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극장에서 예술가와 관객의 자리는 무대와 객석으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극장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 사람들이 좀 더 친근하게 극장을 드나들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고안하거나 양질의 콘텐츠를 확보하기 위해 새로운 예술가, 새로운 작업을 발굴하기 위해 노력한다. 극장은 공연예술 생태계의 거점이자 사회적 소통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weekly@예술경영]은 공연예술 생태계의 거점으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가는 극장의 운영사례를 싣는다.

프라스카티 극장 전면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소극장, 프라스카티는 암스테르담 시내 중심에 위치해있다. 프라스카티가 있는 거리, 네스(NES)는 센트럴 기차역에서 10분 거리에 있어 관광객으로 늘 붐비는 지역이다. 거리 초입은 암스테르담의 명물, 운하 유람선을 타려는 사람들로 늘 북적거리지만, 뒷골목 네스까지 들어오는 사람은 거의 없다. 소극장들이 군집해있는 골목이라는 정보를 갖고 공연을 보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갖지 않고서는 찾기 힘든 곳이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은 골목에는 열 개 남짓한 소극장들이 띄엄띄엄 들어서 있다. 건물 틈새에 있는 작은 식당, 아담한 카페, 선술집 분위기의 펍, 공연 포스터와 기사들이 극장과 극장 사이의 공간을 채우고 있어 한국의 대학로 뒷골목을 떠올리게 한다. 저녁 9시가 넘어 늦은 밤인데도 거리는 오가는 자전거들로 정신이 없다. 한국처럼 네덜란드도 평일 저녁 공연이 7시 30분에 시작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다른 점은 밤에도 환한 북유럽의 여름 날씨 탓에 밤 9시, 10시에 시작하는 다른 공연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주위의 펍과 카페들도 하룻밤에 두 개의 공연을 보려는 욕심 많은 관객들의 중간 휴식을 위해 밤늦은 시각까지 운영한다.


액션 토마토의 결실, 네덜란드 최대 규모의 민간 소극장

프라스카티 제작 공연 <코서, 칸타르>(Coser y Centar)
프라스카티 극장(Frascati Theatre)은 네덜란드에서 가장 큰 규모의 민간 소극장이다. 4개 극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연평균 175개의 프로덕션을 700회 넘게 올리고 있다. 암스테르담 시내 한복판에 있는 극장이 &lsquo;프라스카티&rsquo;라는 이탈리아 작은 마을의 이름을 갖게 된 데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극장이 있는 거리는 한국의 7, 80년대 명동처럼 과거에 네덜란드 예술인들이 자주 찾던 문학과 술과 낭만이 넘치던 사교의 장소였다. 1810년에 &lsquo;프라스카티&rsquo;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커피를 팔던 카페가 이 건물에 있었고, 천 명이 넘는 사람이 함께 춤출 수 있는 무도회장이 있었다. 19세기, 네덜란드가 무역으로 맹위를 떨치던 시대, 동인도회사 소유의 경매장으로 바뀌었다가 1926년, 암스테르담에서 활동하는 연극인들의 요구로 스튜디오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1969년, 네덜란드의 현대예술이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된 &lsquo;액션 토마토&rsquo; 사건필자의 국립극장 기관지 [미르](2010년 3월) &lsquo;세계무대는 지금&rsquo; 기고글 참조 [미르] 3월호 보기을 계기로 현대연극과 무용을 올릴 수 있는 소극장에 대한 예술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져 프라스카티는 지금의 극장 설비를 갖추게 된다.

현재, 네스에 있는 프라스카티 극장은 180석 규모의 소극장1, 100석 규모의 소극장2, 80석 규모의 소극장3을 운영하고 있다. 모두 가변식 무대로 공연자의 요구에 따라 자유로운 전환이 가능하다. 이외에 프라스카티WG라고 불리는 블랙박스 스튜디오가 암스테르담시 외곽에 있다. 이곳은 주로 젊은 예술인들이 시연 전 단계의 실험적인 작품들을 올리고 있다. 공식적으로 네 개의 극장을 운영하고 있지만, 네스에 있는 또 다른 소극장, 드 브로켄 그론드(de Brokken Grond)도 프라스카티가 프로그래밍하고 있다. 이 극장은 벨기에와 네덜란드 간의 상호 문화 조약 체결로 입주한 플레미시 문화 센터(Vlaams Cultuurhuis)가 운영 책임을 맡고 있지만, 연중 15개 프로덕션은 프라스카티가 무료로 프로그래밍할 수 있도록 권한을 갖고 있다.

프라스카티의 연간 예산은 2009년 기준으로 151만 7천 164 유로(한화 약 22억 8천만 원)이다. 이 중 네덜란드 중앙 정부가 53%를 지원하고, 암스테르담 시 정부 지원금이 22%를 차지하고 있어 전체 예산의 대부분을 정부 보조금의 의존하고 있다. 네덜란드에서 이런 예산 지원은 파격적이다. 공공극장이 아닌 민간극장에 대한 지원으로서는 네덜란드에서 거의 유일무이한 큰 액수이다. 하지만, 덕분에 프라스카티는 네덜란드의 컨템퍼러리 공연예술을 생산하는 프로듀싱 하우스로서 기능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출 수 있었다.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협력 예술가';와 젊은 예술가 ';프라스카티 메이커';

프라스카티는 소극장 중심의 프로덕션 하우스이다. 그런데, 무엇을 프로듀싱할까? 최근에 한국에도 좋은 설비와 인력을 갖춘 극장들이 많이 건립됐고, &lsquo;프로듀싱 씨어터&rsquo;에 대한 재정의와 방향성 논의가 끊이지 않았다. 프로듀싱 씨어터의 핵심은 공연, 프로덕션 제작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관객에게 극장의 비전을 보여주는 동시에, 극장을 대표하는 창작 레퍼토리를 제작하는 능력을 떠올리게 된다. 따라서 프로듀싱 씨어터는 국내외 축제와 극장 무대에 올라갈 수 있는 공연 제작에 모든 관심과 노력이 경주된다.

예술감독 마크 티머그런데 프라스카티가 보여주는 프로덕션 씨어터는 이와는 다르다. 그들이 프로듀싱하고자 하는 것은 &lsquo;사람&rsquo;이다. 극장의
프로그래밍은 두 개의 큰 축으로 나뉜다. &lsquo;프레젠테이션&rsquo;(Presentation)과 &lsquo;프로덕션 및 개발&rsquo;(Productions & development). 프라스카티의 예술감독, 마크 티머(Mark Timmer)는 프리젠테이션 프로그래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lsquo;협력 예술가들&rsquo;(Regular Artists)이라고 설명한다. 이들은 네덜란드 컨템퍼러리 공연예술을 대표하는 예술가 또는 단체로서 신작을 올릴 경우, 프라스카티가 프로그래밍하고 있는 5개 극장(드 브로켄 그론드를 포함) 중에서 자신이 선택한 무대에서 작품을 올릴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바로 이점, 극장이 예술가에게 &lsquo;신작&rsquo;에 대한 무대 사용권을 준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미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라고 하더라도 신작에 대한 부담은 항상 따르기 마련이어서 어지간한 예술가가 아니고서야 무대를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다. 협력 예술가들의 신작에 대한 초연권을 극장이 가지는 것은 아니다. 프라스카티의 무대가 마음에 안 들 경우, 예술가는 어느 곳에서도 초연을 올릴 수 있다. 프라스카티는 극장이 예술가의 초연에 대한 부담과 예산을 파트너 관계에서 공유해주겠다는 의미가 더 크다. 신작에 대한 무대가 언제든지 확보되어 있어 예술가 입장에서는 어떤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타진도 마음 편하게 할 수 있다.

공연 일정은 상호 협의 하에 연중 계획을 세우면서 의논하고, 극장은 무대, 설비, 홍보, 티켓판매 등을 협조한다. 별도 제작 예산을 지원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나 극장에서 프라스카티 프로덕션으로 공동제작할 경우에는 프로덕션 제작비도 지원한다. 협력 예술가들은 예술감독의 추천에 의해 결정되며, 상호 협력에 대한 계약 기간은 예술가마다 다르다. 2010년 현재, 17명의 예술가 및 단체가 협력 예술가로서 활동하고 있고, 이 중에는 한국을 방문했던 에미오 그레코/피터 슐텐 무용단을 비롯해 네덜란드를 비롯해 유럽을 대표하는 컨템퍼러리 연극인과 무용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에미오 그레코/피터 슐텐 프라스카티 재공연<지옥>(Hell, 2010)
&lsquo;프레젠테이션&rsquo;이 협력 예술가들 중심이라면, &lsquo;프로덕션 및 개발&rsquo;의 핵심은 &lsquo;프라스카티 메이커&rsquo;(Frascati Maker)라고 명명된 젊은 예술인들이다. 이들은 극장 기획팀과 협력 예술가들보다 더 긴밀한 계약 관계를 맺고, 프로페셔널 예술가로서 독립하기 전까지 집중 트레이닝과 지원을 받는다. 연출가, 안무가, 극작가, 배우(마임이스트), 퍼포먼스 예술가로 구분하고 있으며, 전국에 있는 실기 위주의 예술학교 졸업생 중에서 극장 기획팀의 심사를 통해 선발된다.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더라도 극장 기획팀에 언제든지 제안서를 낼 수 있다.

프라스카티 메이커들은 본인이 실현하고자 하는 작품 또는 컨셉, 미학적 실험을 시도해볼 수 있는 스튜디오, 리허설 공간을 제공받으며, 기술 설비와 테크니션, 제작비를 지원받는다. 기획팀은 예술가들의 발전 과정에서 함께 논의하는 주체로 참여하고, 조언이 필요할 경우, 연출가와 드라마투르그 등을 1:1 트레이닝 코치로 제안한다. 극장 기획팀의 최종 목표는 젊은 예술가들이 가장 적정한 시기에, 가장 적정한 관객 앞에서 작품을 시연하도록 돕는 것이다. 가능성을 검증받은 작품은 국내 무대와 해외 투어를 거치면서 작품을 다듬고, 이후에 &lsquo;프라스카티 메이커&rsquo;는 네덜란드 공연예술계의 한 사람으로 독립하게 된다.



브레이킹 월, 아티스트부터 기획, 행정까지 20대들이 만드는 축제

(좌) '썸씽 로우' 2010년 포스터 (우) '브레이킹 월' 2010년 포스터

프라스카티의 축제에 대한 비전 또한 일반적인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 소위, 유럽에서 잘 나가는 작품과 예술가들을 감상하듯 늘어놓는 축제가 아니다. 좋은 작품은 평소에 프라스카티에서 볼 수 있다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에 축제란, &lsquo;평소와 달라야 한다&rsquo;는 것이 이들의 축제 철학이다. 이곳에서 축제는 프로듀서 입장에서도, 관객 입장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는 곳이다.

프라스카티는 여름과 겨울에 두 개의 축제를 주최한다. 2월에 열리는 겨울 축제는 &lsquo;날 것 그대로 부딪히라&rsquo;는 의미로 &lsquo;썸씽 로우&rsquo;(Something Raw)라고 이름 붙였다. 현대예술을 즐기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연극, 무용, 문학, 미술 등의 장르를 구분하는 것이 더 이상 의미 없다는 것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축제이다. 젊은 예술인들이 중심이며, 이 축제에서만큼은 소속단체와 장르를 떠나서 한 명의 예술인으로서 무엇이든 시도하고, 실험하고, 부딪히는 데에 의미를 둔다.

5월부터 열리는 여름 축제, &lsquo;브레이킹 월&rsquo;(Breakin&rsquo; Wall)은 청소년과 만 27세 이하의 젊은 예술인만 참가 자격을 가질 수 있는 축제이다. 청소년 중심의 아마추어 축제로 얕보면 곤란하다. 2001년에 프로젝트로 시작했던 이 축제는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어 지금은 프라스카티의 대표 축제로 자리 잡았다. 축제에서 공연한 작품들은 &lsquo;브레이킹 월&rsquo;이라는 축제 라벨을 달고, 유럽의 여러 극장과 축제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축제의 기획력은 놀라울 정도로 발전해 여름뿐 아니라, 사계절 내내 축제의 공연들을 프라스카티 안에서 볼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 축제에서 더 놀라운 점은 기획, 행정, 펀드레이징, 예산 집행, 모두가 20대 청소년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작품 선정위원회까지도 만 16세에서 23세의 청소년들로 구성되어 있다. 극장 기획팀은 무대, 설비 사용, 예산 보조금 집행과 관련해서 동등한 협력 파트너 입장에서 20대 청소년 기획위원들과 논의한다. 극장은 예술을 만들고, 즐기는 &lsquo;사람&rsquo;을 길러내는 곳이라는 프라스카티의 부러운 극장 미학과 철학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순간이다.

<악마는 쿠엔틴의 마음을 가졌다> (The Devil has Quentin's Heart), <클럽>(De Club) '브레이킹 월' 제작공연

프라스카티의 4개 소극장을 운영하는 전체 직원은 50명에 불과하다. 본래, 예술감독 1인 체제였으나, 2008년의 재단 합병을 계기로 예술감독과 행정감독 2명이 함께 극장을 이끌고 있다. 예술감독이 극장의 미학적 방향성과 프로그래밍을 책임지고 있다면 그를 도우며 세부 프로그램을 결정하는 기획팀의 핵심 인력은 2명의 드라마투르그와 3명의 프로그래머들이다. 이 인원으로 어떻게 그 많은 공연과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을까 깜짝 놀랐지만, 이내 한국의 극장과 축제 현장에서 밤낮없이 일하고 있을 동료들을 생각하니, 이내 수긍이 갔다. 어느 곳에서건 예술을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고단하다. 그래도 무엇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것인가, 무엇을 프로듀싱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인터뷰했던 프라스카티의 기획자들처럼 슬며시 미소가 지어질 일이다.

자료협조 - 소피 얀센(Sophie Janssen) _ 프라스카티 언론 홍보 담당


신민경

필자소개
신민경은 서울프린지네트워크에서 축제와 해외업무를 담당했으며, 예술경영지원센터 국제교류팀, 2009 의정부음악극축제 해외팀장으로 일한 바 있다. 지금은 영국 워릭대학교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대학교에서 공연예술 국제교류 관련 석사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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