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예술경영]은 창간2주년을 맞아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견학자, 오피니언리더들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통섭이란 국어사전에 '사물에 널리 통함' 또는 '서로 사귀어 오감'이라는 뜻으로 풀이된 통섭일 것이다. 그런데 통섭은 그게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굳이 '통섭'이라는 어려운 단어를 새로 끄집어 내지 않아도 된다. 이미 '학제간 연구'라는 쉬운 말이 있다. 그런데 굳이 통섭이라는 구석에 처박혀 있던 단어를 끄집어내서 사용하는 이유는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sciencewillprev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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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뉴스나 신문기사를 보다가 영어단어 때문에 당혹했던 적이 내 기억 속에는 딱 두 번 있다. 밀레니엄(millenium)과 통섭(consilience)이 바로 그것이다.

‘밀레니엄’이야 천 년에 한 번 쓰는 말이니까 ‘새천년’이 도래할 즈음에 살았던 덕에 써 볼 수 있는 행운을 가졌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초등학교 3학년인 내 딸은 아마 밀레니엄이란 말을 쓸 기회가 영영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사용한 영어사전에는 나오지도 않는 ‘콘실리언스(consilience)’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어원을 따져보면 ‘함께’+‘뛰어 넘기’라고 하던데, 무엇을 어떻게 뛰어넘는다는 말이며 왜 그것의 번역어는 ‘통섭’인지 모르겠다. 난 통섭이 아직도 당혹스럽다.

‘학제간’이 아닌 ‘통섭’이라 말하는 이유

설명하기 어려운 이 단어가 특히 과학과 관련하여 시대의 화두가 되어 있다. 이 말에 관심을 두지 않는 과학자는 ‘자기의 좁은 전공분야에만 빠져 있는 우물 안 개구리’ 취급을 받는다. 뇌를 연구하는 사람은 생물학과 물리학을 넘나들어야 하고, 인지과학자는 뇌과학, 정보공학, 로봇공학과 나노공학을 두루 섭렵해야 한다. 어느덧 ‘종횡무진’의 시대가 된 것이다. 또 교양인들은 과학과 인문학의 소통 수단으로서 통섭을 주장한다.

이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통섭이란 국어사전에 ‘사물에 널리 통함’ 또는 ‘서로 사귀어 오감’이라는 뜻으로 풀이된 통섭(通涉)일 것이다. 그런데 통섭은 그게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굳이 ‘통섭’이라는 어려운 단어를 새로 끄집어 내지 않아도 된다. 이미 ‘학제간(學際間, interdisciplinary) 연구’라는 쉬운 말이 있다. 이 단어는 작은 사전에도 나오고, 또 사전을 찾아보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굳이 통섭이라는 구석에 처박혀 있던 단어를 끄집어내서 사용하는 이유는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가 쓰는 통섭은 ‘전체를 도맡아 다스림’이란 뜻의 통섭(統攝)이다. 그리고 통섭을 가장 먼저 주창한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말하는 통섭은 생물학을 모든 학문의 주인으로 삼는 생물학 제국주의 또는 모든 사회 현상을 생물학적 원리로 설명하는 생물학적 환원론이다. 윌슨의 제자들은 ‘제국주의’와 ‘환원론’이라는 말에 불쾌하겠지만, 그의 책을 읽어보면 이것은 단순한 혐의가 아니라는 점을 누구나 알 수 있다. 또 현대 사회에서 생물학은 그런 주장을 할 자격이 있다.

기억해 보자. 1970~80년대에 커트라인이 가장 높은 학과는 서울대 물리학과였다. 대학을 다니면서 교양깨나 쌓았다는 생물학도의 뒷주머니에는 ‘상대성 이론’이나 ‘카오스 이론’에 관한 문고판들이 꼽혀 있었다. 심지어 철학자들은 정체가 모호한 프리초프 카프라의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에 열광하기도 했다. 그때는 물리학의 시대였던 것이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다. 자연계에서 대학 입학 점수가 가장 높은 학과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만) 생물학 계열의 학과들이다. 하버드와 엠아이티(MIT) 학생들이 가장 많이 구입하는 책은 글쓰기 책과 더불어 생화학 교과서다. 이제는 생물학의 시대다. 그것도 진화생물학의 시대다. 매년 출판되는 교양과학서의 반 이상이 진화를 다루고 있다. 심지어 10월 23일자 일간지 서평란에 실린 과학책 4권이 모두 진화이론에 관한 것이었다.

또 ‘다윈과 철학 사유 체계의 변화’ ‘진화론과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 ‘윤리의 세방화를 촉진하는 다윈주의’ ‘유전자와 공진화를 꿈꾸는 정치학’ ‘인간의 상상 형식을 근본적으로 바꾼 다윈’ ‘마음의 진화가 선사하는 미술’ ‘진화생물학과 음악의 기원’ ‘다윈 안에서 찾는 환경 위기 해결책’ ‘생명 복잡계의 질서의 뿌리를 찾아서’ ‘진화경제학’ 등 찰스 다윈이나 진화에 환원되지 않는 분야가 거의 없다고 할 정도다. 진화로 통섭(統攝)되고 있다.

왜 진화가 사고의 중심이 되었을까?

그런데 궁금하지 않은가? 왜 진화가 이렇게 떴을까? 왜 진화가 사고의 중심이 되었을까? 진화에 관심을 갖고 연구한다고 해서 우리 생활이 나아지는 게 아닌데…. 자연이 마치 적이나 되는 양 마구잡이로 정복한 사람들은 이제 인간이라는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이미 우리가 먹고 살만하기 때문이다. 부족할 때는 뒤를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 즉 인간과 생명의 기원을 돌아볼 여유가 있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빅뱅, 즉 우주의 기원에 대한 관심 역시 높아지고 많은 비밀들이 풀리고 있다.

진화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신은 망상”이라고 하고, 우주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우주가 창조되는 데 신은 필요 없다.”고 말한다. ‘통섭’이라는 말을 유행시키는 동안에 우리는 생물학의 지배를 받고 있다. 생물학에 통섭 당하고 싶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지피지기(知彼知己)가 답이다. 자기 학문을 깊이하면서 진화를 공부해야 한다. 꼭 이긴다는 법은 없지만, 무작정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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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철학 ③ 출판 ④ 경제 ⑤ 건축

이정모 필자소개
이정모는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생화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독일 본대학교 화학과에서 곤충과 식물의 커뮤니케이션을 연구했다. 안양대학교 교양학부에 강의교수로 재직하면서 <과학사> <과학과 종교> <과학기술과 사회> 등을 강의했으며, 현재는 과학저술과 번역 그리고 과학 대중강연에 전념하고 있다.『달력과 권력』『바이블 사이언스』『그리스로마 신화 사이언스』등을 썼고『마법의 용광로』『생명의 음악』『매드 사이언스 북』등을 옮겼다. 현재 경기도 일산에 산다. 착하다. penguin120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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