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극장에서 예술가와 관객의 자리는 무대와 객석으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극장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 사람들이 좀 더 친근하게 극장을 드나들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고안하거나 양질의 콘텐츠를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예술가, 새로운 작업을 발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극장은 공연예술 생태계의 거점이자 사회적 소통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weekly@예술경영]은 공연예술 생태계의 거점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가는 극장의 운영사례를 싣는다.
골로 호숫가의 페르귄트 야외공연장으로 불리는 이곳은 호수를 둘러싼 자연풍광 그 자체가 무대이자 환상적인 배경막을 만들어낸다. 공연은 지는 석양을 등지고 건너편 호수에서 배를 타고 등장하는 출연자들이 육지에 당도하면서 시작된다.

피오르드와 아름다운 자연의 나라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에서 북쪽으로 기차로 세 시간 거리의 한적한 시골마을 빈스트라(Vinstra). 매년 7월말에서 8월초 보름간 이 한적한 마을에는 노르웨이 전역과 전 세계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붐빈다. 이 작은 마을을 이처럼 활기 있게 만드는 것은 페르귄트 페스티벌 때문이다.

골로호수무대 전경

빈스트라가 위치한 구드브란즈달(Gudbrandsalen) 지역은 노르웨이의 전통과 문화유산이 그대로 살아있는 문화특별자치구이다. 지역전통과 천혜의 자연환경이 다양한 문화활동과 체험활동을 가능케 하는 이 지역 15개 마을에서는 매년 총 30개 행사들로 구성되는 페르귄트 페스티벌이 열린다. 페르귄트 페스티벌은 노르웨이의 대문호 헨릭 입센의 희곡 <페르귄트>를 기념하는 페스티벌이다. 1928년 헨릭 입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처음 개최되었고 1967년부터는 매년 한 여름을 뜨겁게 달구는 노르웨이 최대의 문화행사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이곳에서 페르귄트 페스티벌이 열리게 된 배경은 입센이 <페르귄트>를 집필할 당시 이 지역의 실존 인물이었던 &lsquo;페르&rsquo;(PER)를 모델로 삼았기 때문이다.


지역주민 자원봉사뿐 아니라 출연진으로 축제 참여

2004년부터 지금의 모습을 갖춘 페르귄트 페스티벌은 페르(Per, 실존인물)와 페르(Peer, <페르귄트>의 타이틀 롤)의 만남이라는 데서 착안하여 지역과 세계,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특별한 문화적 체험을 제공한다. 지역전통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며 페르귄트와 연관된 연극, 무용, 콘서트, 전시회, 문화강좌, 자연체험, 코메디의 밤, 올해의 페르귄트상 시상식 등의 다양한 행사들로 확대시켜 가고 있다.

페르귄트 페스티벌이 주목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올해의 페르귄트상 시상식이다. 1971년부터 그해 노르웨이를 빛낸 문화예술체육인 가운데 한명(또는 한 단체)을 선발하여 축하공연과 함께 시상하는 권위 있는 상으로 수상자 중에는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노르웨이의 유명인사들이 포함되어 있다. 귄터(Gynter)로 불리는 이 상의 주요 수상자들로는 배우 리브 울만(Liv Ullmann, 1973), 장애인 알파인 스키선수 카토 잘 페더슨(Cato Zahl Pedersen, 1981), 그룹 아하(A-Ha, 1987), 국가대표 핸드볼 팀(1998) 등이 있다. 2008년 현지 방문당시 새로 지어진 노르웨이 국립 오페라 하우스를 설계 시공한 건축가 케틸 T 토르센(Kjetil Tr&aelig;dal Thorsen)이 수상하였다.

페르귄트 페스티벌 공연 모습

방대한 지역에서 동시 다발로 펼쳐지는 이 페스티벌의 조직위는 놀랍게도 최소한의 인원구성으로 예술총감독, 기획, 행정, 홍보를 담당하는 5~6명 이내의 정규직원으로 이루어진다. 행사를 진행하고 운영하는 대부분의 스태프는 페스티벌 기간 동안 자발적인 지역주민 자원봉사자로 구성된다. 예술총감독은 전체적인 조직운영뿐 아니라 페스티벌의 주요 프로그램들을 프로그래밍 하는 기획자로서의 역할을 겸하며 조직위의 재정적 확보를 전담한다. 이 페스티벌의 또 다른 특성은 지역주민들은 자원봉사뿐 아니라 페스티벌의 모든 공연프로그램에 출연진으로 참여한다는 것이다. 뮤지컬의 앙상블, 연극배우, 무용수 그리고 오케스트라 연주자로 반드시 지역주민을 일정부분 참여시켜 전문 배우들과의 협업을 통해 지역의 문화수준을 자생적으로 끌어 올리는 것이 이 페스티벌이 추구하는 가장 큰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페르귄트 가든
선박과 천연가스 보유고가 세계 최고인 노르웨이의 풍부한 자원은 이 페스티벌의 재정과도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페스티벌은 일정부분(약20%)만 지역 및 정부에서 지원받고 총 예산 80%에 달하는 예산은 협찬사의 재정적 지원에 의존하고 있다. 아프그루펜 리조트, 윌헬름센 마리타임 서브스, 구드브란즈델 에너지, 구드브란즈델 스파레 뱅크 등 세계 최고의 선박회사와 에너지 회사가 지난 몇 년간 페스티벌의 꾸준한 조력자로 함께하고 있다. 또한 지역 최고의 리조트와 헨릭 입센이 <페르귄트> 집필시 영감을 받았던 농장 &lsquo;페르귄트 가든&rsquo;에서는 행사에 참여하는 VIP들의 숙소 지원 및 각 종 세미나와 문화이벤트가 열리는 장소로 활용된다.


산과 들판에 지어진 야외극장

이 페스티벌의 메인 행사로 꼽히는 <골로(G&aring;l&aring;) 호숫가의 페르귄트>는 1989년부터 지어진 2000석의 전용 야외극장에서 매년 공연되고 있다. 골로 호숫가의 페르귄트 야외공연장으로 불리는 이곳은 호수를 둘러싼 자연풍광 그 자체가 무대이자 환상적인 배경막을 만들어 낸다. 공연은 지는 석양을 등지고 건너편 호수에서 배를 타고 등장하는 출연자들이 육지에 당도하면서 시작된다. 또한 이 공연은 노르웨이 최고의 배우들과 연주자들을 주축으로 지역의 아마추어 연기자 100여 명이 참가하여 협동작업으로 이뤄지고 있다. 매년 1만 2천 명이 이 야외극장에서 올리는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전 세계에서 모여들고 있으며 노르웨이 극단이 제작하는 최고의 작품 가운데 하나로 꾸준히 발전하고 있다.

골로 야외공연장

그동안 페르귄트 역으로 스베인 스툴라 훈그니스(Svein Stula Hungnes, 오슬로 뉴 씨어터 예술감독)가 지난 18년간 타이틀 롤과 연출을 맡아왔으며 2008년부터는 노르웨이의 국민배우라 할 수 있는 데니스 스트로회이(Dennis Storh&oslash;i)가 바통을 이어 받아 열연을 펼치고 있다. 야외극장은 그 특성상 우천과 기상이변 같은 기후적인 요인에 큰 영향을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골로 호숫가에 세워진 야외극장에서는 단 한 번도 공연취소나 환불 등의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 관객들은 일교차가 크다는 점을 감안하여 두터운 겉옷은 물론 우천 시를 대비해 비옷과 장화 등 완전무장한 상태로 이 극장을 찾는다. 입구에서 보는 관객들의 모습은 마치 히말라야 등반을 목전에 둔 산악인과 흡사하다.

빈스트라 역에서 차를 타고 론다네(Rondane)산 이정표를 따라 한 시간을 오르다 보면 산 정상에 페르귄트 페스티벌의 또 다른 묘미를 즐길 수 있는 콘서트 전용 야외극장을 만난다. 페스티벌의 하이라이트 공연 중 하나로 꼽히는 론다네 콘서트가 공연되는 곳이다. 론다네 산과 협곡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배경 막과 유선모양의 지붕이 어우러진 콘서트홀은 소박하지만 구색을 맞춘 외형을 갖추고 있다. 40여 명의 연주자와 가수로 구성된 페르귄트 오케스트라가 펼치는 야외 콘서트. 제대로 된 객석도 없지만 산 아래 협곡을 가로지르는 미풍의 공명으로 관객들은 마치 소풍을 나온 듯 풀밭에 드러누워 인간과 자연이 합주하는 그리그의 명곡과 다양한 클래식 곡들을 감상할 수 있다. 이 콘서트의 출연진 또한 80%가 프로페셔널이 아닌 지역출신의 아마추어 연주자들이다. 다소 투박하지만 실내음악회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생생한 연주를 들어볼 수 있다. 공연 전, 산 정상의 공연장에서 조금 떨어진 페르귄트 동상 아래에서는 삼삼오오 모여 앉은 관객들을 대상으로 음악 전문가의 각 곡에 대한 해설과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는 시간도 마련된다.

론다네 콘서트

구드브란즈델 계곡의 또 다른 대형 야외무대에서는 2006년부터 주브(JUV)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노르웨이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되는 무용과 익스트림 스포츠, 아크로바틱이 접목된 공연으로 산과 물이 합쳐져 놀라운 예술의 경지를 선보인다. 이 작품은 타 페스티벌과 변별되는 노르웨이식의 표현을 보여주기 위한 새로운 시도이다. 대부분의 무용수들은 물 위를 떠다니며 그 위에서는 뛰어난 익스트림 운동선수들이 공중부양을 한다. 산등성이와 정상, 폭포, 수면무대에서 쉴 새 없이 펼쳐지는 이 작품은 야외공연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보여주는 실험적인 프로덕션이다.

이 외에도 실내 공연장으로 활용되는 빈스트라 역사, 창고와 공장, 주차장에서는 페스티벌 기간 동안 각종 행사들이 펼쳐진다. 지역커뮤니티의 창고에서는 페르귄트상 시상식이, 빈스트라 역과 그 주변의 각 종 공장과 창고, 주차장에서는 노르웨이 신진작가들의 전시회, 문화강좌, 아트숍, 배우와의 만남 등의 행사가 열려 페스티벌의 장소로 한 몫을 한다. 한 여름 관객으로 북적대던 곳들은 페스티벌 기간이 끝나면 다시 창고와 공장, 간이역으로 제자리를 찾는다.

&lsquo;극장&rsquo;은 각종 편의시설과 공연자들에게 최고의 시스템을 제공하는 곳이다. 그러한 이유로 비싼 대관료와 티켓가격이 의례 당연시 된다. 하지만 변변한 리허설 룸이나 부대시설하나 없이 최소한의 공연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노르웨이의 야외극장에 수많은 관객들이 매년 끊임없이 모여드는 이유는 바로 노르웨이 구드브란즈델에서만 체험 가능한 공연들이 있기 때문이다.

페르귄트 페스티벌이라는 큰 틀 안에 자리하고 있는 구드브란즈델 지역의 공연장들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과 특성을 지키며 관객들을 불러 모은다. 이는 지역의 특성을 무시한 채 같은 형태와 규모 있는 공연장만을 선호하는 우리 지역사회의 공연관계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역에 기반 한 소재를 공연과 접목시켜 다양한 컨텐츠로 활용하고 지역 환경의 특성을 살린 이 같은 친환경 공연장을 지역극장 건립의 새로운 롤 모델로 삼는다면 새로운 형태의 다양한 공연장과 국제적인 이벤트가 동시에 만들어질 것이다.

비록 첨단기술의 화려함이나 신기술에 놀라는 일은 없지만 자연과 인간이 물아일체(物我一體)가 되어 살아있는 공연을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자 이를 통해 느끼는 감동은 물가 비싸기로 정평 난 노르웨이에서 평생에 한번은 꼭 누려야할 사치다.





김혜영

필자소개
김혜영은 서울예술단 해외공연PD, 2005프랑크푸르트 도서전 주빈국 조직위원회에서 전시운영팀 차장을 거쳐 현재 국립중앙극장 공연사업팀 기획위원으로 재직 중이다. 국립극장 주최 제1, 2회 세계국립극장페스티벌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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