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에 다녀왔다. 쿠바는 내 친구 일레에나 블랑코의 고국이다. 그녀는 15년 전쯤에 파리에서 공부할 때 가까이 지낸 몇 안 되는 동료 중의 하나다. 1990년대는 쿠바에게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공산권 블록이 무너지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쿠바는 해당 국가 못지않은 위기에 봉착했다. 소련에 크게 의존하던 경제체제는 뿌리째 흔들렸다. 하루아침에 국제 무역의 75퍼센트를 잃고 국민총생산의 3분의 1이 줄었다고 한다. 당시 정부수반이었던 카스트로는 이 시기를 ‘평화시대의 특별한 시기’라고 불렀다. 쿠바는 ‘특별한 시기’를 극복하기 위해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탕산업에 치우친 산업구조를 전면 개편하고 자본주의의 사악함의 진수로 간주하던 관광산업을 열었다. (덕분에 나도 쿠바 구경을 하게 되었다.)

일레에나는 파리에 오기 전에 중앙정부의 문화예술 국제교류 책임자였고 파리 체재 중에도 공무원의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파리에 있지만 본국의 통제 속에 있었던 것이다. 평소에 차분하고 내성적이었던 그녀는 쿠바 얘기가 나오면 더욱 어두워졌다. 그녀에게 고국은 지긋지긋한 가난과 궁핍으로 통했다. 그 중에서도 그녀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생필품 부족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먹고 사는 데 필요한 물건들은 모두 배급제로 공급되었다. ‘특별한 시기’에는 배급조차 줄었지만 부족한 배급이나마 구하기 위한 줄이 어디든 길게 늘어섰다. 고위인사들조차 이 배급행렬에서 열외되지 않은 것이 위안거리라면 위안거리였다.

‘울티모’는 이런 배급제가 낳은 생활의 지혜다. 정식 스페인어로 말하면 ‘Quien és último?’ 인데 우리말로 바꾸면 ‘맨 뒤가 누구냐?’쯤 된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한두 시간 (또는 그 이상) 기다린다고 생각해보라. 열대의 쿠바 날씨까지 고려하면 여간 고역이 아니었을 것이다. ‘울티모’는 이 긴 기다림을 견디게 해주는 합리적 약속이다.

쿠바에서는 줄 선 사람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국립아이스크림 가게 앞의 장사진 '울티모'의 현장

요령은 간단하다. 기다리고 있는 무리에게 다가가 "울티모?"라고 묻는다. 그러면 그 중의 한사람 또는 그 일행이 손을 든다. ‘내가 울티모’라는 것이다. 그가 그 줄의 마지막 사람이다. 그리고 그 울티모는 바로 자기 앞에 있는 사람, 즉 울티모의 직전 울티모까지 알려준다. 이제 내가 울티모가 된다. 기다리다가 뒤에 오는 사람이 "울티모?"라고 소리치면 나는 나의 직전 울티모가 그랬던 것처럼 손을 들고 울티모를 새로운 사람에게 넘겨준다. 이렇게 되면 나는 내 앞의 사람과 그 앞의 사람 정도만 기억하면 된다. 뒤의 사람도 기억하면 좋다. 얼추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알고 그 사이에 해야 할 일이 아바나의 그랑 떼아뜨로있으면 잠시 기다림에서 빠져나와도 된다. 줄은 느슨하고 기다림은 훨씬 자유롭다. ‘울티모’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새치기가 허용되지 않아야 한다. 쿠바에서 새치기가 중대한 사회적, 도덕적 행패거리가 된 것은 ‘울티모’가 서로에게 매우 유용한 시스템이기 때문일 것이다.

‘특별한 시기’는 지나갔지만 아직도 쿠바에는 긴 줄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나도 아바나의 그랑 떼아뜨로에서 발레 입장권을 구입할 때라든지 도청 소재지 이상 큰 도시에는 반드시 하나씩 있는 국영아이스크림가게에 들어가기 위해서 ';울티모';에 동참해야했다.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매우 유용했다. 쿠바 사람들이 ‘특별한 시기’를 견뎌낸 것은 특유의 낙관성과 쾌활함 못지않게 ‘울티모’와 같은 자연발생적인 공동체 내 약속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너무 나간 것인가? 그렇다면 공동체적 삶이 점점 분해되어 가는 우리 사회에서 ‘울티모’가 좀 부럽다고 하는 것은 더 심한 갖다 붙이기겠다.






이승엽

필자소개
이승엽은 1987년부터 예술의전당에서 극장운영과 공연제작 일을 하다가 2001년 한국예술종합학교로 자리를 옮겨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의정부국제음악극축제의 예술감독을 역임했으며 현재 하이서울페스티벌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 페이스북 바로가기
  • 트위터 바로가기
  • URL 복사하기
정보공유라이센스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