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극장에서 예술가와 관객의 자리는 무대와 객석으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극장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 사람들이 좀 더 친근하게 극장을 드나들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고안하거나 양질의 콘텐츠를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예술가, 새로운 작업을 발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극장은 공연예술 생태계의 거점이자 사회적 소통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weekly@예술경영]은 공연예술 생태계의 거점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가는 극장의 운영사례를 싣는다.
한 편의 연극을 보고 감동하여 이 삭막한 세상에 필요한 연극을 만들어 주길 부탁한다는 말 한 마디 보태 극장 건립과 운영 전반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약속하고 지금껏 실행하고 있는 이 후원자가 연극이 제 힘 못쓰고 있는 현대의 연극 동네에 함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클라시쿠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스탈린 사후, 반세기가 넘는 러시아 현대연극사에서 중심을 차지하였던, 또는 현재 차지하고 있는 극장의 상당수는 스튜디오극장들의 성공한 연대 전략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토프스타노고프(Г.Товстаногов), 에프로스(А.Эфрос), 류비모프(Ю.Любимов) 등의 연극실천들 그리고 최근 포멘코(П.Фоменко)와 제노바치(С.Женовач) 등 수많은 연출가들을 중심으로 진행된 스튜디오 운동은 연극에 대해 뜻 맞는 이들의 자발적 공동체이다. 공통된 연극적 세계관으로 의기투합한 연대의 힘, 이 연대를 확고한 예술적 신념으로 묶어주는 연출가로서의 예술감독의 존재감,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질의 레퍼토리는 이 스튜디오극장들이 연극계의 중심으로 발을 내딛게 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공통된 전략이다.


극장의 시작, 연대와 레퍼토리

러시아 연극 이미지2005년 4월, 러시아 국립연극원 기티스(ГИТИС) 39호 교실형 극장에서 열린 ‘극장을 기다리는 6일간의 공연’이라는 작은 축제에서는 러시아 현대연극에서 스튜디오가 가진 저력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축제는 연출가 제노바치와 그가 담임교수를 맡아 5년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이 교실극장을 무대 삼아 연출과 배우교육을 해온 제노바치의 ‘아이들’이 만든 것이다. ‘극장을 기다리는 6일간의 공연’이라는 이 저돌적인 축제는 단 6일간의 축제기간 동안 공연 시작 전부터 몰려드는 관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평론가들과 방송국, 극장 관계자들까지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그들의 출발을 제대로 지켜봐주었다.

담임교수인 연출가 세르게이 제노바치(С.Женовач) 아래 연대한 이 연극학교 5학년 졸업반 학생들이 극장을 기다리며 레퍼토리로 내 놓은 여섯 편의 작품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각색한 <소년들> 외에 셰익스피어의 <뜻대로 하세요>, 오스트로프스키의 <늦은 사랑> 등이다. 그러고 보니 이들은 5년 동안 극장 설립을 위한 연대와 하나의 극장이 만들어지기 위한 필수적 요건인 레퍼토리를 충실히 준비해 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lsquo;극장을 기다리는 6일간의 공연&rsquo;으로 연출가 제노바치와 이 연대는 스튜디오 정신을 부활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그해 스타니슬라프스키 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더불어 <소년들>로 황금마스크 소극장 부문상과 연출상 후보에 오르면서 2005년 하나의 확실한 연극계의 이슈가 되었다. 제대로 된 스튜디오극장의 또 다른 시작을 러시아 연극은 이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연대의 중심, 예술감독

연대와 레퍼토리를 기반으로 구축된 스튜디오가 굳건히 자신들의 연극관을 확립시키는 데 무엇보다 필수적인 것은 예술감독의 존재감이 아닐 수 없다. 러시아 연극에서는 예술감독의 연극적 성향으로 극장의 성격이 특징 지어진다. 예술감독은 일종의 연대의 중심축인 셈이다. 당연히 스튜디오극장의 존립을 지탱하는 포지션인 예술감독에게는 까다로운 조건이 뒤따른다. 확고한 예술적 철학을 바탕으로 한 자신만의 연출적 스타일이 하나의 양식으로 굳건히 확립된 &lsquo;연륜&rsquo;의 연출가여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 학교 교실로부터 연대를 형성하고 레퍼토리를 구축한 학생연극 집단이 스튜디오극장으로 나설 때 항시 이들을 5년 동안 지도했던 연출가인 담임교수가 예술감독을 맡는다. 러시아 극장의 예술감독들은 연출가들의 이름 자체가 하나의 독특하고 차별화된 연극 양식을 특징지을 수 있는 일종의 연출의 칼라이다. 연대의 중심축이자 하나의 독특한 연극적 양식으로서 예술감독은 극장의 존립을 지켜주는 양질의 레퍼토리를 지속적으로 생산하며, 연대의 존립을 굳건히 할 수 있는 가능성에 다름 아니다.

연출가 제노바치
앞서 언급한 제노바치는 현재 50대 초반의 연출가이다. 스튜디오극장 설립을 전후로 제노바치의 연출 미학은 최고점을 보이고 있는데, 그는 이 스튜디오극장을 이미 오래전에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 학생 선발을 전적으로 담임교수에게 위임하는 러시아 연극학교 입시의 특성상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제노바치의 후일담에 따르면 학생들을 선발하면서 스튜디오 극장 대표 레퍼토리 작품인 <소년들>을 염두에 두고 학생들을 선발하였다고 한다. 스튜디오극장 설립 이전까지 말느이 극장, 포멘코 극장, 인간 스튜디오 등 모스크바 여러 극장의 초청 연출가로 작업을 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고 입지를 굳힌 그였지만, 자신만의 배우와 자신만의 무대에서 마음껏 창작활동을 하고자 하는 의지를 그는 2000년 처음으로 담임교수로 임명된 직후에야 펼쳐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연극적 연대를 같이 할 자기의 &lsquo;사람들&rsquo;이었다.


&lsquo;연극예술스튜디오&rsquo;와 얼굴 없는 후원자

2005년 졸업과 동시에 연대의 파워와 6편의 졸업공연을 레퍼토리로 프로 연극무대에 뛰어든 제노바치와 그의 아이들은 연극예술스튜디오(Студия театрального искусства)라는 그들만의 스튜디오극장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인 창작작업에 들어간다.

기티스 연극학교 교실극장에서 완성한 레퍼토리에 2005년-2006년 니콜라이 레스코프 작, 제노바치 연출의 <몰락한 가문>을 신작 공연으로 추가하였는데, 차별화된 클래식 공연을 통해 극장의 성격을 특징짓겠다는 그들의 전략을 충분히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들은 프로극단으로 러시아 연극무대에 명함을 내민 지 1년이 채 안 된 시간에 <몰락한 가문>으로 러시아의 최고 공연예술상인 황금마스크 시상식에서 소극장 부분 작품상, 연출상, 연기상이라는 3관왕의 위엄을 달성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이미 하나의 양식이 된 제노바치의 연출에 많은 부분 빚지고 있지만, 작품에 참여한 모든 배우들이 이제 막 학교를 졸업한 20대 초반의 젊은 배우들이라는 사실과 그들만의 연극 공간 없이 1년 동안 타 극장을 임대해 어려운 조건 속에서 관객을 만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운 결과임이 분명하다. 이들이 러시아 내에서뿐만 아니라 해외의 각종 연극축제의 관심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 시기도 이때쯤이다.

연극예술스튜디오 외관


그리고 이들에게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사건이 다가온다. 2008년 3월 1일 한 개인 사업가의 전적인 재정적 뒷받침으로 연극예술스튜디오가 모스크바 스타니슬라프스키 거리에 자신들만의 둥지를 마련한 날이기 때문이다. 연대와 레퍼토리를 바탕으로 시작된 스튜디오극장들이 오랫동안 어려운 여건 속에서 창작활동을 하다가 국가의 도움을 받아 시립극장으로 인가를 얻어 그들만의 연극 둥지를 마련하던 역사에 비추어 본다면 이 극장은 순수하게 개인의 후원에 의해 이루어진 극장이라는 점에서 그 설립 배경이 독특하고 흥미롭다.

<소년들>을 보고 감동을 받아 이들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백 년 전 스타니슬라프스키 가족이 운영했던, 2008년 당시까지 폐가로 방치돼 있었던 공장 부지를 사들여 극장으로 새롭게 리모델링한 건물을 아무런 조건 없이 연극예술스튜디오에 기부했다는 이야기는 마치 동화 속 주인공을 떠오르게 한다. 제노바치와 함께 무대 작업을 하는 무대 미술가 알렉세이 바로프스키(А.Боровский)가 극장 설계를 전담했는데, 무대의 벽돌과 나무 기둥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제노바치 극장의 스타일이 살아날 수 있도록 설계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 동화 속 주인공 같은 연극예술스튜디오의 후원자는 극장 건립뿐만 아니라, 모든 극장의 운영과 작품제작, 배우와 스태프들의 급여까지 지원하고 나섰는데, 그 지원의 규모가 어엿한 중극장 운영 재정에 맞먹을 정도로 엄청나다. 레퍼토리 공연 수익금에 대한 추가급여를 제외한 배우들의 기본급여가 러시아 내의 국공립 극장보다도 훨씬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오래전부터 연극예술스튜디오 건립에 관련해서 이 후원자에 대한 소문이 나돌곤 했었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화 될 수 있을까 하는 회의적 시선, 그저 떠도는 헛소문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문화에 대한 이러한 무조건적인 개인의 지원이 2010년의 &lsquo;오늘&rsquo;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립극장은 극장의 운영주체가 극장의 재정 전반을 지원하므로 극장의 소유권과 경영권이 자본의 출처 당사자에게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극장 오프닝파티에조차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이 후원자는 극장 건립과 작품창작, 그리고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급여와 극장 운영 전반에 관한 재정 지원을 하고 있으나, 극장의 운영과 소유권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예술감독과 배우들에게 위임하고 있다. 극장의 몇몇 책임자를 제외하곤 누가 후원을 했는지 그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을 정도이다.

모스크바시는 2008년 연극예술스튜디오 설립과 함께 ';마르크스 거리';의 이름을 ';스타니슬라프스키 거리';로 변경했다. 극장의 외관이나 극장 내부의 최신식 무대 환경, 그리고 극장 운영에 관한 재정전반을 살펴보건대, 연대를 통해 의기투합한 지 채 3년이 되지 않은 시점에 마련된 스튜디오극장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아직 미숙하고 여린 그들이 제도 안에 들어와 작업을 하는 순간에도 그들의 세계를 온전히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오직 연대의 힘으로 만들어진 스튜디오극장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질문일 것이다. 아마도 이 연극예술스튜디오의 개인 후원자는 자본의 정글 속에서 겪는 고투에 창작에 대한 신념과 에너지를 소비하지 말길 바라며 이 당찬 젊은 연극인들의 든든한 후원을 자처한 것이었으리라. 이곳이 모스크바의 스타니슬라프스키 거리 21번지 연극예술스튜디오다. 그리고 또 이곳은 스타니슬라프스키와 체호프의 고향이자 2010년 러시아의 모스크바다.

연극예술스튜디오의 내외부



클라시쿠스

이마미치 도모노부는 자신의 명저 『단테신곡강의』에서 &lsquo;클래식&rsquo;의 의미가 클라시쿠스(classicus), 즉 &lsquo;국가가 절체 절명의 위기에 맞닥뜨렸을 때 함대를 기부할 수 있는 부호&rsquo;라는 형용사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그 기원을 밝힌다. 즉 고대의 클라시쿠스처럼, 오늘날의 클래식은 인간의 심리적이고 정신적인 위기를 보듬고 극복해줄 수 있는 함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책이나 예술작품이라는 것. 그러고 보니 학교 교실에서 연대해 어엿한 스튜디오극장으로 성장한 제노바치 연극스튜디오를 묵묵히 지원하는 동화 속 주인공 같은 이 후원자도 당시 로마시대의 부호들인 클라시쿠스와 같은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해 본다.

한 편의 연극을 보고 감동하여, 이 삭막한 세상에 필요한 연극을 만들어 주길 부탁한다는 말 한마디 보태 극장 건립과 운영 전반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약속하고 지금껏 실행하고 있는 이 후원자가 연극이 제 힘 못 쓰고 있는 현대의 연극 동네에 함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클라시쿠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 러시아 연극사는 연대와, 레퍼토리, 그리고 여기에 클라시쿠스라는 한 단어를 더해 연출가 제노바치를 중심으로 하는 연극예술스튜디오를 기억할 것이다. 이 어찌 감동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전정옥

필자소개
전정옥은 지난 90년대 중반부터 근 10년 동안 모스크바를 비롯한 과거 소련 연방을 여행하며 수많은 연극과 연출가와 배우를 만나왔다. 그곳에서 보고 들을 얘기를 풀어 놓는 게 그녀의 유일한 취미이자 특기다. 일 년에 한두 번은 여전히 그곳 어느 극장 객석에 앉아 변해가는 러시아 연극을 지켜보는 것이 그녀 삶의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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