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뜻 수락은 했지만, 머리는 복잡하다. 어쩔 수 없다. 늘 이 모양이다. 수습할 때마다 숨 가빠하면서도, 들어오는 제의란 제의는 덥석덥석 다 받으니. 이 원고도 그렇다. 아무 주제나 편하게 써달라는 청탁에 흔쾌히 쓰겠노라 답해놓고선 내내 마음이 무겁다. 난감하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나? 문화부 장관 교체? 아니면 최근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각 문화예술단체들에게 요구한 통장사본? 아니면? 아니면? 하지만 이런 화두들은 필자의 공력으로 담아내기엔 담론의 부피가 너무 넓다. 그러니 각설하고 필자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에피소드 몇 개를 꺼내 놓겠다.

직업이 직업인지라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 각자가 하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많다. 실은 거의 대부분의 공적 만남이 그렇다. 대부분은 공연 계통에 종사하는 사람. 가끔은 그들의 연습실을 찾을 때가 있다. 자연스럽게 연출가와 배우들이 작품을 연습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다양한 감상에 젖게 된다.

몇 해 전 어떤 연극을 준비하는 연습실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아마도 장면을 만드는 과정이었나 보다. 대사를 뱉고 있는 여배우의 연기를 가로막더니 연출가는 “넌 노래 잘 부르니까, 여기서 노래를 해보는 게 어때?”라고 했다. 가수 뺨치게 노래 잘 부르는 그 배우에게는 무대에서 노래 실력을 뽐낼 기회가 생겼다. 연출가는 비보이 뺨치는 배우에게는 춤 출 기회도 허락했다. 배우에 대한 연출가의 애정이 역력하게 묻어나는 훈훈한 풍경이었다. 덕분에 본 공연에는 원전 희곡에 없던 배우들의 개인기가 첨가되었다. 공연은 가을 풍경보다 쓸쓸하게 막을 내렸다. 여전히 그 연출가는 배우들 사이에서 사람 좋기로 소문 나있다. 하지만 한 사람이 받을 수 있는 사랑에는 정량이 있는 걸까? 아쉽지만 관객들에게는 외면 받고 있다.

참조 이미지 - 연습에 매진 중인 배우들

이번에는 어떤 뮤지컬 연습 현장. 연습실에 도착했을 때, 이미 배우들은 리딩을 시작하고 있었다. 연습을 시작한지 분명 얼마 되지 않았다는데, 이거 참, 어느 부분의 대사인지 도통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한참을 헤맨 이유는 배우들이 대사를 각자 입맛에 맞게 바꾼 탓. 이 정도면 배우가 등장인물을 연기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등장인물을 배우들이 자기화 시킨다고 표현해야 할까? 스타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던, 그래서 스토리조차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티켓의 대부분을 팔아 해치울 수 있었던 덕분에, 뮤지컬은 그 수많은 관객들에게 배부르게 욕을 먹어야 했다. 수수방관을 넘어 대사의 변형을 장려했던 그 연출가, 요새 어째 작품 연출이 뜸하다.

서로 다른 예를 들었지만 결국 같은 이야기다. 배우들의 입맛에 맞게 대사를 바꾸고, 배우들의 개인기에 의존하는 것, 물론 둘 다 배우를 사랑해서 벌어진 일일 것이다. 또한 배우에 대한 연출가의 신뢰가 그 정도로 깊다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고, 연출가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것보다 여러 사람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아이디어가 더 많을 테니. 하지만 이는 결국은 연출가가 자신의 의무에 태만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상상력이 한계에 도달해 배우들의 상상을 임대할 때, 연출가는 임무를 방기한 것이다. 혼자의 상상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빈틈을 배우들에게 의존해 채울 때, 배우는 곤혹스럽겠지만, 관객은 곤욕스럽다.





김일송

필자소개
김일송은 월간 [씬 플레이빌]의 편집장으로 공연 잡지 편집장이라는 명판과 책상을 가지고 있지만, 공연에 대한 깊은 지식도, 글에 대한 넓은 지식도 지니지 못해, 공연과 글 둘 사이에서 양다리 걸치다 다리 찢어졌다.


  • 페이스북 바로가기
  • 트위터 바로가기
  • URL 복사하기
정보공유라이센스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