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8일, 찰리 질렛의 갑작스러운 부고를 접한 나는 마치 오랜 음악적 후원자이자 친구를 잃은 듯한 기분으로 가슴이 먹먹해졌다.

찰리 질렛은 영국의 월드뮤직 라디오계의 권위자이자 작가이며 최근에 이르러선 영국 월드뮤직계에 가장 영향력 있는 유명인사로 손꼽힌다. 대중음악의 역사를 다룬 그의 저서『도시의 소리』(The Sound of the City)가 [타임 매거진]과 [뉴욕타임즈]에서 극찬을 받으며 세계적으로 25만부 이상이 독자들을 만났다. 그는 또한 소니 라이프타임 어치브먼트 어워드(Sony Lifetime Achievement Award), 소니 어워드 베스트 스페셜리스트 뮤직쇼(Sony Awards Best Specialist Music Show)를 수상했다. 이러한 경력은 퍼블리셔, 음반 매니저, 라디오 진행자 등 찰리 질렛의 다양한 면모를 말해 준다.

그러나 나는 그의 화려한 경력보다 음악을 대하는 그의 진정성에 더욱 경의를 표하게 된다. 그는 스스로를 무소속 DJ(Maverick DJ)라 부르며 자신이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을 음반회사나 제작부의 압력이 아니라 항상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음악을 선곡하는 그만의 특별한 방식으로 꾸며왔다.

북촌 한옥마을에서 국악을 감상중인 찰리 질렛2009년 10월, 내가 찰리 질렛을 처음 만난 곳은 북촌의 ';마고';라는 예쁜 한옥 카페에서였다. 서울아트마켓(PAMS)의 초청으로 참가한 여러 예술감독들과 연주자들의 간담회가 열렸던 그 날 나는 잠시 후 극장에서 열릴 쇼케이스 리허설을 하고 조금 늦게 참석하게 되었다. 두 테이블로 나뉘어 간담회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내 자리 바로 옆에 참석자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백인 노신사가 앉아있었다. 그 노신사는 하얀 은발머리에 마른 몸집, 점잖으면서도 눈빛이 매우 날카로워 보였다.

이것이 내가 느낀 찰리 질렛의 첫 인상이었다. 영국 BBC 라디오의 월드 뮤직 프로그램 진행자라는 간단한 사전 지식밖에 없었던 나는 찰리에게 내 소개를 한 후 나의 EPK(공연에 관련한 비디오, 오디오 자료 등이 들어있는 프레스킷)와 음반을 건네주었다. 찰리는 EPK는 필요없고 음반에만 관심이 있다며 무표정한 얼굴로 내가 준 음반을 이리저리 훑어보는 것이었다. EPK를 건네든 손이 약간 무색해지면서 ';이 분 까칠하시네...'; 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간담회에 이어 열린 토론회에서 그의 모습은 전혀 달랐다. 찰리는 한국 전통음악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된 것에 자못 흥분했는지 들뜬 목소리로 ';Gukak';이라는 브랜드로 한국전통음악을 월드뮤직 시장에 알리자고 적극적인 주장을 하고 있었다. 예리함 속에 언뜻언뜻 비치는 따뜻함. 짧은 만남이었지만 국악에 대한 애정, 아니 음악에 대한 편견 없는 애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고 잠시 전 까칠했던 그의 첫인상은 순수함으로 바뀌었다. 서울아트마켓이 끝난 후 찰리가 북촌 한옥에서 열린 전통음악회를 보고 감동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는 후일담을 들으며 어렴풋이 찰리 질렛이라는 사람의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다.

그 후 시간이 지나고 12월이 되어 공연과 연말 분위기로 정신없이 보내고 있을 때 생각지도 않게 영국의 찰리 질렛으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짧지만 따뜻한 인사말과 함께 내 음반을 개인적으로 즐겨듣고 있고 자신의 라디오 방송에서도 틀었다는 내용이었다. 자신이 매년 만들고 있는 컴필레이션 앨범에 나의 음반 중 한 곡을 넣고 싶다는 메일을 받았을 때 나는 너무나 기뻤다. 나의 음반을 들으면 들을수록 좋다면서 나와 거문고 음악을 영국에 널리 알릴 때까지 쉬지 않고 소개하겠다는 찰리의 간결하면서도 따뜻한 이메일들은 ‘아, 이 사람이 진짜 음악을 좋아하고 즐기고 있구나’ 라고 느껴졌고 내 마음을 더욱 훈훈하게 만들었다.

찰리 질렛 찰리의 음악에 대한 소신과 열정은 다른 월드뮤직 라디오 방송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새로운 음반들에 대해 곡 한 번 소개해 주는 것에 급급한 반면 자신의 방송에서는 정말로 마음에 드는 한 곡이 있다면 그 트랙을 6주 연속으로도 선곡한다는 일화에서도 실감할 수 있었다. 찰리 질렛은 어떤 음악을 듣고 정말 자신이 즐거워했다면 그 곡이 충분히 알려질 때까지 선곡하는 것이 자신의 의무의 일부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세계의 수많은 음악가, 기획자, 청취자들이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은 바로 그의 남다른 특별함 때문일 것이다. 음악가들은 자신의 음악을 자신이 즐기지 못하면 듣는 사람에게도 감동을 줄 수 없다고 늘 생각하면서 음악을 만들고 연주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음악가와 그의 음악을 진정 사랑하고 즐기는 좋은 프로듀서가 있어야 그 음악이 세상에서 빛을 발할 수 있다. 음악 하나만으로도 서로 교감하며 토론하고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음악가와 프로듀서의 관계는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음악에 대한 소신과 고집으로 타협하지 않는, 아티스트보다 더 아티스트적인 프로듀서가 절실히 요구되는 지금, 스스로를 비즈니스맨으로 한계 짓고 음악가와 진정으로 소통하지 못하는 많은 기획자들에게 찰리 질렛은 음악에 대한 진정성과 순수한 열정을, 그리고 아티스트의 안목을 뛰어넘는 프로듀서의 모습을 제시하고 우리 곁을 떠나갔다.

지금 계획 중인 유럽투어가 확정되면 영국에 들릴 테니 꼭 만나자고 보낸 내 편지에, 영국에서의 나의 공연을 기획하기 위해 주변 기획자들과 친구에게 자신이 보냈던 이메일을 답장으로 보내주었던 찰리 질렛. 영국에 가도 이제 그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마음 아프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허윤정

필자소개
허윤정은 거문고 연주가, 작곡가이자 부친(연극연출가 허규)이 남긴 북촌창우극장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거문고와 한국전통음악을 세계에 알리는 일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2007-2008년 록펠러 재단 산하의 Asian Cultural Council의 레지던시 아티스트로 선정되어 6개월간 뉴욕에 머물며 활동하였다. 당시 뉴욕에서 결성한 다국적 월드뮤직 그룹인 ';토리앙상블';의 리더로서 해외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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