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마지막 주에 열렸던 ';상파울루 한국현대무용주간'; 행사는 한마디로 한국 공연예술의 해외진출에 새로운 패턴, 새로운 차원을 마련해준 뜻 깊은 시도였다. 그 현장을 함께하는 동안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비용과 시간을 들여가며 이곳저곳 정신없이 돌아다녔던 지난날의 행적이 불현듯 펼쳐지면서(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회사 철야근무를 마치고 공항으로 달려가 2박3일에 유럽을 주파했는지. 하지만 어디 나 뿐이었으랴. 어딜 가나 미친 사람들은 존재하게 마련이어서 공연예술에서도 국제교류라는 일의 모호한 매력에 빠져 스스로를 불태웠던 사람들이 제법 있다.) 도대체 일방적 선망의 대상이었던 미국이나 서유럽도 아닌 이 남미 대륙에까지, 그것도 대표적 비인기 품목인 현대무용을 집중소개하기 위해 정부기관이 인력과 재정을 투입했다는 사실부터가 혁명적인 일로 떠올랐다. 사실을 말하자면 진즉에 해야 했던 일이지만 그동안 우리 정부의 의식수준 혹은 현실인식이 미흡했던 것이다.

어쨌든 예술경영지원센터(이하 센터)는 상파울루시 문화국에 30편 이상의 현대무용 자료를 보냈고 상파울루 측은 안애순, 안성수, 이태상, 전인정, 박나훈 다섯 단체를 선정해 카실다 베케르(Cacilda Becker) 극장과 상파울루 문화센터에 무대를 마련했다. 무용단들이 공연을 준비하는 낮 시간 동안 박용재 센터 대표는 브라질 인사들을 만나면서 향후 양국 간 문화교류 증진 방안을 협의하고 다녔고 평론가 김경애 씨와 나는 상파울루 시립발레단을 비롯한 여러 무용단 책임자들, 개인 예술가들, 평론가, 기획자들을 만나고 다녔다. 덕분에 그루포 코르포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아는 바 없었던 브라질 무용계의 현황과 사회역사적 배경을 다소나마 주워듣게 된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특히 성품이 올곧고 사회의식이 투철해 보이는 평론가 어나 프란시스카 폰지오를 알게 된 것은 고무적이었다.

상파울루 한국현대무용주간 리셉션(좌) 포럼(우)

다섯 작품은 브라질 관객들에게서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상파울루 시측은 무용계는 물론 문화예술계 주요 인사들을 초청했고, 센터도 사전에 구축한 인맥을 통해 관객 동원에 나섰다. 상파울루에 이민해 살고 있는 안애순의 옛 제자까지 나서 현지인 관객 동원을 도왔다.

행사 끝 무렵인 11월 28일(토요일)에는 ';한국 현대무용의 현황과 국제교류';에 관한 세미나도 열렸다. 세미나에 참석한 한 젊은 무용가는 2010년 문화동반자 프로젝트에 초청하고 싶을 만큼 출중했다. 그는 앞서 25일 안애순의 워크숍에 참석한 현지 무용수들 가운데 단연 발군이어서 여러 사람이 주목하고 있었는데 세미나에까지 찾아와 경청했으며 한국 무용가들을 위해 관광 안내를 자원하고 나섰다.

이번 행사는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는데 순서 없이 정리해본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역별 전략 수립의 필요성이다. 우리의 문화교류 정책에서 결정적으로 부족한 부분이 대상 지역에 대한 철저한 사전연구라는 사실은 많은 이들이 공감할 터이다. 지역학 내지 지역연구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무용의 경우도 지금까지 특정 국가나 지역을 겨냥한 경우는 전무했다. 특정 지역에서 규모 있는 행사를 열었다 해도 정책적 비전 없이 다만 공연들을 한 군데 모은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 행사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특히 우리가 흔히 선진국이라 부르는 나라가 아닌 지역이었다는 점에서 더 많은 연구과제를 던져준다.

중남미는 아직 현대무용의 수준이 높지 않다. 게다가 현대예술의 발상지가 아니라는, 즉 주류가 아니라는 정체성 고민에서도 우리와 비슷한 처지에 있다. 이는 그만큼 우리와 함께 호흡할 여지가 크다는 뜻이다. 공연만이 아니라 워크숍이나 레지던시를 통한 인적 교류 등 중장기 프로그램의 개발 소지가 충분하다. 동남아와 아프리카 같은 지역도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한국 공연계가 할 일은 무궁무진하다. 더구나 동남아 국가들에 대해서는 한국이 일종의 현대무용 발전 센터 역할을 해줄 수 있다.

둘째, 관과 민의 협력 필요성이다. 이런 큰 판은 정부가 아니면 벌이기 어렵다. 하지만 그것이 장기적으로 구체적 결실을 맺으려면 민간 전문단체들의 참여가 필수적이다. 나 자신 이번에 알게 된 브라질의 양질의 무용단들을 적어도 3년 이상 연속으로 서울에 불러 소개할 작정이다. 세계문화의 다양성에 아직은 무심한 편인 한국의 관객들에게 저 머나먼 나라에서 이런 춤을 추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이다. 중남미 비평가들을 서울공연예술포럼(SPAC 포럼)에 초청해 무용예술에 대한 다양한 이슈와 다양한 관점을 공유할 생각이다.

아울러 말해두고 싶은 것은 우리의 국력증진에 따라 국제교류 활동이 급증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정부 차원의 각종 국제교류 사업을 손발로 뒷받침할 민간 에이전트들의 존재가 갈수록 중요해질 것이라는 점이다. 정부는 지금부터라도 에이전트 육성 방안을 생각해야 한다.

상파울루 한국현대무용주간 예술가 워크숍

셋째는 정치경제적 관점을 고려한 문화교류이다. 브라질은 우선 땅이 넓고 (브라질 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대륙’이라 부른다. 마치 러시아인들이 바이칼 호수를 ‘바다’라고 부르듯) 석유를 비롯한 각종 자원이 풍부하며 최근 들어 경제력이 급속히 향상되고 있다. 충청남도 전역에서 키우는 소가 약 30만 마리인데, 브라질에서는 한 농장에서 100만 마리 이상을 키우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한다. 지금 한국 정부와 기업들도 상파울루-리우데자네이루 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건설에 참여하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이고 있다.

특히 요즘에는 월드컵대회(2014년)와 올림픽(2016년)의 연속 개최를 앞두고 브라질 국민들의 자부심이 글자 그대로 솟구치고 있다. 이번에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미국도 안중에 없는 듯했다. 물론 중남미 특유의 반미감정도 있지만 그 못지않게 넘쳐나는 자신감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감이란 정치, 경제 말고 문화예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은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 특파원의 말은 이렇다. “글쎄, 프랑스 정도에 대해서나 문화적으로 인정할까, 나머지 국가들에 대해서는...”

포르투갈이 이식해놓은 유럽문화와 역시 바다를 건너온 아프리카 토속문화가 어우러져 매력적인 혼합문화를 형성했고 삼바와 카포에이라, 보사노바, 세계 3대 비엔날레의 하나로 평가받는 상파울루비엔날레, 빌라-로보스와 카를로스 고메스 같은 세계적인 음악가들, 그리고 풍부하고 다양한 문화유산 등 브라질은 모든 면에서 대국이 될 만한 면모를 갖추고 있다. 센터가 이런 측면까지 고려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탁월한 지역 선택’이었던 셈이다.

예술경영지원센터는 내년에 브라질을 포함해 중남미 3국을 아우르는 행사를 고려중이라고 한다. 우리 문화예술의 지역별 진출정책이 본격화하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종호

필자소개
이종호는 1977년부터 2009년까지 연합뉴스에 재직했으며, 1980년대 초부터 무용평론을 시작했고 유네스코 국제무용협회 한국본부와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를 창설하여 각각 회장과 집행위원장 겸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문화관광부 장관 표창(2006년)과 프랑스 정부 슈발리에장(2007년)을 수상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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