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가볍게 시작된 한 통의 메일로 2개월의 여정이 조용하고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홍콩프린지클럽 행정감독 캐서린을 통해, 홍콩 공연예술아카데미(The Hongkong Academy for Performing Arts, 이하 APA) 예술경영 마스터과정 학생들의 서울 리서치를 도와주게 된 것이다. APA는 홍콩 정부 산하 교육기관으로 우리의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거의 유사하다. 이번 방문은 수업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프로젝트 ';창조산업 성공사례 연구';를 주제로 한 것으로 두 명의 코스 리더 교수와 다섯 명의 학생들은 4월 23일부터 28일까지 5일간 공연예술, 미디어, 영화, 건축, 디자인 등을 아우르는 버라이어티한 탐험길에 올랐다.

현장사례는 크게 지역적인 접근과 각 영역별 기관, 단체 미팅으로 진행되었다. 대학로, 홍대앞, 그리고 문래동까지 문화밀집지역에서는 공연관람을 하고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문래동 토요춤판에서는 수적으로 압도적인 관객이 되어 포스트토크에 열렬히 참여하고, 즉흥춤판에 슬쩍 끼어들기도 했다. 한편 예술경영지원센터를 비롯해 한국디자인진흥원, 한국영화진흥위원회, 한국콘텐츠진흥원 등에서는 좀 더 형식을 갖춘 프레젠테이션과 질의응답이 이루어졌다. 마스터 과정 학생들인 만큼 문화기획자, 사운드 디자이너, 무용수 등 축적된 현장활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주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질문들이 오갔다.

다양한 층위를 가진 많은 곳들을 방문했는데, 그중 문래동과 하자센터는 그들에게 제일 흥미로운 곳이었다. 서울의 문화공간을 소개하기 위해서는 서울시의 창작공간 사업을 설명해야 하고, 홍대앞이나 문래동처럼 이미 자생적인 문화가 형성된 곳에 서울시가 어떻게 링크를 만들고자 했는지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필요했다. 이들은 문래예술공장과 문래동 예술가 커뮤니티에 많은 관심을 보이면서 문화정책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의 물꼬를 텄다. 그들은 우리나라(서울)의 풍성한 문화지원정책과 훌륭한 공공시설에 놀라워하는 한편, 예술지원정책과 개발정책의 첨예한 대립지점 한가운데 놓인 문래동을 보면서, 베이징의 798문화지구의 전철을 밟지 않기를, 문래동이 몇 년 후에도 여전히 뿌리 뽑히지 않기를 기원했다. 그리고 많은 공간들이 예술가들에게 나누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꺼내놓는다.

하자센터, 문래예술공장, 서울프린지네트워크,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 홍콩공연예술아카데미 예술경영 마스터 과정 학생들의 한국 예술현장 방문

나로서는 다양한 문화가 혼재해 있고 다양한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는 홍대앞이 훨씬 흥미로웠지만 일정이 어긋나 홍콩팀에게 홍대앞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했다. 홍콩팀은 만나는 이들에게 대학로와 문래동에 대한 견해를 5일 내내 거듭 묻고 확인했다. 대학로의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공연장 방향표시와 매 건물마다의 소극장을 보면서 놀라워하고, 거리를 채우는 이들이 모두 연극 마니아인지, 연극 관객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해 한다. 많은 훌륭한 극장과 문화시설, 문화공간을 보면서 이 공간을 이용하는 예술가들은 어디에 있는지, 이들을 찾는 관객은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아르코예술극장의 넘쳐나는 관객과 무릎이 앞좌석에 닿는 비좁은 소극장의 썰렁한 객석, 잘 갖춰진 아트팩토리와 철제공장단지 속에서 자생하는 문래동 예술가들의 작업실. 초상업적인 공간들의 틈새에서 생존해야 하는 예술가들. 홍콩팀 역시 그러한 활동들을 상업적인 공간에서 맞닥뜨리면서 예술이 뿌리 내린 지역이 어떻게 상업적으로 변모하고 예술을 또다시 소외시키는지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공적 지원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민간 영역에서는 여전히 분투해야 하는 불균형은 어쩌면 슬쩍 지나치는 이들의 눈에 오히려 더 잘 감지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를 소개하는 101가지 방법

한편 많은 단체를 방문하면서, 자기를 소개하는 방식의 다양한 유형을 볼 수 있었다. 어떤 곳은 방문객에 대해 부담을 많이 가졌지만, 대체로 호의적이고 많은 준비를 해주었다. 한국종합예술학교나 한국디자인진흥원처럼 공식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에서는 준비된 프레젠테이션과 자유로운 질의응답, 그리고 공간 투어가 진행되었다. (이 자리를 빌어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한국을 방문한 APA 교수와 학생들
가끔, 훌륭한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형식에 얽매여 프레젠테이션 하면서 에너지를 전달하지 못하는 곳도 있어 안타까웠다. 어떤 곳은 소개하는 이가 업무를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구조여서 기관의 활동에 대한 전체적인 매핑보다는 자신에게 익숙한 파트만 설명하기도 했다. 또한 시간이 부족해서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거나, 기관에서도 정보를 전달하는 데 머무르고 좀 더 적극적인 의견을 나누지 못한 데서 오는 아쉬움도 있었다.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것도 여전히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언어의 유창함보다는 태도가 훨씬 더 많은 것을 전달해주는 것 같다. 대체로 영문 웹사이트와 영문 홍보물들도 갖추고 있어서 기본 정보를 얻기 어렵지는 않았지만, 본격적인 프레젠테이션의 경우는 전문용어와 개념이 많아, 외부 통역대동을 요청하기보다는 내부 상황을 아는 사람이 직접 영어로 의사소통하거나 내부 통역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홍콩팀과 함께 한 5일간은 나에게도 많은 공부가 되었고, 나의 방향을 다시 점검하는 시간이 되었다. 또한 현장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들은 일의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시간에 쫒겨 방문한 곳들과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안타까움, 서로 좀 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나누기보다는 일방적인 정보의 전달에서 멈추어버리는 것에 대한 아쉬움. 좀 더 역동적인 현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들을 이 짧은 시간에 다 소화하려 하는 것은 무리임을 인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애초 이 원고는 홍콩팀이 바라본 서울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싶었지만, 그들에게 즉흥적인 감상 이상의 입체적인 매핑을 기대하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기에 결국 투어 코디네이터로서 느낀 서울 관람기가 되어버렸다. ‘다이나믹 코리아, 디자인 서울’에서 살고 있는 나는 잘 디자인된 이곳에서 안전하게 살고 잘 적응하기 위해 오늘도 밤을 지새운다.





최순화

필자소개
최순화는 출판계에서 20대를 보내고, 서울프린지네트워크에서 대부분의 30대를 보내며 문화예술에 대한 시야와 지평을 넓히고 좋은 인연들을 만났다. 문화기획자로서 문화매개자로서 또 다른 도약을 꿈꾸다. 최근 도시+문화+공간 키워드로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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