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은 관객들을 위해 작품을 만들어 보여주는 공간의 역할을 넘어 관객들에 의해 창조되는 공간이며 따라서 관객들 역시 극장의 파트너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극장도 사회를 재건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예술은 사회를 변화시키고 사고를 확장시킬 수 있는 새로운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2008년, 체코 연극계의 최고 화제는 체코 전 대통령이자 체코 민주화 운동의 상징인 바츨라프 하벨이 20년 만에 발표한 희곡 <리빙>(Leaving)이 무대화된다는 소식이었다. 더군다나 이런 역사적인 공연이라면 으레 국립극장에서 공연될 것이라는 기대를 제치고 아르하 극장에서 공연된다는 소식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더불어 아르하 극장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후문에 따르면 하벨 역시 처음에는 체코 국립극장에서 공연을 하고자 제안했으나 현 정권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하벨의 작품을 국립극장에서 선뜻 수용하기에 부담을 느낀 데다 하벨의 까다로운 조건들-연출은 꼭 데이비드 라독(David Radok)에게 맡길 것과 자신의 부인이자 배우인 다그마 하블로바(Dagmar Havlov&aacute;)를 여자 주인공으로 써 줄 것 등(하지만 초연 3주 전에 다그마의 건강상의 문제로 배역은 주잔나 스티비노바(Zuzana Stiv&iacute;nov&aacute;)로 교체되었다)&ndash;까지 겹쳐 프라하 국립극장을 비롯 몇몇 시립극장까지 모두 작품을 거절했다고 한다.

아르하 극장이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아르하 극장은 프라하에서 가장 혁신적인 프로그램을 선보이며 &lsquo;국립극장의 대안 극장&rsquo;("Alternative National theatre" 영국 [가디언], 2003)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결국 2008년도 체코 연극계 최고의 화제작이었던 <리빙>은 아르하에서 성공리에 공연되었고, 아르하 극장은 체코 연극계를 넘어 많은 주요 유럽 신문에 그 이름을 올리며 다시 한 번 주목 받았다.

바출라프 하벨의 <리빙> 2008년 초연

체코는 프란츠 카프카, 드보르작, 스메타나의 고향으로 여느 유럽국가 못지않은 문화적 전통을 가진 나라이다. 하지만 동시에 중세부터 이어진 끊임없는 주변국의 침략으로 인한 고통의 역사도 함께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많은 예술인들이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공산주의 정권 아래 정치적 탄압과 억압된 표현의 자유로 인해 자의반 타의반 무대를 떠나야만 했던 아픔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체코연극계는 1990년대 민주화 바람에 힘입어 40여 년 간의 왜곡된 역사와 문화를 다시 일으키고자 하는 노력이 그 어느 곳보다 활발한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유주의 사상에 힘입어 1994년 새롭게 문을 연 극장이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 있는 아르하 극장이다.


프리젠팅 씨어터와 프로듀싱 씨어터의 적절한 균형

소련 붕괴와 더불어 체코 내에서도 개혁과 개방의 기운이 한창이던 1991년, 프라하시(市)는 본래 전형적인 프로시니엄 무대에 40여 명의 전속배우들을 포함, 120여 명의 극장 스태프들로 운영되던 부리안씨어터Burian Theatre, 체코의 극작가이자 연출가, 음악가였던 Emil Franti&scaron;ek Burian 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극장를 새롭게 이끌 경영자를 공모했다. 이때부터 아르하 극장을 맡아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 현 예술감독이자 극장장인 온드레 히랍(Ondřej Hrab)이다. 히랍은 1억 체코 코루나(한화 약 65억원)를 들여 극장을 다양한 기능을 가진 두 개의 공간으로 개조했는데, 하나는 100명에서 최대 400여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다목적 가변극장이고 또 하나는 100여 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스튜디오 극장이다.

그는 극장의 리노베이션뿐 아니라 운영에서도 파격적인 개혁을 단행했는데, 전속극단을 없애고 극장 스태프를 드라마터지를 포함 기획, 홍보, 마케팅, 기술지원 파트 등 총 스물 두 명만으로 운영되도록 줄인 것이다. 이는 물론 비용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이는 경제적인 극장을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가장 컸겠으나 단순한 경제성, 효율성을 넘어선 운영의 개혁이기도 했다. 히랍은 전속단체를 두고 정기적으로 작품을 만드는 것보다 매년 프로젝트별로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 보다 예술적인 도전을 일으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신 예술적 비전을 같이하는 단체들과 몇 년간 지속적으로 공연을 제작하며 전속단체 이상의 효과를 내고 있다. 이런 지향은 기존의 레퍼토리 위주의 전통적인 연극제작 방식을 벗어나 어떠한 관습에도 물들지 않는 혁신적인 공연을 담는 극장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체코예술가와 해외예술가를 가리지 않고 아르하 극장과 예술적 비전을 같이하는 예술가라면 누구든 작업을 하는 데 두려움이 없었고, 전속극단은 없지만 매년 직접 또는 공동으로 제작하는 신작이 한 해 열 작품에 이르는 등 프로듀싱 극장과 프리젠팅 극장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이루며 효율적이면서도 예술적인 조화를 이루어 나가고 있다.

아르하 극장 내부 모습 및 로비



예상치 않은 만남의 장, 끊임없는 변화의 공간

재단법인 형태로 운영되는 아르하 극장 건물의 소유주는 체코 상업은행(The Czech Commercial Bank)이며, 프라하시를 비롯하여 각종 기금으로 예산의 약 60%를 충당하여 운영된다. 그 외 부족분은 티켓수입에서 25%, 기타 대관 등의 시설임대료에서 15%를 채운다. 쇼핑센터와 호텔이 즐비한 신도시 나포리치(Na Porici) 거리에 위치해 있는 작은 극장이지만 그 혁신적인 프로그램만큼은 체코 내에서 비교할 극장이 없다. 관객들의 지지 또한 대단해서 관객 점유율이 평균 90%를 넘는다. 이들의 이름인 &lsquo;아르하&rsquo;(Archa)는 노아의 방주인 &lsquo;아크&rsquo;(Ark)에서 유래한다. 부패하고 기울어져 가는 세상을 피해 신세계에 대한 희망과 꿈을 담아 세상의 다양한 종류의 동물들을 한 배에 모은 것처럼 내일의 희망과 비전을 가진 세상 모든 종류의 예술을 위한 장소, 잠겨가는 세상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으로 그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극장의 의지와 비전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이들이 개관 기념작으로 선정한 민 타나카(Min Tanaka)와 존 케일(John Cale)의 공연이었다. 일본 무용수와 미국 음악인의 만남은 작품이 가진 급진성과 아방가르드 정신뿐 아니라 서로 다른 문화와 장르의 충돌, 그 안의 조화와 다양한 가치관의 표출이라는 의미에서 아르하 극장의 프로그래밍을 매우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온드레 히람 극장장
이를 시작으로 로버트 윌슨, 빔 반데키부스, 얀 파브르, 필립 글라스, 메르디스 몽크, 데이비드 바이런, 디브이8(DV8), 독트훕(Dogtroep) 등 전 세계의 혁신적인 예술가들의 작품이 모두 아르하를 통해 소개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공연 단체 중 하나인 영국의 현대무용단 DV8이 2005년 신작의 공식 초연에 앞서 마지막으로 작품을 다듬기 위해 머물며 프리뷰 공연을 한 곳도 아르하 극장이었다. 그러나 아르하가 단지 세계의 이름난 아티스트의 공연만 소개한 것은 아니었다. 장르와 경계를 넘어선 새로운 형식의 공연, 새로운 예술과 사고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작품이야말로 언제나 아르하의 주 관심사였다. 그러다보니 간혹 지나치게 급진적인 작품에 불만을 품은 관객들이 로비에서 항의를 하기도 했는데 극장장인 히랍은 이들 관객들과 한 시간 반 동안 토론을 벌이며 극장의 예술적 의도를 피력하고 설득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히랍은 &ldquo;아르하 극장은 예상치 않은 만남의 장이자 끊임없는 변화의 공간&rdquo;이라고 말한다.

전속극단이 없는 대신 예술가들의 활동에 연속성을 부여하고 보다 실험성을 강화하기 위한목적으로 2002년부터는 야나 스포보도바(Jana Svobodov&aacute;)가 이끄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인 ';아르하 랩';(Archa.lab.)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는데, &lsquo;예술의 실험실&rsquo;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 제도는 다양한 예술인들이 2년간의 계약기간 동안 리서치, 워크숍, 즉흥극, 공연 등 다양한 연극적 실험을 하도록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연극인, 거리예술가, 힙합 무용가, 중국 출신의 음악가 등 다채로운 예술가들이 모여 활동하고 있으며 이들이 만든 공연물은 일본, 영국, 오스트리아 등 세계를 무대로 공연되고 있다.


&ldquo;극장은 관객에 의해 창조되며, 관객들도 극장의 파트너이다&rdquo;

아르하 극장의 사회참여 프로그램으로 공연된<Dance Through the Fence>
아르하 극장이 내세우는 또 하나의 원칙은 &lsquo;극장은 사회적 공간&rsquo;이라는 것이다. 이 원칙은 창립목적뿐 아니라 운영면에서도 드러나는데 히랍은 &ldquo;극장은 관객들을 위해 작품을 만들어 보여주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넘어 관객들에 의해 창조되는 공간이며 따라서 관객들 역시 극장의 파트너로서 존재해야 한다&rdquo;고 말한다. 이는 작은 변화가 사회를 바꾸어 나가듯 극장도 사회를 재건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예술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고,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만 존재해서는 안 되고 사회를 변화시키고 사고를 확장시킬 수 있는 새로운 방향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기조 하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lsquo;일탈의 대화&rsquo;(Dialogues on Escape)이다. 이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공연된 <장벽을 뛰어넘는 춤>(Dance Through the Fence)은 이민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에 대한 시각을 변화시키고 다양한 문화와 삶의 방식을 이해하게끔 하는 것을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공연 전 로비에서는 이민자에 대한 사진전과 비디오 인스톨레이션, 그들의 창작품 등을 전시했고, 이어 프로페셔널 아티스트와 망명자들이 함께 각자의 경험에 근거한 리얼 스토리를 바탕으로 음악과 연극, 춤이 어우러진 공연을 만들어 선보였다.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삶의 방식과 그들의 꿈을 공감하는 시간이었다. 이는 이제까지 그 어떤 공연에서도 볼 수 없었던 감동을 선사하며 관객들과 언론에 큰 감동과 반향을 일으켰다.

아르하 극장은 적은 예산과 규모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프로그램과 신념으로 체코 예술계에 큰 자극과 활력을 주고 있다. 낡은 관습과 딱딱하게 굳은 고정관념을 벗어 던지고 진정한 예술성을 기반으로, 극장이 뿌리내리고 있는 사회와 호흡하면서 극장이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는 극장이다. 그리고 이러한 아르하의 비전은 한 소신 있는 예술 행정가의 의지와 신념으로 유지되고 발전되었다. 열린 사고와 문화에 대한 열정을 고루 갖춘 예술행정가가 어떻게 극장과 예술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지 시사하는 점이 크다.





이현정

필자소개
이현정은 영국 워릭대학교 문화정책과 경영(European Cultural Policy and Management) 석사과정을 마쳤으며 1995년부터 공연기획업무를 해오고 있다. 현재 LG아트센터 공연기획팀장으로서 2000년 LG아트센터 개관 이래 기획공연 프로그램을 책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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