술가들의 작품을 적극적으로 발굴 육성해 매년 9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소개한다. 외국공연 40%, 카탈루냐 예술가 공연 38%, 자국 예술가(카탈루냐 외 스페인 예술가) 공연 20%, 기타 2%(2009년 통계)로 비교적 고르게 배치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극장 및 지역사회와의 협력을 지속적으로 모색하는 것과 동시에 재원을 출원해 타 축제를 지원하는데도 앞장서고 있다. 작년에 이어 지난 10월에 카나리섬에서 있었던 제14회 마스단자 수상자 중 솔로부문 우승자에게 상금을 지급한 것도 메르캇 데 레스 플로르스다. 이 중 스페인 참가자 2~3명에게는 탄타란타나 극장(Teatre Tantarantana)과 공동 주최하는 비씨에스티엑스 축제(Festival BCSTX) 젊은 춤꾼 시리즈에서 공연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ldquo;무용, 무섭지 않아요&rdquo;, 다양한 관객 교육 프로그램

이 정도뿐이라면 국내의 극장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메르캇 데 레스 플로르스의 진짜 경쟁력은 결과보다 &lsquo;과정&rsquo;에 더 무게를 두는 운영철학에서 나온다. 예술감독인 프란세스 카사데수스(Francesc Casadesus)는 극장의 기능을 아트센터, 움직임(창작을 위한 다양한 활동), 관객, 네트워크, 이 네 가지로 정의한다.

프린세스 카사데수스 예술감독
"예술가들에게는 공간도 중요하지만 시간을 줘야 합니다. 서로의 장점을 배우며 대화하고 내용을 발전시키다 보면 실패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실패가 좋은 결과로 발전하기 위해서 젊은 안무가들에게 멘토 시스템이나 코칭수업, 리서치와 실험 그리고 발표하는 시간을 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극장을 &lsquo;프로젝트 아트센터&rsquo;라고 부르며 우리 모두가 마음을 열고 서로 고민하며 대화하고 연구와 실험을 통해 내용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예술가들에게 충분한 시간과 공간 그리고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관객과의 소통을 위해서도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공연소개 브로슈어를 열심히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관객은 공연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에서 관객에게 창작과정을 공개하거나 예술가와 대화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그리고 교육목적으로 학생들이 공연을 관람하게 될 경우 교사들을 미리 교육하는 &lsquo;교육가방&rsquo;(Maleta Pedagogica, Pedagogy Baggage)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매주 토요일에는 정규 교육 프로그램으로 &lsquo;무용, 무섭지 않아요&rsquo;(La dansa no fa por, No fear about dance)를 운영한다. 이는 공연 관람에 앞서 관객들에게 무용역사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며 공연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팁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 밖에도 지역 예술가뿐 아니라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마스터클래스를 마련한다. &lsquo;가족을 위한 예술교육&rsquo;은 매우 중요한 극장운영철학 중 하나로 다양한 연령대의 가족관객을 위한 프로그램을 별도로 마련하는데, 초등학생들을 위해서는 공연과 함께 참여워크숍을 진행하고 교사들이 학생을 지도할 수 있도록 교육자료집을 만들어 주는 한편 중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는 교육적으로 가치 있는 무용영상 작품을 상영한다.


&ldquo;극장은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rdquo;
지역-해외를 아우르는 문화소통의 허브

"극장은 최종 목적지가 아닙니다. 바르셀로나시, 카탈루냐주, 스페인 그리고 더 나아가 전 세계 문화예술에 관련된 모든 주체들이 이루고 있는 문화사슬에서 우리 극장은 단지 하나의 고리일 뿐입니다. 예술가를 위해 일하고, 예술가와 지역사회가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중간 매개자의 역할을 하며 이를 보다 원활하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우리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감독의 이같은 말은 장르를 불문하고 극장이 세력화되는 것을 경계하며 가시적인 단기성과에 연연하지 않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예술과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노력한다는 점에 있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유럽댄스하우스네트워크(EDN, European Dancehouses Network) 회원이기도 한 메르캇 데 레스 플로르스는 영국의 더플레이스-런던(The Place-London), 독일 뒤셀도르프 탄츠하우스(Tanzhaus NRW D&uuml;sseldorf) 등 유럽 각지의 주요 무용 공연장과 함께 특별한 후원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작업하는 젊은 예술가들을 발굴해 상호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다양한 안무법을 개발할 수 있도록 후원한다. 아울러 창작을 독려해 공연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해준다. 마스단사를 후원하거나 매년 지역을 달리해 열리는 스페인 댄스 플랫폼(Mov-s, 마드리드에서 2010년 6월 10일 - 13일 개최예정)을 적극 후원하는 것도 이러한 활동의 연장선에서라 할 수 있다.

야외수영장 워크숍, 올리픽수영경기장, Caixa Forum 로비공연, Caixa Forum 야외 계단 공연 (전체) 디에스 데 단사(Dies de Dansa) 공연 모습



"씨어터시티의 다른 극장이나 축제들과도 지속적으로 협력하며 레지던시 운영 및 다양한 담론 형성을 위한 포럼을 마련합니다. 시즌별로 특정 테마를 선정해 뮤지션, 미디어아티스트, 시각예술가 및 무용가들이 교류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그들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한 예로 유명 플라멩코 예술가를 초청해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즉흥작업을 하도록 했습니다. 다음에는 전혀 만나보지 않았던 타 분야 예술가들과 교류하도록 했고요. 함께 작업을 하라고 했더니 엄청나게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지더군요. 예술가들이 보여준 재미있는 결과처럼 저는 극장이나 축제가 하나의 비전만 바라보지 않고 다양한 전망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협력자를 찾아내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매년 시즌을 준비하며 예술감독이 놓치지 않는 것은 매 시즌을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각각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사회가 필요로 하는 또 다른 문을 열어주어야 하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술가, 관객, 새로운 형식의 예술 그리고 극장이 충분히 소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검증된 유명 공연을 소개하기도 하지만 국제적인 공동제작에도 참여해 새들러스 웰스와 함께 시디 라르비 셰르카위, 웨인 맥그리거, 러셀 말리펀트, 자비에 드 프루토가 안무가로 참여하는 프로젝트를 제작했으며 울티마 베스의 신작 초연을 지원하기도 한 극장은 발 빠른 중국과도 정기적으로 상호교류 레지던스를 운영하고 교환공연을 추진하는 등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점차 확대하고 있다.

정직원 33명(2009년 현황, 2007년 25명, 2008년 31명)이 운영하는 극장은 연간 4,830,000유로(한화 약 87억, 극장 발표 2007~9년 예산 기준)의 예산으로 자체 기획 프로그램에 가장 많이 투자하고 있으며 03/04시즌 30%였던 유료 판매율이 07/08시즌에는 60%로 증가했다. 일 년간의 3개 극장 운영통계로는 상당한 수준이다.

[표10 시즌별 객석점유율 [표2] 극장을 통해 소개된 예술가들의 출신 지역

바르셀로나뿐 아니라 스페인의 어지간한 축제나 행사 브로슈어에서 메르캇 드 레스 플로르스 이름을 찾아보기는 매우 쉽다. 스페인의 축제 &lsquo;페스티벌 아시아&rsquo;에 2007년 초청받았던 박순호도 이 극장에서 공연했고 바르셀로나의 대표적인 현대무용 거리축제인 디에스 데 단사(Dies de Dansa)도 이 극장으로부터 후원받는다. 이는 극장을 세 개나 갖고 있어서도 아니고 재정이 넉넉해서도 아니다. 지역사회와의 긴밀한 연계를 통해 스페인 공연예술 발전에 어떤 방법으로든 기여하고자 하는 극장운영 철학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ldquo;현대무용이 먼저 다가가고 시민들이 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관객들과 함께 수영장에 뛰어들어 워크숍도 하지요&rdquo;라며 대형버스를 대여해 광장, 경기장, 분수대, 메르캇 드 레스 플로르스 극장 등 시내 곳곳으로 시민들을 싣고 나르던 디에스 데 단사의 예술감독 후안 에드와르도 로페즈(Juan Eduardo Lopez)에게서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lsquo;예술과 지역사회의 소통과 발전&rsquo;에 대한 강한 열망이었다.


김신아

필자소개
김신아는 서울세계무용축제, 월드컵 공동주최 기념 한-일 합작 외 다수의 무용 국제공동제작, 디지털 댄스 페스티벌, 공연저널리즘 서울포럼을 비롯해 아프리카∙아랍문화축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현재 서울세계무용축제 사무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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